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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양삼(柳 陽 三 )
 

류 양 삼 柳  陽  三

 

<류양삼 : 1720~1807 : 正祖朝 行誼 大丞公 25世 : 忠景公派>

 

자 배경(培景)

한성판윤 경생(漢城判尹 京生)의 4자 사정 집(司正 輯)의 9대손이요 원화(元和)의 2자요 죽산안사민(竹山 安思敏)의 외손으로 숙종(肅宗) 46년 庚子에 남원 초리(南原 草里)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났었다.

일찍이 이웃집에서 놀다가 후원(後園)의 앵도(櫻挑)가 붉게 익어 사랑스러움으로 나무 아래서 방황하고 있으니 주옹(主翁)이 앵도 몇 묶음을 따 주었다. 공이 절하고 받아 주머니 속에 넣으니 주옹(主翁)이 묻기를 『이것을 간직하여 뒤에 먹으려고 그러느냐?』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어버이께 드리려고 합니다』함으로 주옹이 기특히 여기고 더 따서 주었다.

8세에 서당(書堂)에서 글을 배우는데 스승이 눈을 읊어보라 하시거늘 공께서 바로 응답하기를 『어진 하늘이 은싸라기를 흩어서 들 사람들을 고르게 구원하도다.』<仁天?銀? 均救在野人>이라 하니 온 좌석에서 모두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13세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상제를 행함이 노성(老成)한 사람과 다름이 없었고 편모(偏母)를 봉양하되 맛있는 음식을 그치지 않았다. 25세에 모친 상을 당하여 궤전(饋奠)의 절차를 한결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쫒아 행하고 백씨를 엄부(嚴父)와 같이 섬기고 우애가 더욱 돈독하여 서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만년에 이르러 가세(家勢)가 자못 넉넉해지자 족척(族戚)으로 궁핍한 이를 두루 도와주고 일찍이 집 사람들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사람의 선(善)과 악(惡)은 모두 작은 것을 쌓아 크게 이루데 말미암는다. 소선(小善)이라고 소홀히 여겨 행하지 않고, 소악(小惡)이라고 하찮게 여겨 버리지 않는다면 몸이 죽고 집이 망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심히 많다. 항상 이를 생각하여 마땅히 적은 일이라도 시작함을 삼가 그 옳음을 가리고, 동작에 마침을 중요히 여겨 그 마땅함을 행하면 재앙이 스스로 멀어질 것이요 덕이 스스로 진취하리라.』하시었다.

순조(純祖)원년 辛酉(1801)에 우로전(優老典)으로 통정(通政)에 가자(加資)되고 7년 丁卯에 돌아가시니 향년 88세 였다.

묘소는 남원군 수지면 초리(南原郡 水旨面 草里)마을 위 을좌원(乙坐原)에 장례를 모시었다.

배위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수(燧)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을 심히 갖추었더니 공보다 8년 먼저 돌아가시어 수지면 고삭동 선영 계좌(水旨面 古朔洞 先瑩 癸坐)에 모셔졌다.

3남 1녀를 두어 장자 문익(文翼)은 백두 동삼(伯父 東三) 후로 출계하고, 2자는 문형(文亨)이요, 3자는 문식(文植)인데 모두 행의(行誼)가 있었고, 따님은 경주 김상언(慶州 金相彦)에게 출가하였다.

심석 송병순(心石 宋秉珣)이 공의 묘표를 지었다.

후손은 남원군 수지면 초리(南原郡 水旨面 草里)에 세거하고 있다.

※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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