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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사눌(柳思訥)

 

류 사 눌 柳  思  訥

 

<류사눌 : 1375~1440 : 世宗朝 文臣, 大丞公 14世 : 文肅公派祖>

 

자 이행(而行).

상서 언침(尙書 彦沈)의 6대손이요, 전농정 임(典農正 臨)의 아들로 고려 우왕(禑王) 원년 乙卯 12월4일에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연산(連山) 노예의 집에서 의지하고 살았는데 숙부 하정공(叔父 夏亭公)께서 가엷게 여기고, 집으로 데려다가 친자와 같이 기르고 가르쳐 과거에 등제시키고 의복과 안마(鞍馬)를 장만하여 성혼(成婚) 시키었다. 이에 공이 항상 말하기를 『나의 신체 발부(身體 髮膚) 이외는 모두 숙부께서 주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19세 되던 조선 태조(太祖) 2년 癸酉(1393)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원(司諫院正言) ․병조정량(兵曹正郞)을 지내었다.

태종(太宗) 7년 丁亥(1407) 4월, 이조정량(吏曹正郞)으로 재직 중 중시(重試)에 급제, 즉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특제됨과 동시에 저택 및 전답10결과 노비 각 1구를 하사 받았다.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거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재직중 9년 己丑(1409) 4월에 탄핵을 입고 안악(安岳)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복직되어 좌사간(左司諫)을 거쳐 11년 辛卯(1411) 5월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14년 甲午(1414) 5월, 주상께서 조야(朝野)에 구언령(求言令)을 내려 할 말을 숨김없이 진언하라 하였다. 이때 공은 아뢰기를 『조신(朝臣)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곤고(困苦)를 물어 조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주상께서 옳게 여기시고 바로 시행하였다. 그 후 지신사(知申事)에 옮겼는데 16년 丙申(1416) 3월 사헌부의 탄핵을 입고 다시 안악으로 유배되었다가 동년 7월 소환되어 10월에 직첩을 환급받고,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 도임 후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말 한필을 하사받고, 경상감사(慶尙監司)로 물망이 있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으로 취임 하지 못하였다.

이듬해 7월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옮겼다가 10월에 함길도도순문사(咸吉道都巡問使)로 나가 변방의 폐해(弊害)를 시정할 것을 글을 올려 촉구하고, 18년 戊戌(1418) 8월,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에 제수되어 무비(武備)와 조련에 대한 의견을 계진(啓陳)하고, 임기를 마친 후 돌아와 변정도감제조(辨正都監提調)에 임명되었다.

세종(世宗) 4년 壬寅(1422) 2월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전직,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겸하였다. 7년 乙巳(1425) 9월, 경창부윤(慶昌府尹)에 제수되고, 이듬해 4월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전직되었다. 9년 丁未(1427) 11월에 평양선위사(平壤宣慰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5월 좌군총제(左軍摠制)에 전보되고, 7월에 한성부윤, 11월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제수되어 12월에 진하사(進賀使)로 명(明)나라에 갔었다.

12年 庚戌(1430) 8월 악학제조(樂學提調)가 되어 아악(雅樂)을 정리할 것을 진언하고 이듬해 10월 가사(歌辭)를 지어 바쳤다. 14년 壬子(1432) 8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있으면서 악기(樂器)와 악보(樂譜)의 정리를 진언하여 윤허를 얻고, 이듬해 정월 안마(鞍馬)를 하사 받았다.

16년 甲寅(1434) 5월, 공이 진작가(嗔雀歌)를 지어 바치니, 예조(禮曹)에서 가사를 악부(樂府)에 기재하고, 도감(都監)에 명하여 익힐 것을 청하였다.

이를 주상께서 윤허하시고 시행토록 하시니, 당시공이 난계 박연(蘭溪 朴堧)과 함께 아악을 정리하여 국악(國樂)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듬해 큰 흉년이 들어 대신(大臣)들을 각 도에 파견, 진휼(賑恤)토록 하였는데 공은 충청도도순검사(忠淸道都巡檢使)에 발탁되어 백성들의 곤고를 구원하는데 진력 하였다.

