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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관(柳寬) 하정공


 

류 관 ( 柳 寬 )       

 

<류관 : 1346~1433 : 세종조 상신 대승공 13세 : 하정공파조>

 

초명 관(관). 초자 몽사(몽사)

자 경부(경부). 호 하정(하정)

공은 예부상서 언침(예부상서 언침)의 5대손이요, 삼사판관 안택(삼사판관 안택)의 차자로 고려 총목왕(총목왕) 2년 병술 11월에 태어났다.

공민왕(공민왕) 18년 기유(1369)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고 20년 신해(1371)에 문과에 급제하여 비서교감(비서교감)·상서주부(상서주부)·춘추검열(춘추검열)·예문공봉(예문공봉)·진덕박사(진덕박사)를 두루 거쳤다.,

우왕(우왕) 2년 병진(1376)에 예의랑(예의랑)으로 배어대(배어대)를 하사받고, 판도좌랑(판도좌랑)을 거쳐 4년 무오(1378)에 전보판관(전보판관) 으로 자금어대9자금어대)를 하사받고 이어 전의시승(전의시승)·전리정랑(전리정랑)·소부소윤(소부소윤)·전교부령(전교부령)을 거쳐 13년 정묘(1387)에 지봉주사(지봉주사)로 나갔다.

창왕(창왕) 원년 기사(1389)에 지제교(지제교)로서 시관(시관)이 되어 이조(이조)등 33인을 문과에 선발하고, 이어 전농정(전농정)으로 경력사경력(경력사경력)을 겸임하였다.

조선조(조선조)에 들어와 내사사인(내사사인)·병조의랑(병조의랑)·세자우필선(세자우필선)을 거쳐 태조(태조) 3년 갑술(1394) 11월 사헌중승(사헌중승)으로 재직중 론모악정도길흉소(론모악정도길흉소)를 올려 왕의 윤허를 얻고, 5년 병자(1396)에 시관으로 김익정(김익정)등 33인을 선발하였다. 개국원종공신(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됨에 전(전)을 올려 사양하고 성균대사성(성균대사성)·좌산기상시(좌산기상시)·세자우보덕(세자우보덕)·보문직제학(보문직제학)·경연시강관(경연시강관)·형조전서(형조전서)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정종(정종)원년 기묘(1399)에 이조전서(이조전서)에 제수되고, 이어 집현전직학사(집현전직학사)·중추원부사(중추원부사)·보문각학사(보문각학사)·동지경연사(동지경연사)를 거쳐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태종(태종) 3년 계미(1403)에 계림부윤으로 전임되었다가 5년 을유(1405)에 전라도 관차사겸출석사(전라도관찰사겸출석사)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내직으로 들어와 예문대제학(예문대제학)으로 판공 안부사(판공안부사)·지경연춘추관사(지경연춘추관사)·세자좌빈객(세자좌빈객)을 겸임하였다. 10월에 하정사(하정사)로 명(명)나라에 갔다가 7년 정해(1407)에 돌아와 개성유후(개성유후)를 거쳐 9년 기축(1409)에 다시 예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으로 지경연춘추관사(지경연춘추관사)를 겸임하고 이듬해 태조실록(태조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2년 임진(1312)에 정유처취처소(정유처취처소)를 올려 윤허를 얻고 14년 갑오(1414)에 대사헌(대사헌)에 제수되어 전직(전직)을 겸하였다. 이어 노비 변정도감제조(노비변정도감제조)로 있다가 형조판서(형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의정부참찬(의정부참찬)·수문전대제학(수문전대제학)·판좌군도총제부사(판좌군도총제부사)를 거쳐 18년 무술(1418)에 예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으로 세자좌빈객(세자좌빈객)을 겸임하였다.

세종(세종)원년 기해(1419) 판중군도퐁제부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경연춘추관사(지경연춘추관사)로 재직중 변계량과 함께 고려사(고려사)를 개수(개수)하다가 중단되었다. 이듬해 문과고시관(문과고시관)으로 조상치(조상치)등 33인을 선발하였다.

3년 신축(1421)에 왕은 공의 년로(년로)함을 민망히 여겨 궤장(궤장)을 하사하므로 공께서 전(전)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듬해 의정부찬성(의정부찬성)·집현전대제학(집현전대제학)·지춘추관사(지춘추관사)로서 치사(치사)를 청함에 윤허(윤허)하지 않으시고 비답(비답)을 내려 아악(아악)과 주찬(주찬)을 하사하시고, 대언 권맹손(대언 권맹손)을 보내어 선온례(선온례)를 행하도록 하였다.

