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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세창(柳 世 彰 )
 

류 세 창 柳  世  彰

 

<류세창 : 1657~1715 : 肅宗朝 孝行 : 大丞公 24世 : 左相公派>

 

자 회중(唯仲). 호 송곡(松谷).

문원군 사(文原君 泗)의 9대손이요. 무과 희(武科 禱)의 2자로 효종(孝宗) 8년 丁酉 11월 5일에 진주 송곡(晋州 松谷)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질(氣贊)이 아름다웠는데 7세 되던 현종(顯宗) 4년 癸卯(1663)에 모친을 여의고 11세 되던 丁末(1667)에 부친을 여의어 서모(庶母)를 의지하여 장성하였다. 서모를 섬김이 매우 지성스러움으로 서모가 감격하여 사랑하기를 자기 소생처럼 여기었다. 한편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하여 형님께서 밖에 나가 혹 날이 저물어 돌아오지 않으면 공이 문 밖에 나가 기다리며, 식사(食事)때가 되어도 먼저 밥을 먹지 않고 말하기를 『옛적에 개 한마리가 오지 않아도 많은 개가 밥을 먹지 않는다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개만 같지 못할 것인가?』하고 돌아온 후에 함께 먹었다.

형님 및 서제(庶弟)로 더불어 한 집에서 동거(同居)하며 재화(財貸)는 물론 비복(婢僕)에 이르기까지 서로 분별하지 않았고, 초하루 보름엔 한 집의 어른 아이를 물론하고 한 집에 모아 회식(會食)하고 자질들이 한 곳에 모여 종일 담소하였다.

숙종(肅宗) 10년 甲子(1684)에 공의 나이 28세였는데 선고(先考)의 기일(忌日)을 당하여 추복(追服)을 결심하고 묘소에 여막(廬幕)을 짓고 궤연(饍筵)을 설치, 조석으로 상식(上食)하고 또한 성묘하여 슬퍼 울며, 몸에서 상복(喪服)을 벗지 않고 여막을 나가지 않았다. 때에 형님이 내직(內職)으로 서울에 있으면서 공의 추상(追喪) 소식을 듣고 바로 관직을 버리고 돌아오는데 마침 소상(小祥)날이었다. 이에 꿩 2마리를 사려고 하는데 저자에 없어 다만 한마리만 사가지고 돌아오니 공이 말하기를 『조석으로 각기 한마리씩을 올려야 할 것인데 한마리로써 나누어 쓸까요 』하고 자신의 무성 無誠)함을 책망하고 있는데, 조카 담(潭)이 달려와 아뢰기를 『정 한 마리가 스스로 여막에 날아들어 왔읍니다. 』하거늘 드디어 잡아 조석(朝夕)에 사용하였다. 대상(大祥)에는 국금(國禁)으로 쇠고기를 쓰지 못하게 되어 산육(山肉)을 쓰려고 하는데 사냥을 하여 얻지 못한지라, 공이 스스로 책망하며 밤새껏 잠을 자지 못하였는데 새벽녘에 큰 노루 한마리가 스스로 여막에 들어오는지라, 드디어 잡아 제사에 올리니 사람들이 모두 효성에 감동된 소치라 하였다.

정한익(鄭漢翼)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잠잠히 비니 그 효성이 하늘의 도움을 입어, 제사에 당하여 큰노루가 집안에 들어왔도다』, 하고 또 이르기를 『어버이 제사에 지극한 성의가 하늘에 미쳐 날으는 꿩이 소상에 임하여 빈소 앞에 이르렀네』하였고, 곽상사수성(郭上舍壽星)은 시에 이르기를 『날짐승이 스스로 날아와 제사에 바쳤으니 고기가 뛰고 죽순이 난다함은 가히 희롱하는 말일러라』하였고, 양처사천익(梁處士天翼)은 말하기를 『지성스런 효성을 천성으로 타고 났으니 어찌 우연한 일인가?』하였다.

담제를 마친 후에 또 제최(齋衰)의 상복을 지어 모친의 기일(忌日)을 당하여 추복을 행하고자 함에 백씨께서 말리시며 이르기를 『네가 슬픔이 예도(禮度)에 넘어 눈으로 사물을 보지 못하는데 또 선비(先妣)를 추복코자 하니 반드시 증세(症勢)가 더욱 악화 되리라』하고 즉시 명하여 그 상복을 불태워 버린다. 그 후 회갑(回甲)을 기다려 추복(追服)코자 하였으나 41년 乙未(1715)에 두증(痘症)이 심하여 임종에 자질들로 하여금 건복(巾服)을 입히도록 하고 청사(廳祀)를 행하고자 밖에 나와 재배하고 하늘에 빌면서 말하기를 『丁酉년은 나의 모친께서 나를 낳아주신 해입니다. 원컨대 수명을 연장하여 추복을 마치토록 해 주십시요.』하고 또 재배한 후 들어와 돌아가시니 때는 동년 3월 초 2일로서 향년 59세였다.

일찍 생정 재종제(生庭 再從弟) 생원 남파 세주(生員 南坡 世冑)로 더불어 문화 구월산(文化 丸月山)에 있는 시조 대승공(始祖 大丞公)의 묘소를 성묘하고 또 해주 수양산(海州 首陽山)에 올라가 생정 선조(生庭 先祖) 서산공(西山公)의 유지(遺址)에 축문을 지어 제사를 모시고 돌아왔다.

공께서 돌아가신 후 사림(士林)들이 공의 효행 사실을 글로 올려 복호(復戶)의 특전을 무릅썼다.

배위 밀양박씨(密陽朴氏)는 황(愰)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을 지극히 갖추어 규문(閨門)에 법도가 있었으며, 4남 3녀를 두어 아들 식(湜)은 수첨지 壽僉知)인데 효우(孝友)로 저명하였고, 발(發) ․ 집(潗) ․ 철(渽)이 있었으며, 따님은 양진영(梁鎭瀛) ․ 하한경(河漢經) ․ 정도동(鄧道東)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묘소는 진주 송곡 흥정 임좌(晋州 松谷 鴻亭 壬坐)에 계시고 배위는 동록 묘좌(同麓 卯坐)에 모셔 있다.

후손은 마산시회원통(馬山市檜原洞), 진양군 금곡면송곡리(晋陽郡 金谷面松谷里) ․ 홍정리(鴻亭里), 성산리 (省山里)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 晋陽邑誌, 丁巳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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