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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돈(柳墩)
 

류 돈 ( 柳 墩 )      

<류돈 : 1274~1349: 고려 충숙왕조 문신 대승공 11세>

초명 인화(仁和), 자 백구(伯丘), 호 담암(湛庵)

공은 문정공 경(文正公 璥)의 손이요, 정신공 승(貞愼公 陞)의 3자로 원종(元宗) 15년 갑무생이다.

13세 되던 충렬왕(忠烈王) 12년 병술(1286)에 문음(門蔭)으로 동대비원록사(東大悲院錄事)에 제수되고, 18년 임진(1292)에 권지도감병마록사(權知都監兵馬錄事)가 되고 이어 식목도감록사(拭目都監錄事)에 옮겨 국론(國論)을 관장함에 공정하고 속임이 없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재상의 도량이라』고 일컬었다.

26년 경자(130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비서교서랑(秘書敎書郞)에 보직되었다가 얼마 후 염세(鹽稅) 감독차 경상도(慶尙道)로 내려가 복주(福州:안동)에 도착했는데 안렴사(按廉使)가 먼저 여관에 들어와 있으면서 공을 맞이함이 무례하였다. 공이 노하여 별관(別館)으로 돌아와 영리(營吏)를 불러 꾸짖기를『너의 사또가 관직이 높아서 그를 의지하는 것이냐, 무례함이 어찌 이 같은가, 무릇 선비로서 자매(姊妹)를 팔아 높은 벼슬을 얻음은 구차한 일이 아니겠는가?』하고 그 영리를 곤장으로 벌주었다. 이는 안렴사가 그 누이를 왕실에 출가 시켜 왕의 총애로 4품의 관작에 뛰어 올랐던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은 안렴사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그 후 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선부의랑(選部議郞)을 거쳐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1310)10월에 밀직사좌부대언(密直司左副代言)에 승진하고 이어 성균제주(成均祭酒)·사헌집의(司憲執義)·얼부전서(讞部典書)를 두루 지냈는데 항상 대언(代言)을 겸직하였다.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승진하여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고을에 예부터 대나무가 없었다. 부임즉시『이 고장 사람들이 고루한데 어찌 대나무가 없는가』하고 대를 옮겨 재배토록 하니 온 고을에 대가 번성하여 백성들이 그에 힘입어 이익 됨이 많았다. 또 광주유수(廣州留守)로 나가 관사(官舍)가 비좁음을 보고 『이 고을은 팔목(八牧)중 으뜸으로 위엄을 갖추어야 마땅하거늘 다만 난리 뒤에 임시 지은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또한 구지(舊址)도 아니니 당장 땅을 파 보도록 하라. 』하고 명을 내려 파보니 과연 주추와 섬돌이 완연히 묻혀 있었다. 이로ㅓ서 그 전과 같이 다시 관사를 건립하니 온 고을에 공의 밝은 안목과 식견에 모두 탄복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는데 전력을 다하니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내직으로 들어와 알부(讞部)와 종부시(宗簿寺), 전의시(典儀寺)의 판사(判事)를 두루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전직하여 청탁(淸濁)을 분명히 가려 격려하고 억제하므로 풍속의 교화(敎化)에 도움이 많았었다. 이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판전교시사(判典橋寺事), 밀직사사(密直司事),상호군(上護軍)을 두루 역임하였다.

충숙왕(忠肅王) 5년 정축(1337)에 합포(合浦)에 나가 전관(前官)이 거느리던 기생(妓生)들을 모두 쫒아내고 군졸들에게 말 타고 활쏘기를 익혀 군사 조련(調練)의 기강을 바로 세웠다.그리고 고을에서 해마다 건록 일천두(乾鹿 一千頭)를 나라에 진상(進上)하고 있었는데, 공이 이르기를『무릇 사냥을 할 때 사슴만 잡고 다른 짐승은 놓아두겠는가? 이것은 우리 임금의 생리(生理)를 존중하는 뜻이 아니라.』하고 그 폐단의 상황을 장계(狀啓)로써 아뢰니 왕께서 허락하시고 건록의 진상을 폐지토록 하였다.

만년에 시령군(始寧君)에 책봉되고 첨의찬성사 예문관대제학(僉議贊成事 藝文館大提學)에 승진되었는데, 이로서 치사(致仕)한 후 집으로 돌아와 담암거사(湛庵居士)라 자호(自號)하고 한가히 지내면서 성정(性情)을 수양하기 10여년후 충정왕(忠定王)원년 기축 5월 정미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6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광주(廣州)고을 백성들이 슬퍼 마지않고 와서 조문하는 이가 많았었다. 동년 6월 경신일에 송림현(松林縣) 동쪽 산기슭 모부인(母夫人) 묘소 곁에 장례를 모시니 바로 공께서 생전에 택지(擇地)로서 지금 장단군 장도면 두곡리(長湍郡 長道面 杜谷里) 유좌(酉坐)의 언덕이다. 장례시에 바로 지석을 묻었는데 예문관대제학 안진(藝文館大提學 安震)이 묘지명을 짓고, 공의 막내 사위 내부시승 박린(內府寺丞 朴)이 비문을 썻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곧바로 장경공(章敬公)의 시호가 내렸다.

공은 성품이 검소하고 근실하여 음식을 가리지 않고 의복을 사치하지 않았으며, 처음 벼슬하여 재상의 지위에 오리기까지 권문세가(權門勢家)에 출입하지 않았다.

공께서 처음에 개성 삼현(開城三峴) 왼쪽 기슭에 살았었는데 밤에 홀연히 청의동자 몇이 나타나 뜰에서 춤을 추며 말하기를 『이제야 참 주인을 얻었다』하더니 그후로 집 주위가 정숙하고 나무가 울창하여 고가(고가)의 풍취가 한결 더하였다. 배위 승화군부인 김씨(承化郡夫人 金氏)는 동지밀직사사 판도판서 중전(仲全)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두었다.

장자 총(總)은 밀직사좌부대언(密直司左副代言),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고, 차자 진(鎭)은 삼사부사(三司副使)로 문화군(文化君)에 봉하였으며, 사위는 군부정랑 강화최계진(軍簿正郞 江華崔季眞)·응양군호군 순창설봉(鷹揚軍護軍 淳昌薛鳳)·전법총랑 성주이몽정(典法摠郞 星州李蒙正)·전객시승 낙안김인관(典客寺丞 樂安金仁琯)·내부시승 밀양박린(內府寺丞 密陽朴)이다. 공의 생전에 내외 손이 무려 40여명이 넘었다.

공의 묘소를 실전하였더니 갑자(1924)여름에 홍수가 졌었는데 장단 두곡(장단 두곡)의 공의 묘소 아래에서 높이가 3척5촌의 지석이 사태 가운데 드러났었다. 산하에 사는 류헌(柳瓛:전주인)이 이를 발견하였는데 비록 관향(貫鄕)은 다르지만 내심으로 기뻐하고 포천(抱川)·연천(漣川)·평산(平山)등지에 사는 후손들에게 알리었다. 이로서 후손들이 가서 살펴본즉 광지(壙址)가 명확하고 곡장(曲墻)이 완연하며 지석이 광중(壙中)아래 있어 공의 지석이 분명하였다. 이듬해 2월 봉축과 동시에 석의를 갖추고 재실을 마련하는 한편 약간의 제전(祭田)을 갖추었다. 묘표(墓表)는 후손 정렬(廷烈)이 지었다.

※高麗史 輿地勝覽 墓誌銘 號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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