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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양수(柳陽洙)


류양수 柳 陽 洙

<류양수 : 譜名 陽烈, 號 民牧, 세례명 오가스틴, 1923.8.9陸士 7期 美國參謀大學, 陸章少將, 陸本作戰參謀次長, 國家再建最高會議 外務國防, 經濟委員長, 駐사우디大使, 交通部 ․ 動資部長官 東亞建設(株)副會長, 忠景公派 : 大丞公 33世, 서울 성동구 광장동 워커힐 APT 52-501>

전연사별좌(典涓司別坐) 증(贈) 호조참판 만은공(晩隱公) 도장(道長)의 후손으로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 죽헌공(竹析公) 지경(持敬)의 10대손이요, 기언(基彦)의 손자요, 인태(寅泰)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전남 광주시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강릉유씨(江陵劉氏) 동희(東禧)의 따님이시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영오(穎悟)하여 일찌기 명문인 광주서중(光州西中)을 거쳐 설제의 징병에 끌려가 중국 산동성지방을 전전하다가 광복을 맞아 부친의 친구인 경남도경 경찰부장의 추천으로 경위로 특채되어 전남도경에 재임중 신안군 하의도에서 일어날 농민난동사건때 경찰관 20명을 인솔하여 내려가 중재에 나서 소작료문제를 해결하고 1주일만에 난동을 진압하였다.

경찰직 3년만인 1948년 봄 조국간성(祖國干城)의 큰 포부를 품고 정래혁(丁來赫) ․ 이주일(李周一) ․ 장경순(張坰淳) ․ 윤태일(尹泰一)등과 함께 육사(陸士) 7기로 입교하여 당시 교관 박정희(朴正熙)중대장과 해후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중대장은 두 후보생의 사망 사고로 졸업 2개월을 앞두고 해임되므로써 그 해후 기간은 오래지 않았다.

동년 10월 졸업과 동시에 광주 5여단에 배속되자 곧 여순(麗順) 반란사건이 일어나 구례토벌대소대장으로 전투중 시찰차 내려온 당시 육본(隆本) 정보국장 백선엽(白善燁)중령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백중령의 도움으로 육본정보국 전투정보과로 발령받아 전임하였다.

얼마후 박정희(朴正熙)소령이 전투정보과장에 임명되였지만 이미 숙군(肅軍)대상자로 조사를 받

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근무하는 일이 없었다가 곧 정식 입건되어서 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8년 12월, 여순반란사건 진압에 공을 세우고 대위로 2계급 특진하여 박정희소령 후임으로 전투정보과장에 임명되고 이어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당시 정보국장 백선엽(白善燁)대령은 7월 하순 5사단장으로 부임하고 후임에 이용문(李龍文)대령이 취임 했는데 하루는 백대령이 찾아와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선고를 받고 군적이 박탈된 박정희소령 구명 문제를 상의하면서 휘하에 채용해줄 것을 부탁 받고 이용문(李龍文)국장의 허락을 얻어 문관으로써 직제에도 없는 『상황실장』이라는 지위를 만들어 그 자리에 앉히니 박문관은 곧 옛 부하의 부하가 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연령차이와 옛날 상하관계를 넘어 의기상합한 친근한 사이었다.

육본 전투정보과장 재임중 49년5월 육사(陸士) 8기생들이 졸업하자 백선엽정보국장의 지시에 따라 육사교장인 최덕신(崔德新)을 찾아가 우수졸업자 25명을 차출하여 육본 정보국으로 충원(充員)하였다. 그중 전투정보과에 데려온 신참 소위중에는 김종필(金鐘泌) ․ 이병희(李秉禧) ․ 이영관(李永根) ․ 강신탁(姜信卓) ․ 고제훈(高濟勳) ․ 김진구(金振九) ․ 서정순(徐延淳) ․ 전재덕(全在德) ․ 정순갑(鄭淳甲) ․ 최명재(崔明載) ․ 표대현(表大鉉)등이 끼어 있었다. 그리고 정보국 다른 과에 배치된 인물은 이희성(李憘性) ․ 김홍원(金洪元) ․ 나공성(羅公成) ․ 전창희(全昌熙) ․ 최영택(春英澤)등이다.

