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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응구(柳應龜 )
 

류 응 구 柳  應  龜

 

<류응구 : 1762~1821 : 純祖朝 孝子 大丞公 27世 : 夏亭公派>

 

자 락서(洛瑞).

부제학 희저(副提學 希潛)의 10대손이요, 증호조참의 몽주(贈戶曹參議 夢周)의 8대손이요, 하전(夏?)의 장자인데, 출계하여 백부 하복(夏馥)의 계자가 되었다.

영조(英祖) 38년 壬午 8월 12일 백천 식현(白川 食峴)에서 태어나 총명하기 그지없더니, 일찍 부모를 여의고, 6세에 증조모 승중상(曾祖母 承重喪)당하여 애척(哀慽)한 나머지 몸이 수척해지자 그 유모(乳母)가 병이 날까 염려하여 몰래 닭죽을 끊여 권함에 공이 말하기를 『몸에 상복을 입고 입에 닭죽을 넣으면 누가 상인이라 하겠읍니까?』하고 물리쳤다. 9세에 또 조모 승중상(祖母 承重喪)을 당하여 조석 궤전(朝夕 饋奠)과 사시 호곡(四時 號哭)이며 매일 성묘를 3년동안 비록 몸이 아파도 폐하지 않으니 이웃에서 보고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34세에 자모(慈母)의 병환을 당하여 주야(晝夜)로 시탕(侍湯)에 지성을 다하고, 드디어 손가락을 끊어 마침내 회복(回複), 3년의 명을 연장하였다. 이에 향당 유림들이 포상(褻賞)을 나라에 청하고자 하거늘 공이 굳이 말려 잠잠해졌다. 공께서 임종에 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들이 만약 효행 (孝行) 2자로서 나를 위하여 발언(發言)한다면 실로 계술(繼述)의 도리가 아니다』하고 숨을 거두니 때는 순조(純祖) 21년 辛巳 9월 8일이었다. 족질 승기(族姪 昇基)가 행장을 짓고, 사림(士林)들의 정문(呈文)으로 공의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증직이 내리었다.

배위 단성문씨(丹城文氏)는 도린(道麟)의 따님으로 3남 3녀를 두고 졸하니 백천 식현(白川 食峴) 마을 후록 임좌(後麓 壬坐)에 고위(考位)와 쌍분으로 모시었다.

아들은 운익(運益) ․ 운정(運鼎) ․ 운겸(運謙)이요, 따님은 평산신대복(平山申大猿) ․ 한양조광석(漢暘趙光錫) ․ 부사(府使) 한산이희서(韓山李羲書)에게 출가하였다.

운익(運益)은 24세에 일찍 돌아가셔 자녀를 두지 못하였음으로 중제 운정(仲弟 運鼎)의 장자 진사 영석 (永錫)이 입계(入系)하였다.

운정(運鼎)은 겨우 말을 배울때 문득 문자(文宇)를 해득하더니 이미 장성함에 많은 서적(書籍)을 두루 읽어 한번 보면 기억하고, 붓을 잡으면 거침없이 써서 필법(筆法)으로 또한 세상에 알려졌었다. 효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34세때 친환(親患)을 당하여 밤낮으로 간호에 힘씀은 물론 약탕(藥湯)과 죽음(粥飮)을 몸소 다려 드리고, 단(壇)을 쌓아 하늘에 기도하되 자신을 대신해 달라고 빌었다. 막상 숨을 거두실 즈음 손가락을 깨어 그 피로서 마침내 회생함을 얻으니 사림들이 효행의 천장(薦狀)을 올리고 방백(方伯)이 학행을 천거하였다.

운겸(運謙)은 천성이 어질고 풍채가 남달리 뛰어났더니, 어려서부터 가정 교훈을 복습하여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친환(親患)을 당하여 시탕(侍湯)은 물론 중형으로 더불어 단을 쌓아 기도하였으며 드디어 친상을 당하여 슬퍼한 나머지 몸이 수척하기에 이르렀고, 복을 마친후 제사를 당함에 울부짖는 통곡 소리가 이웃 마을을 감동시키었다. 향중 인사(人士)들이 그 행의(行誼)를 나라에 호소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되었고, 이조판서 김성근(吏曹判書 金聲根)이 묘갈명을 지었다.

후손이 연백군 유곡면 식현리(延白郡 柳谷面 食峴里)에 세거하고 있는데 乙酉(1945) 광복(光復)후에 월남(越南)한 많은 후손이 서울을 중심으로 청원군 강외면 만수리(淸原郡 江外面 萬水里) ․ 파주군 광탄면 기산리(坡州郡 廣難面 岐山里)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 行狀. 甲子譜. 世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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