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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석구(柳 錫 九 )
 

류 석 구 柳  錫  九

 

<류석구 : 1757~1797 : 正祖朝 孝行 大丞公 26世 : 檢漢城公派>

 

자 성우(聖佑). 호 석현(石峴).

함안군수 효용(咸安郡守 孝庸)의 11대손 이요, 처기(處基)의 장자인데 출계(出系)하여 백부 처성(處城)의 계자가 되었다.

영조(英祖) 33년 丁丑 6월8일 김제 황산(金堤 黃山)에서 태어났는데 자품(資稟)이 너그럽고 재예(才藝)가 총명하며 효행이 뛰어날 뿐 아니라(經吏)를 널리 익혀 칭송이 자자하였다.

약관(弱冠)이 못 되어 양가(養家)의 양친을 모두 여의고 슬퍼함이 예제(禮制)에 넘으니 일향에서 감복하고 드디어 향천(鄕薦), 도천(道薦)이 있었다.

정조(正祖) 21년 丁巳 윤 6월12일 졸하니 겨우 41세로 황산 선영하(黃山 先塋下)에 묻히셨다.

배위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무후(無后)하고 전주최씨(全州崔氏)는 명해(命海)의 따님인데 1남을 두어 효원(孝源)이다.

아들 효원이 어려서부터 착하더니 11세에 부친을 여의고 슬퍼 마지 않으며 예제(禮制)를 쫒아 복을 마친 후 의관(衣冠)을 화려하게 갖추지 않고 항상 말하기를 『내 일찍 부친을 여인 사람인데 어떻게 의복(衣服)을 곱게 입겠느냐』하고 평생을 화려한 복장(服裝)을 하지 않았으며 매양 기일(忌日)이 닥치면 반드시 살아 계시는 것 처럼 성의를 다하였다. 18세에 과거에 응시 낙제하고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다가 37세에 모친을 여의고 3년을 여묘(廬墓), 조석(朝夕)으로 성묘하여 무릎 꿇은 자리에 풀이 마르고 흙이 파인 흔적이 완연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친 후 또 향시(鄕試)에 응시하였으나 마침내 낙제하니 당시 사람들이 애석히 여기었다. 만년에 자신을 수양하고 후생들의 교육에 주력하여 저서(著書) 10여편이 있다.

후손은 김제군 공덕면 황산리(金堤郡 孔德面 黃山里)에 세거하고 있다.

※ 追先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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