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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희영(柳喜永)

류희영 柳 熙 永

<류희영, 字 : 春國, 號 : 酸齋 : 1868.10.10~1933.4.2. : 儒學者, 檢漢城公派 : 大丞公 30世>

창평현령 효중(昌平縣令 孝中)의 후예로 선산부사 문옥(善山府使 文沃)의 13대손이요, 정순(鼎淳)의 손이요, 흥창(興昌)의 자로 완주 구이면 구암리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연안 이씨용묵(延安 李氏 龍黙)의 따님이다. 후에 흥원(興源)의 자로 출계 하였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수아(秀雅)하고 총명(聰明)이 뛰어나 일찍이 이음 학당에 나아가 수업하니 학문에만 열중한 나머지 섣달그믐이 되어도 때를 알지 못하고 글만 읽다가 주인이 고한 뒤에야 비로소 깨닫고 집에 돌아왔다.

매년 춘추로 장소를 정하여 백일장를 실시, 서로 문예를 비교한데 모든 사람이 떠들썩하게 글뜻을 주고 받아도 공은 홀로 묵묵히 생각하다가 글을 써서 올려 장원을 차지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래며 가히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한일합방후로 날로 국사가 이즈러짐을 보고 원통함을 호소할 길 없어 산수간을 방황하면선 이소경(離騷經)과 어부사(漁夫辭)를 송독하며 말하기를 『내 평생 꿈에 초(禁)나라 굴삼려(屈三閭)를 세번 뵈였다』하니 당시의 나라 형편이 굴삼려가 처한 시기와 같아서 우국의 마음이 실로 굴삼려와 같은 심정이었다. 굴삼려(屈三閭)는 초(禁)나라 임금에게 국사(國事)의 잘못을 충간(忠諫)하여도 들어 주지 않자 스스로 몸을 강물에 던져 자결한 사람이다.

1954년 김제 공덕면 황산리 죽리로 이거하니 원근에서 책을 끼고와 수학하는 자가 많았다.

평생동안 지은 시문(時文)이 심히 많았으나 후세에 전함을 원치 않고 모두 버리니 공명을 바라지 않을 행위가 가히 군자의 모범이 아닐 수 없다.

배위는 탐진안씨 이환(耽津安氏 以煥)의 따님으로 공보다 먼저 별세하여 황산리 와룡강(黃山里 臥龍崗) 사좌(巳坐)에 안장하고, 공은 향년 66세로 별세하니 동강 경좌원(同崗 庚坐原)에 안장하였다.

아들은 인태(寅泰)와 인덕(寅德)이요, 손자는 승렬(承烈), 홍렬(弘烈), 종렬(鍾烈), 풍렬(豐烈), 인렬(仁烈), 경렬(瓊烈). 규렬(奎烈), 광렬(光烈)이다.

성재유고(酪齋遺槁)가 있으니 이는 손사 승렬(承烈)이 유한(遺恨)이 되어 교류가(交遊家)에서 두루 구하여 약간의 유고(遺槁)를 수집, 간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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