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포럼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아이디 패스워드    
 
   
 
     
 

          
View Article  
  작성자  편집인
  홈 URL  http://blog.daum.net/ryujise/?t__nil_login=myblog
  파 일 1  js0257.jpg (68.8 KB) Download : 11
  파 일 2  js0300.jpg (68.1 KB) Download : 12
  제    목  류차달(柳車達)


 

류 차 달 ( 柳 車 達 )   

 

<류차달 : 高麗 太祖朝 功臣 文化柳氏 始祖>

 

초휘 해(海), 자 응통(應通). 호 아사(鵝沙).

공은 신라(新羅) 말기에 유주(儒州), 지금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黃海道 信川郡 文化面) 묵방동(墨坊洞)에서 태어났는데 가세(家勢)가 심히 부호(富豪) 였다.

후삼국(後三國) 시대에 궁예(弓裔)의 신하 왕건(王建)이 신망을 얻어 천하를 통일코자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을 정벌하려 할 즈음 군량이 부죽하여 난처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이때 공께서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보급하므로써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高麗)를 건국, 태조(太祖)가 되었다. 이에 태조께서 공에게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함과 아울러 대승(大丞)의 관직을 내리고, 차운달량(車運達糧)의 뜻을 취하여 차달(車達)이라 사명(賜名)하시었다.

배위 김씨(金氏)는 신라 태부 알지 (太傅閼智)의 후손 균(稛) 의 따님으로 1남을 두었으니 자는 효금(孝金)으로 좌윤(左尹)을 지내었다.

공의 묘소는 황해도 구월산 남록 인좌(九月山 南麓 寅坐)에 모셔져 석의(石儀)가 갖추어 있고, 묘소 아래 재실 경사루(敬思樓)가 현존하고 있다.

동사(東史)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장차 견훤을 치려는데 군량이 부족함을 걱정하니 장수들이『남방(南方)은 토지가 비옥하여 백성들의 남은 곡식이 많습니다.』하였다. 이 때 공께서 『백성들의 곡식을 약탈한다면 어찌 난리를 평정하고 포악무도한 적도를 무찌르는 명분이 설수 있겠습니까 저희 집에 비축된 곡식이 있으니 그것으로써 군량의 공급을 돕겠습니다.』하고, 하룻밤 사이에 수레 일천 대를 만들어 군량을 보급하였다.

구월산에 흥률사(興栗寺)란 절이 있는데, 이는 신라 현덕왕(현德王)이 도의선사(道義禪師)로 하여금 자리를 잡아 창건케 한 절이다. 그 후 거려 공민왕(恭愍王) 5년 丙申(1356) 4월 법원선사(法圓禪師)가 중수하고 조선(朝鮮)숙종(肅宗) 10년 甲子(1684)에 또 증수되었다.

숙종 甲子 증수시에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는데, 이 글은 공민왕 병신에 법원선사가 쓴 기록으로서 그 가운데 우리 대승공에 관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절에 한 신인(神人)이 있었으니 눈썹이 그린 것 같고 머리는 검으며 살결은 눈처럼 희고 마음씨는 해처럼 밝으며 주공(周公)의 뜻과 공자(孔子)의 생각 같아 인의(仁義)의 은혜가 있고 도덕(道德)이 빛났었다. 어느날 정자 아래 의자를 기대고 앉아 있는데 홀연히 청의 동자가 와서 『왕장군의 진중에 군량이 떨어져 전공을 이룰지 알 수 없는데 이런 위급한때를 당하여 한가히 졸고 계십니까』하였다. 신인이 잠을 깨어 내심으로 충절(忠節)을 다 할 것을 다짐하고 하룻 밤 사이에 수레 천대를 제작하여 군량을 실었는데 운전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이 때에 이절의 부처의 신력(神力)으로 청의(靑衣)와 홍의(紅衣)를 입은 신군(神軍) 일천여명을 동구 밖에 출동시켜 잠시에 그들로 하여금 군량을 운반하여 전공을 크게 세우고, 삼한(三韓)을 통합하게 하니 그 공이 은 탕왕(殷 湯王)때 이윤(伊尹)과, 주 무왕(周 武王)때 여상(呂尙)과 같은 지라, 이로 인하여 신인에게 차달이란 이름을 주었다. 이 절의 영험이 아니었다면 왕장군이 삼한 통합의 대업(大業)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하였다.

