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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이주(柳爾胄)
 

류 이 주 柳  爾  冑

 

<류이주 : 1726~1797 : 正祖朝 武臣 大丞公 31世 : 곤山君派>

자 성유(聖有). 호 귀만와(歸晩窩).

사월당 시번(沙月堂 時潘)의 6대손이요, 증호조참판 영삼(贈戶曹參判 榮三)의 2자로 영조(英祖) 2년 丙午 6월 27일 대구(犬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품이 영특하고 힘이 세더니 점점 장성함에 백불암 최흥원(百弗庵 崔與遠) 문하에서 글을 배우다가 마침내 무술(武術)을 익혀 29년 癸酉(1753)에 무과에 급제 하였다.

일적 문경(間慶)새재를 지나는데 큰 범이 길을 막거늘 공이 채찍을 휘둘러 내려치니 범이 놀래어 도망하였다. 31년 乙亥(1755) 2월에 당시 총융사 홍봉한(摠彧使 洪鳳漢)이 어전(御前)에서 말하기를 『영남(嶺南)에 사는 무인(武人) 류이주(柳爾冑)가 용력이 뛰어나 일찍 새재를 지나면서 채적으로 범을 쫓았다. 합니다.』하니 주상께서 명을 내리시어 공을 명정전(明政殿)에 입시(入情)토록 하여 칭찬하여 이르시기를 『이 사람은 박호장군(搏虎將軍)이라,』하신 후, 또한 병서(兵書)를 읽도록 하고 임용(任用)할 것을 명하시었다. 이로부터 얼마 후 부장(部將)에 임명되고, 오위장(五衛將) ․ 남영우후(南營虞候)를 거쳐 낙안군수(樂安郡守)로 나갔다.

49년 癸巳(1773) 6월 낙안군수로 재임중 조세(租稅)를 실은 배가 바다에 침몰되므로 인하여 삼수(三水)고을로 정배(定配)되었다가 얼마후 풀려나 상주영장(尙州營將) . 대구중군(大邱中軍) . 용천부사(龍川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조(正祖) 13년 己酉(1789)에 삼수부사(三水府使)로 나갔는데 때에 장조(莊祖)의 능원(陵園)을 화성(華城)으로 옮기는데 공을 내직(內職)으로 불러 수원중군(水原中軍)을 삼고 원역(園役)을 감동토록 하였다. 능원의 역사(役事)가 끝나고 15년 辛亥(1791)에 풍천부사(豐川府使)에 세수되어 관리의 직분에 근실하였으며 이전에 지낸 고을에서도 정사를 잘 다스려 선치(善治)의 칭송이 있었다.

17년 癸丑(1793) 병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구례 오미동(求禮 五美洞)으로 둘아와 시골에서 여년을 즐기다가 돌아가시니 때는 정조(正祖) 21년 丁巳 6월27일로 향년 72세였다.

공은 키가 크고 얼굴이 붉으며 눈빛이 광해가 있었고, 의리를 숭상하여 신의가 있을 뿐 아니라 깊은 지략과 민첩한 결단으로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추중하였다. 한편 내행(內行)이 독실하여 편모(偏母)에게 효성과 동기(同氣)간에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종족(奈族)에 이르기까지 은의(恩義)가 매우 돈독하였다. 더우기 지리(地理)에 정통하여 낙안군수(樂安郡守) 재임시에 이곳에서 가까운 오미동(五美洞)의 산수(山水)가 절묘함을 보고 거친 토지를 개척하여 집을 짓고, 영남(嶺商)으로부터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이때 백형 이혜(伯兄 爾惠)와 종제 이익(從弟 爾翼)과 함께 자녀들을 거느리고 같이 와서 담장을 옆에 끼고 이웃에 살면서 날마다 왕래하며 서로 즐겁게 지내니 온 고을에서 흠모하였다.

공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로 내려올때 청원부원군 김시묵(淸順府院鳶 金時默)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으며, 공께서 돌아가신 후 도승지(都承旨) 직암 윤사국(直庵 尹師國)이 행장을 짓고, 형조참판(刑曹參判) 송재 정종션(松齋 金宗善)이 묘표를 지었다.

공께서 거처하시던 운조루(雲鳥樓)가 지금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九禮郡 土旨面 五美洞)에 도지정문화재(道指定文化財)로 보존되고 있으며, 수십칸에 달하는 와옥(瓦屋)과 유품(遺品)이 다수 보전되고 있다.

배위 양천허씨(陽川許氏)는 동지 해(同知 ?)의 따님인데 1녀를 두고 졸하여 종제 이익(從弟 爾翼)의 2남 덕호(德浩)를 맞아 계자하고, 따님은 영양남운기(英陽南雲紀)에게 출가 시켰으며, 측실(側室)에서 1녀를 두어 남양홍석영(南陽洪錫榮)에게 출가시켰다.

계자 덕호(德浩)는 호 수분실(隨分奈)인데 효우(孝友)를 천성으로 타고나 겨우 8 ․ 9세에 비로소 소학(小學)을 읽으면서 부모의 거처를 살피고 혹 밖에 나감에 아뢰고 돌아와선 반드시 뵈이는등 절차를 한결 고례(古禮)에 를아 행하였다. 약관(弱冠)에 이르러 부친께서 외직(外職)에 나가 계심으로 흘로 집안살림을 맡아 모친을 지성으로 모시었다. 한편 과업(科業)을 근실히 익혀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회(會試)에 낙제하니 사림(士林)에서 애석히 여기었다. 모친의 병환이 위독함에 주야로 울면서 천신(天神)에 자신을 대신해주도록 빌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 넣어 수일의 명을 연장시켰으나 드디어 돌아가심에 3년을 여묘(廬墓)하며 주육(酒肉)을 먹지 않았다. 부친께서 70세가 넘어 환후로 3년을 자리에 누워 계실때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에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으며 막상 돌아가심에 한결 전상(前喪)과 같이 행하였다. 그리고 예절(禮節)로써 제사를 받들고 법도(法度)로써 자제들을 가르쳐 가정 내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사우(士友)들이 공의 효행(孝行)을 기리어 감영(監營)에 글을 올리었고 공께서 돌아가신 후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공의 자손이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求禮郡 土旨面 五美洞)에 세거하면서 행의(行誼)로 세상에 들리었다.

※ 甲子譜, 追先錄, 朝鮮王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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