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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몽정(柳 夢 井)
 

류 몽 정 柳  夢  井

 

<류몽정 : 1529~1590 宣祖朝 遺逸. 大丞公 19世 : 夏亭公派>

 

자 경서(景瑞). 호 청계(淸溪)

예조참판 맹문(禮曹參判 孟聞)의 5대손이요, 거창현감 용공(居昌縣監 用恭)의 4자로 중종(中宗) 24년 己丑 정월 21일에 나주 모산(羅州 茅山)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근엄하고 품행이 단정하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명성이 자자하므로 권세있고 부유한 집안에서 사위를 삼고자 서로 다투었다. 감찰공께서 공의 뜻을 듣고자 묻기를 『우리 집이 심히 가난하니 부자의 사위가 되면 어쩌겠느냐?』고 하셨는데 공이 의리를 들어 사양하고 마침내 가난한 학자 송재 나세찬(松齋 羅世纘)의 사위가 되어 그 문하에서 수업, 학문을 닦았다.

선조(宣祖) 즉위 초에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급제한 후 대과(大科)에 응시 낙제하고 드디어 나주 청계동(羅州 淸溪洞)으로 들어가 자그만 집을 짓고 심경(心經) ․ 근사록(近恩錄) 등 많은 책을 읽으면서 때때로 시부(詩賦)를 읊으며 소요하였다.

4년 辛未(1571)에 우계 성혼(牛溪 成渾) ․ 한강 정구(寒岡 鄭逑) ․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 등 11인이 학행으로 천거되었는데 공이 그중 한분으로 뽑히어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로부터 공조좌량(工曹佐郞)을 거쳐 군위현감(軍威縣監) ․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를 지내고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工曹) ․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낸 후 14년 幸巳(1581)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재직 중 언사(言事)에 관련되어 충청도경차관(忠淸道敬差官)으로 나갔다가 얼마 후 광흥창수(廣興倉守)로 들어오고 다시 고부군수(古阜郡守)로 나갔다가 남원부사(商原府使)에 승진하였다. 이상의 내외직을 역임하면서 제반 직무에 전력, 신속히 처리하는 한편 청렴하여 의롭지 못한 일은 조금도 취하지 않으므로 고을에서 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21년 戊子(1588)에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한 후 그 이듬해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불렀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니 당시 동서(東西)로 당파가 생겨 분렬이 극심하던 참이라 공께서 자퇴하신 것이다.

공이 본래 천성이 강직하여 세도가(勢道家)를 추종하지 않았는데, 당시 정철(鄭澈)이 척신(戚臣)으로 더불어 교류가 매우 친밀함으로 공이 마음속으로 옳지 않게 여기고 논사(論事)에 왕왕히 그를 공격하였다. 얼마 안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 정철(鄧澈)이 위관(委官)이 되어 그에 연루된 죄인들을 다스렸는데 간신들의 모함으로 공도 또한 연좌되었다. 정철이 본래 감정이 있던 터라 공 역시 면치 못하고 23년 庚寅(1590) 7월 13일 향년 62세로 옥중에서 돌아가시었다. 이때 이속(吏屬)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말하기를 "일찍 류공께서 과거를 보았는데 그 뛰어난 재주로 수차 낙방함을 보고 우리가 그를 애석히 여겨 ‘과거의 득실(得失)이 주선의 여하에 있지 않느냐’고 말하자 류공(柳公)께서 큰소리로 꾸짖기를 '그릇된 도리로 과거를 취함은 실로 임금을 속이는 것이다. 임금을 속이고 발신(發身)한다면 어떻게 임금을 바르게 섬기겠는가'하고 즉시 물리치셨다. 대체 과제(科第)는 사람마다 욕심인데 류공은 홀로 정직으로 일관했으니 어찌 역당(逆黨)과 야합할 이치가 있겠는가" 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이 돌아가신 후 흰 대추나무가 모산(芽山)의 강당(講堂)뒤에 생겨나 가지와 잎이며 가시와 열매가 한결 분을 바른듯 희더니 인조조(仁祖朝)에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등 여러 대신(大臣)들의 상소로 말미암아 신원(伸寃)된 후 나무가 말라 죽고 다시나지 않았다.

배위 금성라씨(錦城羅氏)는 대사헌(大司憲) 희민공 송재 세찬(憘敏公 松齋 世纘)의 따님으로 4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형(泂)은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요, 호(滸)는 진사(進士)요, 양(瀁)은 호분위(虎賁衛)요, 면(沔)은 교위(校尉)이며, 사위는 제주 양종우(濟州 梁宗遇)와 이진(李溍)이다.

묘소는 지금 영암군 금정면 서당동 선영하 해좌(亥坐)에 쌍분으로 모셔있다.

공의 행장(行狀)은 과암 이무(果庵 李衰)가 지었다.

乙丑사화(士禍)에 공과 함께 무고히 참화를 당한이가 많았는데 그중에 동암 이발(東巖 李潑) ․ 남계 이길(南溪 李洁) ․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 정곡 조대중(鼎谷 曺大中) ․ 만취당 이황종(晩翠堂 李黃鐘)과 공을 세상에서 일컫기를 호남육원(湖南六寃)이라 한다.

공의 지절(志節)을 사모하여 공의 묘소 곁에 사우(祠宇)를 건립 향사해 오다가 고종(高宗) 戊辰에 훼철되었더니 지난 乙巳(1965) 3월에 후손의 세거지인 여천군 율촌면 가장리 평촌(麗川郡 栗村面 佳長里 平村)에 사우(祠宇)를 복설(復設)하였으니 이른바 송산사(松山祠)이다.

丁卯(1987) 5월에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과암(果庵)이 지은 행장(行狀)으로 대체하였으며, 묘갈명은 중재 김황(重齋 金楻)이 짓고, 비문(碑文)은 방후손 응열(傍後係 應烈)이 써서 동시에 세웠다.

※朝鮮王朝寶錄, 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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