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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탐진 최씨(耽津崔氏)
 

탐진최씨 耽 津 崔 氏

 

<류응섭배위 탐진최씨 1897.1.26~1971.1.19 崑山君派 大丞公 33世>

 

통제사공 여강(統制使公 汝糧)의 8대 종부(宗婦)요. 승포공 응섭(松圃公 應燮)의 배위이다. 탐진최씨 정림(耽津崔氏 廷林)의 따님으로 순천(順天)에서 태어나 1911년 15세에 남원 송동면 양평촌(南原 松洞面 楊坪村) 류문(柳門)으로 입가하였다.

일찌기 가법이 엄정한 집안에서 태어나 능히 사친봉군(事親奉君)의 법도를 익히고 천자(天姿)가 명민조숙(明敏宨淑)하므로 인향(隣鄕)이 규문의 덕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통제사공(統制使公) 7대종손 태량(泰煷)이 무사(無嗣)하자 부군(夫君)이 종의(宗議)에 의하여 입양하게 됨에 따라 종가인 구례산동탑정리(求禮山東塔挺里)로 이거하니 그 곳은 지리산하 궁항(智異山下 窮巷). 당시 부군은 도목수로 외유가 잦았으나 독수공방으로 유아를 기르며 구고(舅姑)를 효성으로 섬기고 친족들을 화목으로 대하니 일문(一門)이 담락(湛樂)하였다.

밤이면 맹호가 출림(出林)하는 가운데에서도 후원에 나아가 부굴의 안신(安身)을 지성으로 배두축천(拜斗祝天)하고 부군이 십에 돌아 오면 정성을 다하여 공경으로 대함이 빈객(賓容)과 같았다.

1913년 외우(外憂)를 당하여 내외가 체제를 쫓아 상장을 마치고 1915년 고향 남원으로 환향(還鄕)하였다가 3년 후 도시로 진출하여 후사의 교육에 힘쓰고자 전주교동 향교 뒤로 이거 2자 재하(在河) 3자 기하(基河)를 낳고 1931년까지 정주(定住)하면서 장자 득하(得河)를 금재 최병심(鈙齋 崔秉心) 문하에 취학시키고 강마진공(講磨眞工)케 하였다.

그 후 인후동 가자미(麟后洞 加玆味)로 이거하여 농사를 경영하면서 안주케 되었으나 때에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으로 장자를 남양군도(南洋群 島)에 보낼 후로도 자식의 생환(生還)을 위해서 고덕산 산제당(高德山 山祭垈)에서 혹은 엄동한설(嚴冬寒雪)도 피하지 않고 매일 새벽 인시(寅時)에 우물에서 목욕재개하고 배두축천한 바 마침내 아들이 광복 후 촌중에서 유일하게 생환하니 이는 그의 자친의 덕이라고 칭송하였다.

그후에도 치경도복(致敬禱福)하는 정성이 익독(益篤)하여 4녀 사례(士禮)가 깊은 우물에 빠졌어도 구명의 기적이 있었고, 그밖에도 재화를 모면한 일이 많았으니 그 정성이 하늘을 감동케 함이라 하였다.

만년에는 여생을 천도교(天道敎)에 귀의(歸依)하여 스스로 송주(頌呪)를 즐기고 일문(一門)을 풍화(風化)하니 그 지성독행(至炤行)은 모두 거론키 어렵다.

한편 부군 송포공 응섭은 사인(士人)으로 향인이 감복하고 종손으로서 가승보(家乘譜)를 편간하여 근본을 소중히 하는 의리를 밝혔다.

평소 근검절조하여 가산을 흥기(興起)시키고 학문의 대요(大要)가 대학(大學)에 있다 하고 항시 인시(寅時)에 일어나 대학을 암송함에 집안이 이에서 정제(整齋)되었다.

공은 1949년 5월 1일에 별세하시니 그때 늑막염이 악화되자 가산탕진을 염려하여 스스로 자결(自決)하시고, 배최씨(配崔氏)는 노환으로 75세에 별세하시니 묘는 인후동 358번지 자택 후등에 각각 모셨다.

슬하에 3남 4녀를 두니 아들은 득하(得河) ․ 재하(在河) ․ 기하(基河)요, 딸은 순흥 안동보(順興 安東甫) ․ 경주 최만수(慶州 崔萬壽) ․ 김해 김갑생(金海 金甲生) ․ 완산 전춘식(完出 全春植)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근성(根盛) ․ 근영(根永) ․ 근범(根範)은 장자 득하의 소생이요, 근필(根弼) ․ 근석(根奭)은 차자 재하의 소생이요, 근상(根常) ․ 근엽(根葉)은 3자 기하의 소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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