 

공의 묘소가 천여년을 전해오는 동안 묘역의 수호 사실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중종(중종)38년 癸卯(1543) 9월에 외후손 석벽 홍춘경(石壁 洪春卿)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로 가서 묘비를 개수하였는데, 그 비문에 『대승공 18대손 관(灌)이 지금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있는데 내가 부임에 앞서 류찬성을배알하니류찬성이나에게이르기를『고려대승공은나의시조로서묘소가문화고을에계시는데세대(世代)가 오래되어 봉분이 무너지고 비석이 뽑히어 있다. 지난 제미(1523)년간에 그 지방 사람이 대승공의 자손이 번성함은 묘소가 길지(吉地)인 때문이라 여기고, 자기 부모를 도장(盜葬)하였었다. 그 이듬해 내가 본도 관찰사로 가서 즉시 도장을 파냈으나 미쳐 묘소에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와 항상 생각하기를 이 후에 대승공 자손으로서 본도 관찰사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못한 일을 부탁하려 하였다. 이제 마침 홍공(洪公)이 대승공의 20대 외손으로 그 곳 관찰사로 가게 되었으니 오래토록 쓰러졌던 비석을 세움은 홍공에게 달려 있다. 부임하거든 발오 비석을 세우시오』하였다.

선조(선조)18년 乙酉(1585)4월에 17대손 희림(希霖)이 황해도 관찰사로 가서 묵방사에 완복문(完復文)을 내렸는데, 그에 이르기를『대승공 묘소 아래 묵방사에 방이 몇, 부엌이 몇, 승려가 몇이 있는데, 이미 지난 일은 말할 것 없고, 이후에 오는 관찰사들은 사찰을 보수하고 승려들을 보호하여 무릇 관청의 부역이나 군대의 징집에 일체 부르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맡은 일에 전력하고 봄 가을로 소제(掃除)도구들을 갖추도록 함이 또한 마땅할 것이다』하였다. 그리고 동년 8월에 대승공의 묘비를 개수하였는데 그 음기(陰記)에 『을유년(乙酉年)에 희림이 본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문화 고을에 이르러 대승공의 묘소를 배알하였는데 묘소 아래에 비석이 부러져 땅에 쓰러져 있었다. 두루 살핀 후 슬픈 마음을 억제하고, 지금 대승공 자손으로 해주목사 사규(海州牧使 思規), 풍천부사 원서(豊川府使 元緖) 그 밖에도 황대도 내에 외직으로 있는 여러 일가들과 함께 힘을 모아 비석을 개수하고 옛적 묘비에 기록된 글을 그대로 새겼으니 이는 홍감사춘경(洪監司春卿)이 지은 것이다. 아아 대승공의 공훈과 덕업이 대대로 전하여 옛적에 비석이 있었는데 없어진지 이미 오래되어 홍감사가 비석을 세웠으나 40년이 채 못되어 비석이 또 파괴되었다. 지금 세우는 비석도 어느때 마멸되고 누가 다시 세울지 모르겠다. 후일 자손으로서 이곳 황해도에 외직으로 오는 사람은 모름지기 힘써 보전할지어다.』하였다.

