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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동발(柳 東 發 )
 

류 동 발 柳  東  發

 

<류동발 : 1589~1653 : 仁視朝 蔭仕. 大丞公 20世 : 忠景公․派>

 

자 덕보(德甫). 호 노강(老岡).

종부시소윤 한생(宗簿寺少尹 漢生)의 4자 신천군수 작(信川郡守 綽)의 현손이요, 예빈시직장 선민(福賓寺直長 先民)의 3자로 선조(宣祖) 22년 己丑 8월 10일 임천(林川)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뛰어나고 도량이 크더니 어버이를 섬김에 사랑과 공경을 독실히 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또한 학문에 조예가 깊어 경사(經史)를 통달하고 몸가짐을 경계하여 조금도 태만함이 없었으며, 집안을 다스리되 화목을 위주하고 사람을 접함에 신의를 지키었다.

인조조(仁祖朝)에 문음(門蔭)으로 출사(出仕)하여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 ․ 의금부도사(義禁芙事) ․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외직으로 덕산(德山)과 연기(燕岐)의 현감(縣監)을 지내었다. 외직에 있을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폐단을 없애고 백성들을 사랑하니 고을에서 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여묘(廬墓)로서 복제(服制)를 마쳤는데 그 울던 자리에 풀이 말랐으며, 묘소 아래 반백당(攀栢堂)을 지어 그곳에서 여년(餘年)을 지내다가 효종(孝宗) 4년 癸巳 2월 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5세였다.

배위 제주고씨(濟州高氏)는 판관 현(判官 晛)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을 훌륭히 갖추어 법도에 어김이 없었으며 여행(女行)을 경계하는 글을 언문(嵃文)으로 저술하여 2권이 집에 전하고 있다. 2녀를 두고 아들이 없으므로 공의 중형 동수(仲兄 東秀)의 2자 후준(後準)을 맞아 계자(系子)하고, 따님은 목사 광산정시형(牧使 光山鄭時亨) ․ 남양홍처징(南陽洪處徵)에게 출가시켰다.

묘소는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선원곡 선영하 계좌(扶餘郡 世道面 花樹里 仙源谷 先塋下 癸坐)에 합부(合祔)로 모셔있고, 공의 외손(外孫) 현감 정 휘(縣監 鄭 徽)가 묘갈명을 지었다.

후준(後準)은 광해군(光海君) 4년 壬子(1612)생인데 풍채가 뛰어나고 성품이 활달하더니 취학(就學)함에 스스로 학문에 힘써 문사(文詞)를 일찍 득하고 경사(縱史)를 널리 섭렵(涉獵)하여 견식(見識)이 풍부하였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순종하여 받들고 마음을 즐겁게 해드림은 물론 거처를 보살피고 음식을 공봉하는데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친환(親患)이 계심에 마음이 초조하여 옷에 띠를 풀지 않고 탕약(湯藥)을 올리되 먼저 맛을 보고 하늘에 빌되 자신을 대신하게끔 원하였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여묘(廬墓)로서 종제(終制)하고 날마다 성묘(省墓)하되 갖은 풍우(風雨)에도 피한 적이 없었다. 형제간에 우애하여 화락하기 그지없었고 종족을 대함에 은의(恩義)를 두루 미치게 하며 향당(鄕黨)에 처하여 진실로 공경하여 모두 그 환심(歡心)을 얻었다. 평상시에 뜻이 고결(高潔)하여 현달(顯違)을 구하지 않고 인의(仁義)로서 행실을 돈독히 하며 시골에서 여생(餘生)을 즐기다가 숙종 9년 癸亥(1683)에 향년 72세로 돌아가시었다.

후손은 부여군 세도면(扶餘郡 世道面) ․ 부안군 하서면(扶安郡 下西面)등지에 집단으로 세거하고 있다.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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