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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대원(柳大源)
 

류 대 원 柳  大  源

 

<류대원 : 1834~1903. 高宗朝 儒學者 大丞公 28世 : 左相公派>

자 자원(子遠). 호 자겸와(自慊窩)

증좌찬성(贈左贊成) 종(捺)의 13대손이요, 염채 영(濂齋 渶)의 5대손이요, 진태(鎭台)의 3자로 순조(順祖) 34년 甲午 3월 12일 부여(扶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보통 사람에 뛰어나 울고 웃는 것을 가벼히 하지 않더니 9세에 부친을 여의고 애척(哀戚)함이 성인(成人)과 같았고, 23세에 모친을 여의였는데 돌아가시기에 앞서 손가락을 찢어 진혈(進血)하고, 막상 돌아가심에 3년을 여묘(廬墓)하여 선상(善喪)으로 들리었다.

일찌기 향숙(鄕塾)에서 과거 공부를 전념하다가 율곡전서(栗谷全書) 가운데 『이단(異端)은 문 밖의도 적이요, 거업(擧業)은 문 안의 도적이라』는 대목에 이르러 문득 탄식하여 이르기를, 『30년 동안을 내구(內寇)에 빠진바 되었다』 하고, 드디어 과거 공부를 폐하고 고인(古人)의 학문을 닦는데 전념하였다.

장성(長城)으로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선생을 찾아 배알하고 학문의 대체(大體)를 들은 후, 고종(高宗) 7년 庚午(1870)에 전재 임헌회(全齋 任憲晦) 선생에게 집지(執勢)하니, 선생이 『천자(天姿)가 좋으니 오당(吾黨)에 사람이 있도다』고 칭찬하시었다.

한편 동문의 야우 서정순(野愚 徐政淳) ․ 독수재 윤치중(篤守齋 尹致中) ․ 간재 전 우(艮齋 田 愚) ․ 근암 심의윤(謹庵 沈宜允)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강마(講磨)하는데 전심하였다.

11년 甲戌(1874)에 만동묘(萬東廟)의 복설(復設)을 상소로써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만 돌아와 선생을 뵈오니 선생께서 양구산(楊龜山)의 설매시(雪悔詩)를 써 주며 경계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문을 달고 뜻을 구하더니 선생께서 돌아가심에 심상(心喪) 3년을 행하였다.

18년 辛巳(1881)에 양풍(洋風)이 쇄도하여 변복령(變服令)이 내리자 공께서 심의(深衣)를 지어 입으시고, 31년 甲午(1894)에 동학난(東學亂)이 일어나 인심이 흉흉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공께서는 일체 담담하시므로 모두 감복하고 이르기를 『이제 비로소 군자인(君子人)임을 알겠다』하였다. 이듬해 乙未(1895)에 명성왕후(明成王后)가 피화(被禍)되자 상소로서 왜적들을 토벌하고, 외국의 문물(文物)을 가까히 말도록 청하였다.

봉선(奉先)에 지성스러워 선대 이하 묘전(墓田)을 장만하고, 종가(宗家)가 가난함으로 조고(祖考)와 고위(考位)를 자못 20여년이나 권봉(權奉)한후, 위토를 마련하여 봉제(奉祭)토록 하였다. 그리고 새벽으로 사당 참배를 폐하지 않고 무릇 신물(新物)이 나면 반드시 천신(薦新)한 후에 먹었다.

예(禮)로써 집을 다스려 부부간에 서로 공경하고 남녀간에 분별을 엄히 하였으며 무축(巫祝)을 절대들이지 않아 온 집이 엄숙하고 화목하였다.

생일이나 회갑에 술자리를 허락하지 않고 관청에서 보내준 물건이면 비록 정의가 두텁더라도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39년 壬寅(1902)에 범문정공(范文正公)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의창(義倉)을 설치하고 구원지계(久遠之計)를 삼았는데 이는 실로 자봉(自奉)을 검소히 하고 곡식을 저축하여 이룬것이었다. 이로써 매양 가난한 종족의 기근(饑饉)을 구제하고 또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도왔으며, 한편 향리의 궁핍한 사람에게도 그 은혜를 베풀었다.

