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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광우(柳 匡 宇 )
 

류 광 우 柳  匡  宇

 

<류광우 : 1738~1823 : 純祖朝 蔭仕 大丞公 26世 : 忠景公派>

 

자 여앙(汝仰). 호 만은 (晩隱).

종부시소윤 한생(宗簿寺少尹 漢生)의 11대손이요. 율봉도찰방 형장(栗峰道察訪 亨長)의 9대손이요. 사재감주부 수정(司宰監主薄 守正)의 6대손이요, 협(浹)의 장자로 영조(英祖) 14년 戊午 10월28일 천안 목천 (天安 木川)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어질고 두터워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고 또한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뛰어나 종당(宗黨)은 물론 향리(鄕里)에서 칭탄하여 마지 않았다.

위선심(爲先心)이 독실하여 선조(先祖) 충경공(忠景公)의 묘소 실전(失傅)을 항상 애통히 여기더니 나이 50이 넘어 충경공(忠景公)의 묘소가 계시는 양주 시우치(湯州 時雨峙)로 이거, 그곳에서 서당(書堂)을 설치하고 학생(學生)들을 가르치는 한편 인근에 사는 초동 목수(樵童 牧竪)들의 말을 염탐하여 탐색하기 수년만에 드디어 충경공(忠景公)의 묘소를 찾았다.

정조(正祖) 21년 丁巳(1797) 년에 족인(族人) 병사(兵使) 문식(文植)과 함께 묘소를 개축하고 관청에 산송(山訟)을 제기하여 국내의 투장(倫葬)을 파내고, 사패의 위토와 산지 수천평을 추심 환수(還收)하였다. 그리고 각처 종문(宗門)에 알려 재곡(財穀)을 수합, 재실(齋室)을 건립하였는데 이때 고향에서 장자 세원(世元)을 데려다가 함께 제반 역사(役事)를 감동(監董)하였다.

23년 己未(1799) 가을에 정조께서 헌릉(獻陵 : 太宗陵)을 행행(幸行)하신 후 좌명공신(佐命功臣)의 후예를 등용하라는 특명이 있어 다른 공신의 후예에게는 특전이 있었으나 오직 총경공의 후예만은 은전을 입지 못했으니 이는 충경공의 종손(宗孫)이 호남으로 이거하여 잔약하게 살았던 때문이다. 후손들이 중론(衆論)을 모아 선사(先事)에 유공(有功)한 공을 추천하여 예조(禮曹)와 충훈부(忠勳府)에 통장(通章)을 올리니 동년 12월에 예조(禮曹)의 판하(判下)를 거쳐 충훈부(忠勳府)에서 충의위 류광우(忠義衛 柳匡宇)를 봉사손(奉祀孫)으로 차정(差定)한다는 통첩(通鱉)이 내리었다. 이로부터 공께서 묘사를 주간 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수차에 걸쳐 관직제수의 특전이 있었으니 순조(純禮) 11년 辛未(1811) 8월에 사옹원 봉사(司甕院 奉事). 12월에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 14년 甲戌(1814) 정월에 통예원인의(通禮院引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6월에 제릉령(齋陵令)에 제수되었다.

80세 되던 17년 丁丑(1817) 정월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通政大夫 折衝將軍 龍驤衛副護軍), 18년 戊寅(1818) 6월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桭事)에 가자(加資)되었다.

23년 癸未 5월21일 돌아가시니 향년 86세로 천원군 성남면 대치 선영하(天原郡 城南面 大峙 先塋下 亥坐)에 모셔졌다.

배위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석환(錫煥)의 따님으로 3남 2녀를 두고 졸하니 합부하였다.

장남은 세원(世元)이요, 차남은 세풍(世豊)이요, 3남은 세항(世恒)인데 숙부 광하(光廈)의 후로 출계 하였으며, 따님은 인천채 로(仁川蔡 櫓). 순흥안정필(順興安廷弼)에게 출가하였다.

후손은 천원군 성남면 석곡리(天原郡 城南面 石谷里), 대정리(大井里), 신사리(新沙里). 당진군 송악면  가교리(唐津郡 松岳面 佳橋里), 예산군 덕산면 읍내리(禮山郡 德山面 邑內里), 공주군 사곡면 호계리(公州郡 寺谷面 虎溪里)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 追先錄, 楊州齋室序. 丁巳譜. 敎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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