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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수원(柳壽垣)

류수원(柳壽垣)

1694년(숙종 20)∼1755년(영조 31).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남로(南老), 호는 농암(聾菴).

대사간 상재(尙載)의 손자로 봉정(鳳庭)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징(金徵)의 딸이다.

1. 가계와 관직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서울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일가 친족의 집에서 자랐다.

그의 스승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714년(숙종 40) 21세 때 진사가 되고, 25세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약관의 나이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2. 노론세력의 견제

그러나 벼슬길은 매우 불우하게 이어져갔다. 벼슬길에 들어선 지 5년째 되던 1723년(경종 3) 2월에 정언(正言)으로서 조정의 혁신을 요망하는 글을 경종에게 올렸다가, 원로대신을 함부로 비난하였다는 조정 중신들의 성토를 받아 파직되는 불행을 맞았다.

하지만, 당시는 그의 집안이 집권당인 소론(少論)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에 그해 7월에 낭천현감(狼川縣監)으로나마 다시 임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1년여 만인 1724년에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老論)이 득세하기 시작하자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심한 정치적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이른바 임인안옥(壬寅按獄: 1722년에 노론의 네 대신을 처형한 정치재판)의 주모자로 종숙부 봉휘(鳳輝)가 노론에 의하여 처벌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30대시절 10여년간을 줄곧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옮겨다니게 되었고, 그 중에서 심한 병을 얻어 귀머거리가 되는 신체적 불행까지 맞았다. 스스로 ‘농암’ 또는 ‘농객(聾客)’이라는 호를 쓰게 된 것도 이무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우서》저술

그는 불우한 처지에서 치미는 울분을 연구와 저술로 달랬다. 《우서 迂書》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들이 잘살게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고 개선해야 할 것인지를 강구하고 기술한 것이다.

이 위국경륜(爲國經綸)의 저술은 곧 관계 인사들의 관심을 모아 영조에게까지 소개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는 1737년(영조 13)에 다시 조정으로 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노론의 규제는 풀리지 않아 정언에 다시금 임명되는 데 그쳤으며, 뒤이어 장령을 거쳐 사복시정으로 승진되기는 하였지만 끝내 벼슬을 버리고 서소문(西小門) 밖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그는 1741년에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경연(經筵)에 들면서 부호군(副護軍)에 다시 임명되었다.

그는 〈관제서승도설 官制序陞圖說〉을 지어 바치면서 영조와 붓으로 토론하는 진기한 경연을 벌였고, 그 결과 그해 3월에 홍문관 관원에 대한 회천법(回薦法)을 폐지하게 하였다.

4. 반역죄로 피체

그뒤 영조의 특명으로 이덕수(李德壽)와 함께 《속오례의》 편찬에 종사하다가 1744년에 다시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였다. 이로부터 10년간 초야에서 지내던 그는 1755년 5월에 반역을 모의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해 2월에 전라도 나주에서 있었던 괘서(掛書: 반역을 선동하는 익명의 벽보)사건과, 이 사건의 주모자들을 처형한 뒤 특별히 베푼 과거시험에서 나타난 변서(變書: 변란·혁명을 예고·주장한 글)사건으로 인하여 소론에 대한 숙청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는 몇 차례의 심문 끝에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사형되고, 그 가족은 모두 노비로 수용되었다. 오늘날 그의 행장(行狀)·연보 같은 전기적 자료가 하나도 전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5. 학문과 경륜

그는 당쟁에 희생되어 불우하게 일생을 보냈지만, 그의 학문과 경륜만은 당시에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그의 학문은 당대의 석학 이덕수에 버금갈 정도였고, 그의 경륜은 《우서》를 읽고 난 영조가 “우리나라의 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옛 학자의 말을 따르고 모으면서 기교만 구하는데, 이 사람은 모두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생각을 기술하였으니 참으로 귀중하다.”고 찬탄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나 그가 대역부도의 죄로 세상을 떠나고, 또 노론의 집권이 한말에 이르도록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의 글과 사상은 널리 퍼지지 못하였고, 그의 이름 역시 크게 알려지지 못하였다.

그의 문명(文名)과 학문·사상이 다시금 햇빛을 보게 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저자를 잃어오던 《우서》가 그의 저술임이 밝혀지면서 그의 학문·사상에 대한 역사적 조명이 전개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는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의 선구적 인물로 자리하게 되었고, 또 상공업 중심의 부국안민론(富國安民論)을 주창한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에 대한 이같은 이해나 평가가 그의 개혁안 가운데의 특출한 일면, 즉 상공업정책안이나 화폐정책안 등에만 치우쳐 살펴본 데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앞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이해가 요망된다.

[참고문헌]

柳壽垣의 迂書(韓榮國, 創作과 批評 11, 1968)

朝鮮後期商業의 問題點―迂書의 商業政策分析―(姜萬吉, 韓國史硏究 6, 1971)

朝鮮後期貨幣流通構造의 改善論의 一面―柳壽垣의 現實的 貨幣論을 중심으로―(元裕漢, 歷史學報 56, 1972)

柳壽垣의 身分改革思想(韓永愚, 韓國史硏究 8, 1972)

국역 우서해제(한영국, 민족문화추진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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