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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희영(柳曦永)
 

류 희 영 柳  曦  永

 

<류희영 : 1854~1939 : 高宗朝 學者, 大丞公 30世 : 貞?公派>

 

자 인보(寅甫). 호 서파(西坡)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팽석(彭碩)의 13대손이요, 수신재 사신(守愼齋 士信)의 9대손이요, 흥성(興性)의 장자로 철종(哲宗) 5년 甲寅 8월 11일에 평산군세곡면도천리(平山郡細谷面道川里)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준수하여 보통사람과 다르더니, 능히 말을 하면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독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힘쓰니 어른들이 모두 칭찬하여 마지 않았으며 장성함에 성재 류중교(省齋 柳重敎)선생을 사사(師事)하여 문명(文名)이 서도(潟)에 떨치었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체 색양(志體 色養)에 지극하였고, 집상(執喪)에 애척(哀戚)함이 깊어 3년을 초종(初終)때와 같았으며 복제를 예에 쫒아 어김이 없었고 묘소가 10리 거리에 계셨는데 매일 성묘하여 비가오나 눈이 오나 페하지 않았다. 한편 아우들과 더불어 우애가 독실할 뿐 아니라. 자질(子姪)들을 가르침에 심히 엄하여 설날 외에는 반드시 독서(讀書)토록하고, 원근에서 모인 학생들을 그 재주에 따라 가르치되 은혜와 위엄을 병행하였으며, 벗과 사귐에 신의(信義)을 지키고, 고을에서는 향약(鄕約)을 설치, 서로 규제(規制)하니 고풍(古風)이 항상 넘쳤다.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뇌물(賂物)을 청하는 자 있거늘, 공이 말하기를 『과거는 임금을 섬기고자 함인데 어찌 비부(鄙夫)에게 청탁하겠는가?』하고 즉시 사양하고 돌아오는데, 경기도관찰사 정범조(京畿道觀察使 鄭範朝)가 공의 명망을 듣고 청하여 이르기를 『나를 종유(從遊)할 것 같으면 장차 영귀(榮貴)하리라』한대, 공께서 대답하기를 『뜻이 같지 않으니 감히 쫒지 못하겠다.』하고 돌아왔다.

고종(高宗) 32년 乙未(1895)에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된 변란(變亂)후로는 문을 닫고 스스로 자취를 감추어 사람을 접견하지 않았다. 한편 효행표창(孝行表彰)이란 명목으로 돈이 나왔는데 절대 물리쳤으며, 집이 비록 가난하였지만 위의(威儀)가 엄중함으로 사람들이 공경치 않음이 없었고 비록 관리라 할지라도 공을 뵈이면 문득 절하며 선생이라 일컫었다.

일찍이 성묘 헌관(聖廟 獻官)으로 입재(入齋)하였는데, 주육(酒肉)을 권하거늘 즉시 철거토록 명하고, 늙어 병환이 위중함에도 오히려 육류(肉類)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나의 소행(素行)을 변코자 아니한다.』하고 드디어 옷을 바꿔입고 己卯 9월 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6세였다.

공께서 돌아가심에 문생(門生)으로 가마자(加麻者)가 많았고 회장(會葬) 한분이 산야(山野)를 메웠다고 한다.

배위 수원백씨(水原白氏)는 기진(箕鎭)의 따님으로 1녀를 두고 일직 돌아가시고 평산신씨(平山申氏)는 동수(東秀)의 따님으로 2남 3녀를 두었다.

묘소는 평산군세곡면도천리 화전곡 신좌(平山郡細谷面道川里 花田谷 辛坐)에 삼위 합분(合墳)으로 모셨으며, 치암 우상호(恥庵 寓相浩)가 행장을 짓고, 승지(承旨) 오정 심주택(梧亭 沈周澤)이 묘지를 짓고, 이당 최종건(以堂 崔鐘健)이 묘갈명을 지었다.

장남 근하(根河)는 총명함이 그지 없고 기개가 호걸스러웠으며 문필(文筆)이 뛰어나 당시의 망사(望士)로 일컫었고, 2남은 근윤(根潤)이며, 사위는 단양우종하(丹陽寓鐘夏) . 여흥민준식(驪興閔駿植) . 전주이은석(全州李殷奭) . 인천채원균(仁川蔡源均)이다.

공의 유고(遺稿)가 戊辰(1988) 여름에 간행되었는데 순흥안승춘(順興安承春)이 서(序)를 지었다.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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