5년 계묘(1423)에 고려사범례(고려사범례)를 수정(수정)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기납(기납)된과 동시에 윤회(윤회)와 함께 고려사(고려사)를 개수(개수)하였다. 이듬해 의정부우의정(의정부우의정)에 제수(제수)되어 초구(초구)를 하사 받았다. 7년 을사(1425)에 한재(한재)로 인하여 사직소(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고 오리혀 비답을 내려 집현전부제학 권 도(집현전부제학 권 도)로 하여금 공의 사택(사택)에 사찬(사찬)을 전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또 치사9치사)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년 정미(1427)가을·우의정(우의정)으로 치사(치사)하니, 왕은 녹봉(녹봉)을 종신토록 급여(급여)하라고 명하였다.

12년 경술(1430)에 왕은 어주(어주)를 하사하고 14년 임자(1432)겨울에는 공과 방촌 황희(방촌 황희)에게 장피(장피)를 각각 하사하였다.

15년 계축 5월 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8세였다.

왕은 부음(부음)을 들으시고 백의(백의)를 갖춘후 백관(백관)을 거느리고 홍례문(홍례문)밖에 납시어 조상(조상)하시고, 금천교(금천교)에 이르러 치제(지제)에 친히 임하여 슬픔을 다하시고 문간공(문간공)의 시호를 내림과 아울러 청백리(청백리)에 록선(록선)하였다.

 

동년 7월 12일에 주상(주상)께서 사제문(사제문)을 내리셨다.

묘소는 양근 남촌 왕충리(양근 남촌 왕충리) 신좌(신좌)의 언덕에 모셧으며 청향당 윤 회 (청향당 윤 회)가 만시(만시)를 지어 공의 유덕(유덕)을 추모하였다.

공은 천성이 공검정직(공검정직)하고 경사(경사)를 널리 열람하였을뿐 아니라 무경(무경)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섭렵)하지 않음이 없었고 평생에 오직 서사(서사)를 스스로 즐기었다.

형조판서(형조판서)로 재직중 계주(계주)하기를『사람의 기품은 경박하고 강인함과 유약하고 비겁함이 같지 않기 때문에 혹은 진범(진범)이라도 능히 수초(수초)를 견디어 끝내 죄를 실토하지 않고, 혹은 무고(무고)를 입고도 고초를 참지못하여 끝내 죄를 면치 못하는 자가 있는데 형(형)을 관장하는 이는 오직 승복(승복)하는것만 좋아하여 인명(인명)을 중히 여기지않고 법외(법외)의 형벌을 행함에 그 죄상(죄상)의 경중(경중)은 분간되지 못하고 장하(장하)에 죽어가는 사례가 허다하오니 이는 성상(성상)의 호생지덕(호생지덕)을 어깁니다. 청컨대 내외로 형을 다스리는 자에게 명하사 율문(율문)에 의하여 고문(고문)을 행할것이요, 그 법외(법외)의 형벌은 일체 금지시켜야하옵니다. 항상 그 사색(사색)을 분별하고 그 증거를 징험하며 그 진위(진위)를 분명히 하여 무고한 수초(수초)를 행해서는 안될것입니다.』하였는데 왕께서 가납(가납)하시었다.

공께서 청빈(청빈)하여 홍인문(홍인문:동대문)밖에 누추한 집이 몇칸 있었는데 울타리도 없었다. 그러나 손님이 오면 탁주(탁주)한동이를 섬돌 위에 놔두고 한 노비(노비)로 하여금 한 종지씩 술을 따르도록 하여 각기 몇잔씩 마시고 헤어졌다.

재상(재상)의 귀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후진(후진)의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으니 제생(제생)들이 청강(청강)을 청하는자 많았는데 그 아무의 자제(자제)나 성명(성명)을 묻지 않고 반드시 순순히 가르쳤기 때문에 문하(문하)에 학도(학도)가 매우 많았었다.

매년 시향(시향) 하루 전에 제생들을 보내고 제사(제사)를 행한 후에 제생들을 불러 음복(음복)을 하였는데 조촐한 음식소반을 서로 돌려가며 안주를 들도록 하고 동이의 탁주를 먼저 한잔 마신다음 차례대로 잔을 돌리었다.

태종께서 공의 청빈함이 이와 같은 줄 알고 선공감(선공감)에 명하여 밤중에 그 집에 울타리를 막아주고 공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또 어찬을 그치지 않고 하사하였다.

공께서 청렴 검소함을 스스로 지켜 몇칸 모옥(茅屋)에 살면서도 마음은 항상 편안히 가졌다. 얼찌기 장마가 한달을 넘도록 계속되어 지붕에서 물이 줄줄 세었다. 공께서 손수 우산을 바치고 구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이 비를 피하겠는가』하니 부인께서 대답하기를『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반드시 대비함이 있을 겁니다』하자 공은 웃기만 하시었다.

