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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세장(柳 世 章 )
 

류 세 장 柳  世  章

 

<류세장 : 1651~1704 : 肅宗朝 武臣. 大丞公 24世 : 左相公派>

 

좌 회경(晦卿). 호 공북정(拱北亭)

문원군 사(文原君 泂)의 9대손이요, 무과 희(武科 禧)의 장자로 효종(孝宗) 2년 幸卯 3월 15일에 진주 송곡(晋州 松谷)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영특하기 그지 없더니 8세에 스승을 쫒아 학문을 익혔는데 경의(經義)와 전고(典故)를 쉽게 깨달아 입으로 외고 마음에 새김이 많았다. 약관(弱讀)에 이르러 말하기를 『사람이천지간에 태어나 나라를 위하여 죽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다. 』하고 무예 (武藝)를 익히더니 숙종(肅宗) 2년 丙辰(1676)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에 앞서 고시관(考試官)이 공의 훌륭한 용모를 보고 묻기를『쌀 361석을 몇 수레에 몇 석씩 실으면 능히 고르게 실을 수 있겠는가?』 하거늘 공이 즉시 대당하여 아뢰기를 『수레 19대에 쌀 19석씩 실으면 됩니다. 』하였다. 당시 상신(相臣) 약천 남구만(藥泉 南丸萬)이 그 자리에 있다가 장하게 여기고 묻기를 『어떻게 계산을 그리 쉽게 하는가?』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바둑판의 이치로 미루어 보면 가로로 19집이요, 세로로 19집이라 이로 미루어 알았읍니다. 』하니 만좌(滿坐)가 모두 칭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공께서 자신을 반성하고 생각하기를 『옛적에 장횡거(張橫渠)가 어려서 호협하였으나 늦게 학문을 익혀 마침내 대인군자(大人君子)가 되었으니 돌이켜보건대 나의 재주와 지혜가 얕아 비록 고인(古人)에 미치지 못하나 어찌 한갖 무부(武夫)로 마칠것인가 ? 』하고 드디어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닦아 언어와 행동이 고인의 법도에 어김이 없었으며, 출사(出仕)하여 서울에 있을때 권귀(權貴)의 문정에는 한번도 발을 들이 지 않았다.

선전관(宣傅官)으로 재직중 15년 己巳(1689)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께서 폐출되어 사저(私邸)에  계실때 어공(御供)이 부족함을 듣고 공께서 밤낮으로 몰래 울면서 저자에 나가 쌀 몇 되를 구하여 몸소 방아를 찧어 정밀히 가린 쌀 세 되를 새 보자기에 쌓아 다만 신근봉(臣證封) 3자를 써서 매일 새벽에 몰래 답장 안에 계속 들여 넣어주었다. 한편 아우에게 서신을 부쳐 이르기를 『돌아가고자 하나 눈으로 보고 차마 돌아가지 못하겠다. 국모(國母)의 페출이 비록 무슨 연유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고훈(古訓)에 이르기를 천하에 부모가 다 있는데 그 신자(臣子)된 도리로 망극한 마음을 어찌 이기겠는가?』하였다.

그 후 왕후께서 환궁(還宮)하던 날 그 어미(脚米)를 제공한 사람을 물었는데 공이 당시 시종(侍從)의 열(列)에 있었으나 절대 말하지 않고, 오히려 알까 두려워 하였다. 당시 왕후의 사저 이웃에서 살던 김태석 (金太碩)이 이 사실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전함으로서 세상에서 공이 이런 일을 행했음을 알게 되었다.

17년 辛未(1691)에 주상(主上)께서 정릉(貞陵)에 행차하실 때 공이 후사대초관(後訓隊哨官)으로 호종(扈從)하고 환궁시에 숭례문(崇禮門)에 올라 시를 지어 이르기를,

『칼을 잡은 처음의 뜻은 큰 공을 세우려 하였는데 어찌 화 한 글자로서 나 홀로 누대에 올랐는가』

<仗劍初來意豐功勒約頭 如何和一字使我獨登裡>

한편 우인 허익(許益)으로 더불어 위태하고 어려운 시사(時事)를 의논하며 7일을 단식(斷食) 한적이 있었으나 신기(神氣)가 평상과 같았고, 이렇듯 나라를 걱정하는 지성이 이를데 없었다.

홍덕현감(興德縣監)으로 부임하여 정사(政事)를 공평하고 송사(訟事)를 정확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이 모두 태평히 지내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옴에 행장(行裝)이 담박하여 식량이 없었음으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적의 청백리(淸白吏)도 이보다 더할 수 없으리라.』하였다.

만년에 거처의 북쪽에 정자를 지어 공북정(拱北亭)이라 이름하고 말하기를 『내가 비록 한가히 지내고 있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대궐을 그리는 마음은 마치 여러 별들이 북극성을 향함과 같다. 』하였다.

공께서 생정 재종제(生庭 再從弟) 생원 남파 세주(生員 南坡 世冑)로 더불어 지기(志氣)가 서로 맞아 서울에 올라가는 때면, 반드시 포천(抱川)으로 그를 찾아 유숙하였다. 공께서 임종(臨終)에 이르러 유언하기를 『아우 남파의 만사(挽辭)가 없으면 나의 장례를 치르지 말라』하고 돌아가시니 때는 숙종(肅宗) 30년 甲申 5월 15일로 향년 54세였다.

아들들이 공의 유언을 쫒아 천리길의 포천을 찾아가서 남파에게 만사를 받아 후에 장례를 모셨으니, 지금 진주 운천리 안산 손좌(晋州 雲川里 案山 巽坐)이다.

배위 재령이씨(載寧李氏)는 중정(重禎)의 따님으로 묘소는 진주 두주동 임좌(晋州 斗柱洞 壬坐)에 모셔 있다.

아들은 담(潭) ․ 한(漢) ․ 연(淵) ․ 락(洛)이요, 사위는 고창오상연(高敞吳尙演) ․ 나주박경량(羅州朴景亮)이다.

순조(純祖) 3년 癸亥(1803) 6월에 예조(禮曹)에서 본도 암행어사(暗行柳史)의 계주(啓奏)에 의하여 포상을 청하였는데 이때 인형왕후 손위(遜位)시에 날마다 정미(精米)를 갖추어 봉함(封絨)하여 들여 넣어준 공의 사행이 논의되어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의 증직이 내렸다.

수년전에 공의 거처 하시던 곳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공의 사적이 진주읍지(晋州邑誌)에 실려 있다.

후손은 진양군금곡면송곡리 ․ 홍정리 ․ 가봉리 ․ 산청군단성면창촌리 ․ 하통군옥종면병천리 ․ 고성군상리면동산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 朝鮮王朝寶錄, 晋州邑誌, 拱北亭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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