우수한 육사 8기생 소위들과 박정희문관의 헌신적 도움으로 대북(對北)정보수집과 그 분석작업을 활발히 전매하여 북한의 동태와 남침준비상황을 알고 이용문(李龍文)국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장도영(張都嘆)국장에게 『북한이 임진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동원하고 전차와 대포를 전방에 배치하고 있어 조만간 남침할 것 같다』고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나 이를 묵살하므로써 두사람 사이에 의견충돌이 잦았다.

하루는 또 남침우려가 크다는 보고서를 냈더니 장국장은 『당신 나와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하더니 6사단으로 발령을 냈다. 박정희문관과 김종필중위등 8기생 부하들의 전송을 받고 50년6월 25일 새벽 서울역에서 철원(鐵原)행 기차로 떠나는 순간 북한은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넘고 있었다.

이때 중령으로 진급 6사단 보병 대대장으로 혁혁한 무공(武功)을 세우고 다음해 1월 대령으로 진급하여 임충식(任忠植 ․ 국방장관역임) 후임으로 3군단 18연대장에 임명되었다. 휘하에는 1대대장 이병형(字秉衡 :육사 4기 예비역중장)중령, 2대대장 정승화(鄭昇和 : 육사 5기 예비역대장)소령이 있었다.

그후 동 제37연대장을 역임하고 7사단 부사단장에 승임되어 야전 지휘관으로서 전투력 향상은 물론 치밀한 전략 전술로 국토방위능력을 구축하였다.

1953년 미국 포트닝보병학교를 졸업하고 이해 육군준장에 승진, 1군사령부정보참모에 취임하여 백선엽(白善燁) 1군사령관을 도와 한국 최초의 기동군사훈련을 입안하였다. 56년 미국 참모대학을 졸업과 동시에 진해의 육군대학 부총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교육차 입교한 박정희준장(朴正熙准將)과 자주 만나 소주잔을 기우리며 우정을 나누었는데 박준장은 정치현실을 비판하며 우국충정을 토로하곤 하였으나 그가 장차 군사혁명까지 일으킬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후 주미(駐美)한국대사관 육군무관(陸軍武官)으로 재직 하다가 60년 봄 육군소장에 진급과 동시에 제15사단장으로 취임하였다.

15사단장 재임중 하루는 이한림(李輸林) 1군사령관이 헬기를 타고 찾아와 『장도영(張都暎)총장이 류장군(柳將軍)을 막료(幕僚)로 달라는데 어쩌면 좋겠오?』하고 물었다. 그러나 장도영씨에 대해서는 『남침임박』 보고를 묵살한 적이 있어 인상이 좋은 편이 못되어 거절하였다.

그 뒤로도 이사령관은 세 번이나 더 찾아와 『더이상 거절하면 장총장과 나사이가 이상해지겠다』며 전임을 강요하여 하는 수 없이 61년 4월 18일 작전참모부 차장으로 부임하였다.

장총상은 『강요해서 미안하지만 그러나 도와주오』라고 하면서 『전쟁계획 통제관』이라는 이름을 붙혀주었다. 장총장은 그때 방위계획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적임자가 없어 고심하다가 경험이 있는 류소장을 지명 차출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누구든 필요한 인원은 모두 데려다 쓰라』고 허락하였다.

그후 육군본부 안에 천막을 치고 인선작업을 하던 중 한달도 채 못돼 5 ․ 16을 만났다. 이때 작전참모부 장경순(張坰淳)교육처장, 조시형(超始衡)작전 처장으로부터 『5 ․ 16혁명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이들은 이미 그 혁명에 깊이 관여했었지만 그 사실을 깊이 숨겨왔던 것이다. 이 보고를 통해 비로소 박정희(朴正熙)와 김종필(金鍾泌)이 주동자임을 알게 되었으나 두 사람은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어서 심히 안도 하였다.

5 ․ 16 아침 장도영(張都暎)참모총장실에서 박정희소장을 만났더니 박소장이 『류장군 도와주어야겠오, 그런데 총장이 저렇게 버터고 있어 큰 일이오』라고 걱정하므로 『여기까지 와서 물러나면 더욱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인 즉 소신껏 추진토록 하시오』하고 격려하며 주체세력(主體勢力)에 합류할 뜻을 비쳤다.

이로써 군사혁명위원, 국가재건 최고회의 최고위원, 동 외무국방위원장, 재경위원장을 역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우방국과의 적극외교를 통해 국기(國基)를 확고히 다져놓았을 뿐 아니라 국방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군사외교를 전개하여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한국의 방위능력과 대북전략대책을 치밀하게 세워놓고 외국자본을 도입하여 정유공장을 최초로 건립하고 석유공사를 발족시켜 놓았다.

