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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환규(柳煥奎)
 

류 환 규 柳  煥  奎

 

<류환규 : 1775~1800 : 正祖朝 孝子 大丞公 28世 : 夏亭公派>

 

자 경문(景文). 호 산남재(山南齋).

부제학 희저(副提學 希渚)의 11대손이요, 병사 한명(兵使 漢明)의 5대손이요, 원영(元榮)의 장자로 영조(英祖) 51년 乙未 12월 15일에 장성 기동(長城 基洞)에서 태어났다.

겨우 5세에 능히 문자를 알아 줄줄 읽고, 행동이 한결 단정하며 10세에 칠서(七書)를 익숙하게 읽어 조예(造詣)가 깊으므로 장성신동(長城神童)이란 이름이 고을 안에 들리었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어려서부터 능히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알았고, 어버이께서 만약 질환(疾患)이 있으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시탕(侍湯)의 절차를 한결 장성한 사람과 같이 행하였다. 그리고 혹 밖에 나가 어육(魚肉)의 반찬을 보면 반드시 싸가지고 돌아와 부모에게 드려 잡수도록 하였다.

불행히 정조(正祖) 24년 庚申 6월 22일에 겨우 26세로 졸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기었다.

배위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창국(昌國)의 따님으로 효우(孝友)의 행실이 미혼때부터 드러났는데, 류문(柳門)에 출가한 후로 부도(婦道)를 능히 다하더니 겨우 1년을 지나 그 부군이 돌아가심에 이미 자진(自盡)할 것을 결심하였다가 다시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이미 한낮 혈속(血屬)이 없으니 상제(喪制)를 주장할 사람이 없고, 중시하(重侍下)의 처지로 봉양할 사람이 없으니 어찌 나의 마음을 쫓겠는가?』하고 드디어 일어나 습렴(襲殮)과 제전(祭奠)을 친히 주선하였으며 그로부터 구고(舅姑)의 앞에 있어 이색 화성(怡色 和聲)으로 근심하는 낮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 종상(終喪)을 마친 후 문득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말하기를 『이제 궤연(几筵)을 이미 거두었고 부군(夫君)의 아우가 점점 자라니 나같은 미망인(末亡人)이 살아서 세상에 소용이 없다. 죽어서 지하에 가서 따르리라』하고 갑자기 자결하시니 때는 순조(純祖) 2년 壬戌(1802) 12월 1일이었다.

듣는 사람마다 다 말하기를 『아름답다. 윤열부여 ! 마땅히 류효자의 배필이라 하겠다. 』하였다.

묘소는 장성 기동(長城 基洞) 조고 묘소 좌변 병좌(祖考 墓所 左邊 丙坐)에 부군과 합폄하였다.

이상 사행(事行)이 장성지(長城誌)에 실려 있다.

공의 사종제(四從弟) 의렴(宜濂)의 2자 병두(秉斗)를 맞아 계자를 삼아 그 자손이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扶安郡 保安面 柳川里)로 이거하여 지금 그 곳에 살고 있다.

※ 丙寅譜 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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