공께서 지위가 정승에 이르렀지만 행장9행장)은 필부(필부)와 같았고, 혹 사람이 찾아와 배알(배알)코자 하면 겨울에도 짚신을 끌고 나가 맞아하였으며, 때때로 호미를 잡고 채전(채전)을 가꾸되 수고롭게 여기지 않았다.

일찍이 사국(사국)을 금륜사(금륜사)에 개설(개설)하고 어명9어명)으로 공께서 영수사관(영수사관)이 되었다.

절이 성내(성내_에 있었는데 혹은 연모(연모)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여마(여마)는 번거롭다 하시고 혹은 관동(관동)들을 데리고 시(시)를 읊으며 갔다 돌아오니 사람들이 그 아량(아량)에 감복하였다.

공께서는 총명함이 보통 사람에 넘어 평생에 배운 바를 종신토록 잊지 않았으며 매일 밤중에 그 글을 외우고 그 뜻을 생각하여 항상 사람을 도움으로 마음을 삼았다. 때문에 교량(교량)과 원우(원우)를 만들고자 하면 비록 승도(승도)들도 즉시 전백(전백)을 내놓고 갔으며, 사람들에게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며 비록 미물(미물)일지라도 그를 잡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항상 말하기를 『붕우(붕우)간에 재물을 통하면 의리(의리)가 깨진다. 그러니 간색(간색)을 삼감이 옳은 일이다.』하셨다.

일찍이 찬성(찬성)으로 재직중 사직소(사직소)를 올렸는데 왕은 윤허하지 않고 비답(비답)하시기를『경(경)의 학문은 정자(정자),주자(주자)에 미치고, 재주는 반고(반고),사마천(사마천)에 비길수 있다. 마음은 충직(충직)을 근본하고 행동은 안화(안화)를 위주하였다. 실로 조정(조정)의 규범(규범)이요, 유림(유림)의 종사(종사)로다』하시었다.

공께서 지으신 시문(시문)이 여지승람(여지승람)에 전하는데 다음과 같다 영일(영일)·정선(정선)·낭천(낭천) 고을 등의 제영(제영)과 영암(영암)의 형승(형승)과 밀양 영남루(밀양 영남루)의 시(시)등이 있다.

배위 광릉군부인 광주안씨(광릉군부인 광주안씨)는 판전농시사 기(판전농시사 기)의 따님으로 3남을 두고 일찍 돌아가셧으며 풍주군부인 이씨(풍주군부인 이씨)는 전서 송(전서 송)의 따님으로 1남을 두었다.

장자 맹문9맹문)은 문과 예조참판(예조참판)이요, 2자 중문(중문)은 호군(호군)이요, 3자 계문(계문)은 문과 형조판서(형조판서)로 안숙공 이요, 4자 이문(이문)은 천호(천호)이다.

중종조(중종조)에 정암 조광조(정암 조광조)선생이 이르기를 『근세에 이학(이학)으로 포은9포은)과 하정(하정)이 가장 바르다』하였다.

 

중종 15년 경진(1520)4월 6일 왕이 조강(조강)에 납시어 이르시기를 『국조(국조)에 청렴(청렴)으로 이름난 재상 류 관(류 관)은 가세가 심히 가난하여 사는 집이 풍우(풍우)를 가리지 못하였다. 만약 장마를 만나면 반드시 우산으로 가리면서도 스스로 편안히 여기고 말하기를 이같은 장마에 우산이 없는 이는 어찌 능히 지내겠느냐 하였다고 하니 이같은 분은 가히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하였다.

27년 임진(1532)4월 의정부(의정부)에서 청백리(청백리)자손을 록용(록용)할 것을 임금께 건의 하였는데 이때 공의 휘자(휘자)를 제일 먼저 들치었다.

현종(현종)11년 경술(1670)에 문화(문화)고을에 공을 향사(향사)하는 사우(사우)가 건립되고, 숙종(숙종) 4년 무오(1678)에 이 사우를 정계서원(정계서원)으로 사액(사액)하였다.

철종(철종) 13년 임술(1862)에 양근 왕충리(양근 왕충리)에 있는 공의 묘소 입구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당시 예조판서 신석우(예조판서 신석우)가 비명(비명)을 지었다.

임술(1982)에 후손 세거지인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또 세웠다.

갑자(1984)에 정부(정부)에서 서우시내 가로(가로)의 명칭을 제정하였는데 지금 동대문구 신설동(동대문구 신설동)사거리로부터 재기동(재기동)·마장동(마장동)을 거쳐 답십리동(답십리동)에 이르는 약 10리 구간의 대로를 하정로(하정로)로 명명하였으니 이는 공께서 이 부근에 살으셨던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여지승람, 해동명신록, 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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