18년 丙辰(1436) 12월, 공이 상소로서 아뢰기를 『신이 삼가 세년가(世年歌)를 상고해보니 단군(壇君)은 조선의 시조(始祖)로서 그 출생이 보통 사람과 다르고, 또한 죽어서 신선(神仙)이 되었다 하며, 나라를 다스려 역년(歷年)이 많았다. 하니 일찍 이같은 일은 없었읍니다. 전하(殿下)께서 지난번 소속관청에 명하여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하셨는데 당시 그 관청에서 실상을 알지 못하고 사당을 평양(平壤)에 세울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때 저의 숙부께서 그 부당함을 변론하여 일이 중지되었읍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단군께서 처음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가 후에 백악(白岳)으로 옮기고, 상 무정(商 武丁) 8년 乙未에 아사달산(附斯達山 :文化 九月山)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읍니다. 그 가사에 이르기를 나라의 역사가 일천 사십 팔년으로 지금도 사당이 아사달에 계시네, 하였으니 어찌 징거가 없다 하겠읍니까? 또 고려때에 구월산에 사당을 세워 그 당우(堂宇)와 위판(位版)이 지금까지 있어 세년가로 더불어 일치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이나 이곳을 버리고 다시 다른 곳에 사당을 세움은 불가하게 여기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주상께서 깊이 통찰하시옵소서』 하니 주상께서 이 상소를 예조(禮曹)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20년 戊午(1438) 12월,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전직되고, 이듬해 9월 다시 예문관대제학에 복직되었다.

22년 庚申 6월 2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6세였다. 유명(遺命)에 불사(佛事)를 행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 외 몇마디 유언이 있었다.

부음이 들림에 조정에서 1일의 조회(朝會)를 거두고 부조(賻助)와 아울러 문숙공(文肅公)의 시호를 내렸다.

공은 본래 도량이 커서 자그마한 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일찍 숙부 하정공을 친부와 같이 섬기고, 돌아가심에 3년의 복제를 행하고 애통하기를 친상(親喪)처럼 하였다. 그리고 훈시자손서(訓示子孫書)가 전하고 있으며, 강릉 경포대시(江陵 鏡浦臺詩)와 한성 화양정기(漢城 華暘亭記)등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전하고 있다.

배위 강릉유씨(江陵劉氏)는 문희공 창(文濤公 敞)의 따님이요, 창녕성씨(昌寧成氏)는 군수 습(郡守 習)의 따님이다. 3남 1녀를 두어 아들에 희생(喜生)은 상장(上將)이요, 우생(偶生)은 군수(郡守)요, 갱생(更生)은 현감(縣監)이며, 사위는 사간 파평윤수미(司諫 坡平尹須彌)이다.

3자 갱생은 15세에 부친을 여의고 모친 성씨(成氏)의 슬하에 장성하여 무과에 급제, 무이만호(武夷萬戶) ․ 기장현감(機張縣監) ․ 흡곡현령(款谷縣令)을거쳐 월곶첨사(月串僉使)로 재직중 성적(聲績)으로 성종(成宗) 4년 癸巳(1473) 5월에 포상(褻賞)을 받았다. 이에 앞서 상당부원군 한명회(上黨府院君 韓明澮)가 체찰사(體察使)의 임무를 띄고 각 도의 여러 진영(鎭營)을 순시하였는데 다른 진영에선 체찰사를 영접하기 위하여 모두 분주하였으나 공은 갑주(甲冑)를 착용하고 전선(戰船)을 수리하는 한편 갑졸(甲卒)들에 영하여 궁시 (弓矢)를 갖추고, 군기(軍旗)를 앞세워 북을 울리며, 마치 적군을 맞는 전투태세와 같았다. 상당부원군이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주상께서 가상히 여기시고 유지(諭旨)를 내려 『이제 들으니 그대가 직책을 근실히 수행하여 훈련을 잘 시킨다. 하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이에 궁시와 족자(簇子)를 하사하여 그 능간(能幹)함을 표창하노니 그대는 이를 받고 무릇 제반 군무(軍務)에 더욱 힘써 나의 뜻에 부응할진대 포상이 마땅히 이에 그치지 않으리라.』하였다. 그 하사품을 가보(家寶)로 전해 오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소실되었다.

공께서 성품이 강직하고 체모가 위엄이 있어 자질들을 가르침에 매우 엄하더니 22년 辛亥(1491) 3월 12일, 향년 66세로 돌아가시고 후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문숙공의 묘소는 지금 인천시 북구 경서동(仁川市 北區 景饍) 봉수산 신좌원(烽遂山 辛坐原)에 쌍분으로 모셔 있다.

공의 묘갈명은 회당 윤응선(晦堂 尹膺善)이 짓고, 지난 辛亥(1971)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금암 성구용(錦庵 成丸鏞)이 지었다.

공의 처부(妻父) 문희공 유창(文僖公 劉敞)을 향사하는 장성 송계사(長城 松溪祠)에 공이 배향되어있다.

공의 후손은 주로 경기도(京畿道)와 충청북도(忠淸北道)에 세거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輿地勝覽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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