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포럼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아이디 패스워드    
 
   
 
     
 

          
View Article  
  작성자  편집인
  홈 URL  http://blog.daum.net/ryujise/?t__nil_login=myblog
  파 일 1  js0546.JPG (132.7 KB) Download : 6
  파 일 2  js0574.jpg (1.40 MB) Download : 4
  제    목  류광찬(柳 光 纘 )


 

류 광 찬 柳  光  纘  

 

<류광찬 : 1516~1545 : 中宗朝 孝行, 大丞公 20世 : 忠景公派>

 

자 종백(宗伯)

사헌부장령 정수(司憲府掌令 延秀)의 손이요, 송암 관(松庵 灌)의 계자(系子)이다. 생부(生父)는 광주목사 엄(廣州牧使 淹)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조행(操行)이 뛰어나더니 문음(門蔭)으로 출사(出仕)하여,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내었다.

명종(明宗) 즉위(卽位) 乙巳(1545)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송암공(松庵公)께서 옥(獄)중에서 계자(系子)를 파기하는 문권(文券)을 공에게 주면서 "후일 노륙(怒戮)의 참화를 면하라."하였다. 공은 대답하기를 "명분(名分)이 부자간인데 휴척(休戚)을 어찌 달리 하리요."하고 받지 않더니, 마침내 송암공(松庵公)께서 참화를 당하신 후 바로 잡히어 천안(天安)에 유배(流配)중 교살(絞殺)당하였다. 이에 앞서 의금부(義禁府)에서 나온 나졸이 매우 사나워 구타와 욕설을 심히 하였으나, 공은 안색을 변하지 않고 천천히 말하기를 "죽음도 오히려 달게 받거늘 구타와 욕설이 어찌 두렵겠느냐, 네 마음대로 하여라"하고, 임종(臨終)에 시를 지어 그 족인(族人)에게 보냈으니 그 시에, "평생에 그릇된 마음을 먹지 않았는데 연루된 지금 원통함이 더욱 깊도다. 푸른하늘 바라보니 하늘은 묵묵한데 하늘의 뜻 믿기 어려움을 이제야 알겠도다."하였다.

공은 이때 겨우 30세로 듣는 이 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묘소는 과천 입의등 선영(果川 立義洞 先塋)에 있다.

선조(宣祖) 10년 丁丑(1577)에 설원(雪寃)되어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었다.

 

배위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예빈시정 건(禮賓寺正 健)의 따님인데 본래 서사(書史)를 섭렵하여 의리(義理)에 독실하더니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만나 시부(媤父)와 부군(夫君)을 모두 여의고 가산(家産)마저 몰수당한 후 혈혈단신으로 형화(刑禍)를 무릅쓰고 부자(父子)의 유해(遺骸)를 수습하여 장례를 모시고 삭망(朔望)으로 반드시 성묘하되 바람과 비를 피하지 않았다. 남의 집을 빌려 두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받듬에 제물을 고루 갖추어 정성을 다하였다. 그후 또 추형(追刑)이 내려져 김오랑(金吾郎)이 들이닥쳐 창황한 중에도 두 신주(神主)를 품속에 품고 버리지 않으니 원근에서 모두 그 절의(節義)를 탄복하였다.

설원(雪寃)이 된 후 부인이 과천(果川)으로부터 한양 소격동(漢陽 昭格洞) 옛 집으로 돌아왔는데 乙巳 이후로 머리를 빗지 않고 옷을 바꿔 입지 않아 형용(形容)이 참담한지라 보는 이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부인이 부군(夫君)의 유언을 받들어 조카 철(澈)을 맞아 계자(系子)를 삼았다. 조정에서 철(澈)을 록용(錄用)하여 벼슬이 원주목사(原州收使)에 이르러 부인(夫人)께서 잠시라도 영화를 보고 돌아가시니 역시 과천 입의동(果川 立義洞)선영에 묻히셨다.

여비 갑이(女碑 甲伊)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당하여 나이 14, 5세로 간신 정군충(奸臣 鄭順朋)의집에 노비(奴婢)로 들어갔다. 그는 내심(內心)으로 복수할 뜻을 품고 저주하다가 역질로 죽은 시체의 팔뚝을 구하여 정순봉(鄭順朋)의 벼개 속에 집어 넣어 일년 사이에 그 가족 7인이 죽고 순붕(順朋) 역시 독질(毒疾)을 앓다가 죽었다. 이에 앞서 순붕(順朋)의 벼개 속에서 항상 귀신의 울음 소리가 들림으로 그 가족들이 비로소 저주함을 깨달고 여러 비복(婢僕)들을 심한매로 심문하거늘 갑이(甲伊)가 말하기를 "저네들은 죄가 없다 내가 실지로 하였다. 나의 주인인 송암 상공(松庵 相公)이 무슨 반역(反逆)을 하였길래 너희들이 모함하여 죽였느냐, 내가 원수를 갚으려 너희를 섬기다가 이제 내 뜻을 이루었다. 너희들은 속히 나를 죽여라."하고 죽엄을 당하였다.

영조(英祖) 22년 丙寅(1746)에 송암공(松庵公)에게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림과 동시에 시직공(侍直公)에게 호행정려(孝行旌閭) ․ 부인 신씨(夫人 申氏)에게 열행정려(烈行旌闊) ․ 노비 갑이(奴婢 甲伊)에게 충비정려(忠婢旌閭)가 각기 내려졌다.

丙辰(1976) 3월 서울특별시의 도시계획(都市計劃)에 의하여 시흥군 수암면 와리(始興郡 秀岩面 瓦里) 한미곡 뒷산으로 모두 이장(移葬)하고 정려(旌閭)역시 그곳으로 함께 옮겨졌다.

※ 朝鮮王朝實錄 ․ 芝蜂類說

 


 
       

Next   류세홍(柳 世 泓 ) 편집인
Prev   류희잠(柳 希 潛 )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