어느날이건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경직의방(敬直義方)을 몸소 실천하는 반면 유현(幽顯)으로써 가손(加損)을 두지 않고 쇠로(衰老)로써 해태(懈怠)함이 없었으며, 무릇 경서 백가(經書 百家)를 널리 통달하고 더우기 주서(朱書)를 외워 말하듯 하였다. 그리고 심성(心性)을 논하여 이르기를 『정자(程子) ․ 주자(朱子)의 서적으로 경(經)을 삼고, 율곡(栗谷) ․ 우암(尤庵)의 지론으로 위(緯)를 삼아 매산(梅山)과 나의 선사(先師)의 설(說)을 참고할진대 사물이 일관(一貫)하여 호락(湖洛)의 시비가 스스로 정해지리라』하였다.

동사촬요(東史撮要) 3권 ․ 예해절요(禮解節要) 3권 ․ 주자성리설(朱子性理說) 10권을 찬술하고 유성문헌록(儒城文獻錄) 3권을 간포하였으며, 이밖에 시문(詩文) 장갈(狀竭) 등 유고(遺稿) 5권이 전하고 있다. 또한 학도들이 수없이 몰려 학업을 청하니 모두 받아들여 추향(趨向)을 바르게 가르쳐 성취시키었다.

고을의 선비들이 식년마다 매양 관부(官府)에 공을 천거하였는데 그 천목(薦目)에 이르기를 「효우(孝友)와 학행(學行)은 일성(一省)의 흠모(欽慕)하는 바라』하고, 또 『심의(深衣) 독서(讀書)로 평생을 마쳤다』하고, 또 독학 역행(篤學 力行)으로 은거자정(隱居自靖)하였다』하였으니 이상은 도천록(道鳶錄)에 기록된 바이다.

임종(臨終)에 이르러 의관(衣冠)을 갖추고 종가(宗家)의 사당(祠堂)을 배알한후 자만시(自輓詩)를 손수 써 놓고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때는 고종(高宗) 40년 癸卯 10월 5일로 향년 70이었다. 향리(鄕里)의 사림(士林)들이 모두 탄식하여 이르기를『사문상의(斯文喪矣)라』하였다.

배위 광산김씨(光山金氏)는 표(杓)의 따님인데 무육 조졸(無育 早卒)하고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옥희(鈺喜)의 따님인데 1남 3녀를 두었다.

묘소는 부여군 대방면 당리촌 중록 임좌(扶餘郡 大方面 唐里村 中麓 壬坐)에 삼위 합부(三位 合祔)로 모셔 있으며 야우 서정순(野愚 徐政淳)이 묘지명을 지었다.

아들은 병위(秉?)요, 사위는 광산김의현(光山金宜鉉) ․ 남원윤태원(南原尹泰元) ․ 경주이철영(慶州李喆榮)이다.

병위(秉서?)는 자 문약(文若삼)이요, 호 경운(耕약芸경)인데 고종(高宗) 7년 庚午 (1870) 3월 3일생이다. 천품이 영오(潁悟)하여 8세에 소학(小學)을 읽고 13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독할뿐 아니라 속문(屬文)에 능함으로 부친께서 과정(課程)을 엄정히 세워 규구(規炬)에 쫓도록 하였다. 이로써 재덕(才德)을 겸비하고 장차 과거에 응시코자 1년간을 태학(太學)에 가 있다가 시사(時事)가 그릇됨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심하는 한편 동소남(董邵南)의 행의(行義)와 양친(養親)을 사모하여 경운(耕芸)으로 자호하였다. 친상(親喪)에 여묘(廬墓)로서 복제(服制)를 마치고 가정의 연원(淵源)을 계술하는 한편 자부(姊夫) 성암 이철영(醍庵 李喆榮)으로 더불어 학문을 독실히 닦아 울연히 사우(士友)의 표준이 되었다.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성도(聖道)를 보위하며 후진(後進)을 가르치되 정성을 다하더니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고 세상이  바뀌지매 애통한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 인산 소휘면(仁山 蘇輝冕)으로 더불어 그 거취를 함께 하였다. 문집(文集) 2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己未(1919) 7월 3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0세였다. 공의 증손 익렬(益烈_과 완렬(浣烈)이 부여읍 중정리(扶餘邑 中井里)에 살고 있다.

※ 墓誌銘, 自慊窩集, 朝鮮圍書解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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