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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정씨(鄭氏)
 

정 씨 鄭  氏

 

<정씨 : 1830~1897 : 高宗朝 烈行. 大丞公 30世 : 左相公派>

정씨(鄭氏)는 동래인(東萊人)으로 시채(始采)의 따님인데, 출가하여 서산 자미(西山 自湄)의 14대손이요, 농포 희달(弄圃 希達)의 8대손이요, 흥잠(興潛)의 아들 기영(基永)의 배위가 되었다.

정씨(鄭氏)는 순조(純祖) 30년 庚寅생인데 어려서부터 총명 민첩하여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능히 그 도리를 다하더니 류문(柳門)에 출가한후 역시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므로 모두 칭송하였다.

고종(高宗) 원년 甲子(1864) 여름에 부군께서 갑자기 병으로 누워 의약(醫藥)이 효험이 없었다. 부인께서 하늘에 자신을 대신 해주도록 간절히 빌고, 드디어 다리의 살을 베고 손가락을 찢어 온갖 치료를 다하였으나 끝내 돌아가시었다. 임종(臨終)에 부군께서 부인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수명이 한정이 있어 내가 이제 죽게 되었소. 일찍 남편을 잃게 되었으나 다만 어린 두 아들이 있으니 다행히 잘 길러 가문을 계승하시요.』하고 눈을 감으니 때에 부군은 33세였고 부인께서는 35세였다.

부인께서 즉시 따라 죽으려 하다가 유언(遺言)을 돌이켜 생각하고 슬픔을 억제한 후 송종(送終)의 절차를 몸소 간섭하여 3년의 복제를 마쳤다. 한편 2자 인경(寅敎)과 인복(寅福)을 잘 가르쳐 가업(家業)을 이어 전하니 향당(鄕黨)에서 칭송하여 마지 않고 유림(儒林)에서 천장(鳶狀)이 있었다.

고종(高宗) 34년 丁酉 5월 1일, 향년 68세로 졸하니 광산군본량면동호리 용호촌 후록(光山郡本良面東湖里 龍湖村 後麓), 부군 묘소의 동록 간좌(同麓 艮坐)에 모시었다.

장자 인경(寅敬)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더니 부친의 병환이 위독할때 모친께서 손가락을 깨어 부친의 입에 흘려 드림을 보고 공이 즉시 손가락을 쇠망치로 깨어 치료에 정성을 다하였다. 14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로 계신 모친을 지성으로 섬기더니 또 모친께서 10여년을 병석에 눕자 시탕(侍湯)을 한결 지성스럽게 하고 마침내 돌아가심에 여묘(廳墓)로서 복제(服制)를 마치고, 묘지를 구하여 양친(兩親)을 안장하였다. 공께서 돌아가신 후 향리의 유림(儒林)들이 그 효행을 칭송하여 사적이 군지(郡誌)에 올랐으며, 壬戌(1982) 2월, 본량면동림리 구룡촌 입구(本良面東林里 九龍村 入口)에 공의 효행비(孝行碑)가 세워졌다.

차자 인복(寅福)은 풍채가 걸출하고 성품이 단아한 반면, 효성이 지극하더니 11세에 부친을 여의고, 모친 슬하에 장성하였다. 장성함에 형과 함께 스승을 쫓아 학문을 익히는 한편, 우애가 독실하여 있고 없는 것을 서로 분별하지 않고 함께 쓰며 모친을 지성으로 섬기었다. 혹 환후(患候)가 계시면 근심을 다하여 백방으로 간호하고, 드디어 돌아가심에 슬픔을 다함은 물론 예제(禮制)를 쫒아 자식된 직분을 다하니 인근에서 『一門雙孝』라 칭송하였다. 己未(1979) 가을에 광산군본량면동호리 구룡촌 구룡봉 중록 손좌(光山郡本良面東湖里 九龍村 九龍峰 中麓 巽坐)의 공의 묘소에 석의(石儀)를 갖추었다.

자손이 광산군본량면동호리 신촌(光山郡本良面東湖里 莘村)에 세거하고 있다.

※ 追先錄, 孝行碑, 墓謁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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