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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식(柳 湜 )


 

류 식 柳  湜

 

<류 식 : 1552~1592 : 宣祖朝 倡義 : 大丞公 19世 : 左相公派>

 

자 락서(樂棲), 호 락오(樂吾)

문성군 수(文城君 洙)의 현손이요, 전라우수사 용(全羅右水使 墉)의 손이요, 경산현령 서종(慶山縣令 緖宗)의 2자로 명종(明宗) 7년 壬子 정월 15일 김해(金海)에서 태어났다.

선조(宣祖) 25년 任辰(1592) 4월 왜적(倭賊)들이 대거 침략하여 부산(釜山), 동래(東萊)를 거쳐 동월 19일 김해성(金海城)을 함락하였다.

이에 앞서 공은 왜적들이 월당진(月當津)을 건너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국은(國恩)을 입었는데 어찌 가히 않아서 망함을 기다리겠는가?> 하고, 드디어 가동(加僮)을 이끌고 성중(城中)으로 들어가니 부사 서예원(府使 徐禮元)은 이미 성을 버리고 도망한 후였다. 이에 동향(同鄕)의 의사(義士) 송빈(宋賓), 이대형(李大亨), 김득기(金得器)와 더불어 사졸(士卒) 들을 격려하며 이르기를 <주수(主粹)는 비록 도망하였으나 우리 4인이 있으니 원컨데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조금이라도 마음을 동요하지 말라.> 하니 모두들 수긍하였다. 이때 왜적들이 상류(上流)의 물을 막아 마실 물이 없어 곤경에 처한지라, 공께서 객관(客館)서쪽에 우물을 파서 물을 얻으므소써 사기(士氣)가 진작되었다. 한편 적군을 대항하여 수십명을 죽였으나 적세(賊勢)가 더웍 성하여 여의치 못하므로 송(宋), 이(李), 김(金), 3공과 함께 통곡하면서 북쪽으로 대궐(大闕)을 향하여 사배(四拜)한 후 적의 칼 아래 순절(殉節)하니 때는 동년 4월 20일로 나이 41세였다. 묘소는 김해군 태야면 수참산 임좌(水塹山 壬坐)에 모셔있다.

난리가 끝난 후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 되었다.

고종(高宗) 9년 壬申(1872)에 부사 정현석(府使 鄭顯奭)이 부지(府誌)를 열람하고 공의 사적이 빠진 것을 애석히 여겨 관찰사(觀察使)에게 알리자, 관찰사가 조정에 계청(啓請)하여 마침내 사충단(四忠을 세워 4공이 순절한 음력 4월 20일에 사림(士林)에서 매년 향사하게 되었다. 그후 고종 21년 甲申(1884)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가증(加贈)되었다.

지금도 객관(客館) 터 아래 우물을 류공정(柳公井)이라 부르며, 그곳에 < 柳公井 >이라 새긴 빗돌이 서 있다.

배위 상주김씨(尙州金氏)는 제주목사 명윤(濟州牧使 命胤)의 따님으로 절행(節行)이 있어 부군의 참변소식을 듣고 하종(下從)하였다. 묘소는 하동면 산산대 자좌(蒜山臺子坐)에 모셔있다.

1남을 두어 수홍(秀弘)인데 배위 광산김씨(光山金氏)와의 사이에 4남 1녀를 두어 영한(英漢), 영호(英浩), 영락(英洛), 영문(英汶)과 창녕 성 엽(昌寧 成 曄)은 그 아들과 사위이다.

공의 행장은 척암 김도화(拓菴 金道和)가, 묘갈명은 도사 류도헌(都事 柳道獻)이, 묘지명은 눌인 노상직(訥人 盧相稷)이 각기 지었다.

후손이 대단히 번성하여 김해군 진례면 다동(金海郡 進禮面 茶洞)에 세거하고 있다.

※萱碍銘, 丙寅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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