숙종(肅宗) 7년 辛酉(1681)8월에 21대손 상운(尙運)이 평안도 관찰사로 가서 대승공의 묘비를 개수하였다. 그 비문에 이르기를 『묘소에 구비가 있었는데 세대가 오래 되어 민멸하고 전함이 없는지라 그 지방 사람이 도장을 하였거늘 18대손 관(灌)이 황해도 관찰사로 재임중 그 무덤을 파내었다. 그 뒤 홍감사춘경(洪監司春卿)에게 부탁하여 중종(中宗) 癸卯(1543)에 비를 개수하였다,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선조(宣祖) 乙酉(1585) 8월에 17대손 희림(希霖)이 본도 관찰사로 가서 종인(宗人)으로써 본도에 수령으로 있는 이들과 함께 협의하여 다른 돌로 바꿔 세우고 홍감사가 쓴 비문을 그대로 세겼다. 이에 乙酉 후로 97년이 지나 비석이 또 망가져서 자손으로서 이곳에 성묘하는 이들은 모두 슬퍼하고 탄식하던 터이다. 상운이 평안도 관찰사로 와서 직무에 얽매어 비록 성묘는 못하였으나 비석을 다시 세워 인멸하지 않도록 함음 곧 나의 책임이라 여기고, 바로 석공을 시켜 돌을 다듬어 사실의 전말을 간략히 기록하노니 이는 후계자로 하여금 전대에 세운 년월을 알도록 하고 그 글을 다시 새기지 않았다.』고 하였다.

 

영조(英祖) 3년 丁未(1727)에 조정으로부터 묘하에 사당을 세우라는 특명이 있어 대승공의 묘소아래 사당과 재실을 지었다.

철종(哲宗)13년 壬戌(1862)에 27대손, 무과에 급제한 기영(基榮)이 묘소에 사초(莎草)를 드리고, 묘비를 개수한 후, 이듬해 癸亥(1863)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비명은 대제학 규재 남병철(圭齋 南秉哲)이 짓고, 글씨는 이조참판 한산 서형순(漢山 徐衡淳)이 썼다.

신도비명에 이르기를,

『울창한 아사달산에 대인이 묻히셧네,

유래가 멀고멀어 황제에 이르도다,

삼한통합 대업도와 수레를 제작하니

위대한 벽상공신 대승으로 보답했네

숭악의 보씨요, 하구의 거씨마냥

빛나는 가문으로 복록을 이었도다.

쌓은 덕이 없었던들 후손에 끼쳤겠나,

산수좋은 저무덤 만세에 전하리라.』

『 鬱彼阿斯昔人之藏  其來悠遠上遡軒皇

業贊一統車蒐千乘  偉哉璧勳縻以大丞

松嶽甫降丘蘧卜  赫赫厥世 綿綿其祿

不有種德曷貽後昆  山縈水繞萬世玆原 』

 

丙戌(1946)에 31대손 상렬(庠烈)이 광산군 본양면 동호리 (光山郡 本良面 東湖里)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대승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그로부터 매년 음 2월 15일에 향사하고 있으니, 이른바 대동사(大東祠)이다.

공주읍지(公州邑誌)에 의하면, 『고려 태조 19년 丙申(936)에 공주 계룡산(公州 鷄龍山)에 태조의 원당(願堂)을 창건하였는데, 이때 대승공께서 동사의 도담(都監)으로 오셔서 어느 민가에서 신라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상(肖像)을 발견하고 그 충의를 감모하고 사당을 세워 초혼제(招魂祭)를 지내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동계사(東鷄祠)의 유래로서, 지난 庚子(1960)에 숙모회(肅慕會)에서 대승공의 높은 뜻을 기리어 동계사에 추배하여 매년 음 3월 15일과 10월 24일에 향사하고 있다. 순조(純祖) 辛卯(1831)에 간행된 지후사공파보(祗侯使公派譜)에 의하면, 대승공께서 신라 헌강왕(憲康王) 6년 庚子(880) 8월 28일 진시생이라 하고 사주(四柱)는 庚子, 乙酉 戊戌, 丙진 이라 하였다.

※東國輿地勝覽 文化柳氏世譜 大東祠誌 肅慕誌

 

          
 이사진은 일본 류기환 일가가  2008년 대승공 묘소를 성묘시 촬영하여 대종회에 제공한 것입니다. [류도산]
 

 


 
       

Next   류효금(柳孝金)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