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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세렬(柳世烈)
 

류 세 열 柳 世 烈

 

<류세열 :字 : 拜言, 號 : 錦 史 : 1868~1937 : 左相公派 : 大丞公 32世>

 

서산 자미(西山 自湄)의 후예로 홍주목사 순명(洪州牧使 順命)의 12대손이요, 명재 기영(明齋 基永)의 손이요, 농은 인식(農隱 寅植)의 장자이며, 진주 정 전(晋州 鄭 錪)의 외손으로 고종(高宗) 5년 戊辰 8월 8일에 여주군 점동면 뇌곡리(驪州郡 占東面 雷谷里)에서 출생 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기 그지 없더니 7세에 취학하여 하루에 수백언(數百言)을 외우고, 일찍 통감(通鑑)을 읽으면서 항우(項羽)의 학서검불성청학만인적(學書劍不成請學萬人敵)의 글귀에 이르러 탄식하며 『초패왕(禁覇王)의 담략을 가히 알겠다.』하니 장로(長老)들이 기이하게 여기었다. 그 후로 경사(經史)를 널리 읽어 문사(文詞)가 통달하고 성품(性稟)이 강직하여 모든 행사가 오직 충효(忠孝)에 근본하였다.

고종 42년(1905)에 일본(日本)과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교철(李敎澈) ․ 이덕지(李德址) ․ 민성칠(閔成七)등 여러 의사(義士)로 더불어 죽음을 맹세하고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여주(驪州) ․ 이천(利川) 양군의 인사들이 공을 선봉장(先錄將)으로 추대하였다. 이로부터 왜군(倭軍)과 수차 싸워 승리를 거두고 진군도중 장호원(長湖院)에 이르러 적군에게 포위되어 전군이 거의 죽기에 이르렀는데 마침 안개가 자욱히 끼어 지척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공은 이 틈을 타서 탈출하여 의병들을 모아놓고『시운(時運)이 불리하여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으니 일단 물러나

후기를 도모함이 옳겠다. 』하고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왜적에게 체포되어 3년을 옥고(獄苦)를 치렀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음으로 적들이 도리어 감화하고 방면해 주었다.

1910년 합방(合邦)이 되자, 공은 의분(義憤)을 이기지 못하고 양주 도봉산(楊洲 道峰山) 석굴(石窟) 속에 은거하다가 수년 후 파주 장계(坡州 長溪)로 이거하여 선영(先塋)의 수효에 진력하는 한편 매년 향사(享祀)를 성실히 행하였다.

향년 70세로 丁丑 10월 4일에 별세 하시니, 석촌 윤용구(石材 尹用求) ․ 동강 김영한(東江 金甯漢) 및 경향의 사우(士友)들이 뢰사(誄辭)를 지어 애도 하였다.

묘소는 여주군 가남면 대신리(驪州郡 加商面 大新里) 선영 계좌(先塋 癸坐)에 모셔졌다.

족제 관암 상렬(寬庵 庠烈)이 공의 행장을 지었다.

배위가 네분인데 여흥민치서(驪興閔致端)의 따님은 무육 조졸하고, 광산김영호(光山金永浩)의 따님도 역시 무육 조졸하고, 남평 문열수(南平 文烈修)의 따님에게서 재하(凉夏)를 남았으며, 일직손씨(一直孫氏)에게서 재호(在鎬)를 낳아 공의 아우 태열(泰烈)에게 출계(出系) 시켰다.

재하(在夏)의 장남은 종현(宗鉉)인데 정훈(庭訓)을 독실히 익혀 견식(見識)이 유여하고, 차남은 주현(周鉉)이니 중앙대학교(中央大學校) 교수를 역임하고, 대원군(大院君) 등 장단(長短) 50여편을 저술한 근세에 드문 문학가(文學家)였다.

자손은 현재 서울 상계동(上溪洞) ․ 홍은동(弘恩洞) 등지에 살고있다.

※ 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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