63년 민정이양(民政移讓)을 앞두고 최고위원간에 이미 군의 위계질서가 무너져 있었으므로 『최고위원을 역임한 사람은 원대복귀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정책 소위원장이 되어 『범국민정당(汎國民政黨)』이라는 정당결성에 참여 시켰다. 정책소위원(政策小委員)들은 류병현(柳炳賢 : 육사 5기 ․ 예비역대장) 박태준(朴泰俊 ․ 육사 6기 ․ 포항제철회장) 홍종철(洪鍾哲 : 문공부장관역임) 길재호(吉在號 : 공화당사무총장역임)등이었다.

그러나 박정희(朴正熙) 최고회의의장은 범국민정당을 택하지 않고 별도로 사전에 조직된 공화당(共和黨)을 업고 출마키로 결정하므로서 예편을 자원, 군복을 벗고 정치와 인연을 끊었다.

1963년 9월 예비역으로 전역(轉役)과 동시에 주 필리핀대사로 임명되어 1979년 12월까지 16년간 외교관으로써 동남아 여러나라 대사를 역임하였다. 그동안 군사 전략가로써 뿐만 아니라 외교관으로서도 그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여 항상 박정희대통령의 추중을 받았다.

1967년 주 오지리대사로 옮겼다가 한국군이 파병(派兵)한 월남전(越南戰)이 한참 치열했던 1971년에 주 월남대사로 임명되어 군사전략가적 입장에서 아군의 전황 판단과 정세 추이(推移)를 면밀히 분석하여 열강 우방국간의 외교전략을 우리측으로 유리하게 이끄는데 모든 외교적 수완을 총동원하여 군사적 ․ 경제적 측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파병 6년만에 한국군 전 병력을 무사히 귀환시켰다.

월남에서 철수한 후 1년 4개월간 동서석유화학(주) 사장을 역임하고 1975년 주 사우디아라비아대사로 부임하여 주 오만토후국대사 ․ 주 카타르대사를 겸임하고, 한국기업의 중동(中東) 진출과 원유(原油) 도입 및 시장(市場) 다변화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이룩해 놓았다.

1979년 박정희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되는 12 ․ 12사태가 발생하자 최규하(崔圭夏) 대통령권한대행이 신현확(申鉉碻) 내각을 개편할 때 국무위원으로 발탁되어 교통부장관에 취임하고 다음해 광주사태의 발발로 신현확국무총리가 사임한 후 이루어진 개각(改間)에서 동력자원부장관으로 전임하여 평화통일정책자문위윈회 부의장을 겸하였다.

이때 국보위 금진호(琴震鎬) 상공분과위원장과 유공(油公)불하문제로 의견이 대립되고 없던 중 차기 집권자로 부상한 전두환(全斗煥) 국보위 상임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전(全)씨는 유공 불하문제를 거론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그는 이 문제를 동자부에 맡기지 않고 국보위에 넘겼다. 그러나 불하 반대 소신을 끝까지 굽히지 아니하였다.

80년 9월 전두환위원장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장관직을 박봉환(朴鳳煥)씨에게 물려주고 관직에서 퇴임한 후 대한통운, 여행사회장을 역임하였다가 82년, 동아건설주식회사 부회장에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주시 출신으로써 항상 광주사태의 불상사를 안타까이 여겨오다가 전씨의 부인 이순자(李順子)의 숙부인 이규광(李圭光)씨를 통해 광주문제 해결을 건의하면서 『유족들을 만나 사과하고, 유가족 ․ 부상자들의 취업, 위령탑 건립, 보상금 지급등 성의를 보이면 해결의 길도 열린다』고 권유했지만 묵살당했다.

저서로는 1981년 수문서관(修文書館)에서 발행한 『대사의 일기장』이라는 책이 있다. 이책은 16년간의 대사시절 겪었던 비화(秘話)를 엮은것인데 지금은 6 ․ 25참전기, 박정희(朴正熙)전 대통령, 장도영(張都暎)전 육군참모총장, 정승화(鄭昇和)전 육군참모총장, 육사 8기생, 전두환(全斗煥)핀 대통령과의 인간관계를 엮은 후속편을 준비 하고 있다.

부인은 나주나씨(羅州羅氏) 종원(鍾元)의 따님이요, 계배(繼配)는 고령(高靈) 김재화(金在華)여사로 봉현(鳳顯)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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