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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홍렬(柳洪烈)



류홍렬
柳 洪 烈

<류 홍 렬 : 字 : 景 燦 號 : 松 隱 1890~1968 : 行誼 ․ 學者 左相公派 大丞公 32世>

서산 자미(西山 自湄)의 후예로 농포 희달(弄圃 希達)의 10대손이요, 경은 인옥(耕隱 寅玉)의 아를이요 광산정류(光山鄭流)의 외손으로 지금의 광산군 본량면 덕림리에서 태어났다.

공은 풍채가 헌헌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총명하기 그지 없어 일찍 문사(文詞)가 성취되었다. 약관에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선생을 정읍(井邑)으로 찾아가 뵙고 강회(講會)에 참석, 본말선후(本末先後)의 도리를 듣고 많은 사우(士友)들과 교류하였다.

본래 가세가 곤궁하여 어버이 공양에 미흡함을 한한 나머지 가사를 돌보며 지체(志體)의 봉양에 정성을 다하고 여가로 경서(經書)를 읽어 진리 탐구에 열중하며, 항상 형제가 없음을 한탄하고 누이들과 우애하여 기쁘게 지네니 집안에는 언제나 화기가득하였다.

만약 친환(親患)이 계시면 얼굴에 근심의 기색이 떠나지 않고, 의대(衣帶)를 풀지 않고 시탕(侍湯)에 정성을 다하였다. 별세하심에 망극한 슬픔을 다하여 온갖 절차를 가례(家禮)에 쫓아 행하고, 기일(忌日)이 닥치면 마치 초상때 처럼 애통함은 물론 재계(齋戒)에 힘써 여재(如在)의 성의를 다하는 한편, 집안 사람에게 항상 말하기를 『정성이 있으면 신령이 흠향하고 정성이 없으면 신령이 흠향하지 않는다. 』하였다.

1946년에 본양면 동호리 신촌(莘村)에 시조의 사우 대동사(大東祠)를 창건하였는데 이때 족형 관암 상렬(寬庵 庠烈)을 도와 내외의 주선에 온갖 성력을 기울여 마침내 완공을 보고 향사(享祀)의 제반 절차에 노고를 다하였다.

문내(門內)의 자질들을 항상 옳은 방도로 깨우치고 친우간에 신의를 주장함은 물론 남의 착한 행실을 들으면 반드시 칭찬하고 악한 행위를 보면 반드시 깨우쳐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대의(大義)를 솔선 수범하였다. 또한 남의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가서 주선하고 위로할 뿐 아니 족척 지구(族戚 知舊)간에 대고(大故)가 있으면 몸소 가서 조문하고 미쳐 듣지 못했으면 후에라도 반드시 가례를 다하였다.

누이 한분이 일찍 홀로 되어 외아들을 기르면서 구고(舅姑)의 봉양에 지성을 다하며 살아가니 공께서 이를 측은히 여기고 자주 방문하여 위로함을 늙도록 페하지 않았다.

평생에 고인의 도리에 힘써 음과 뜻을 고결하게 지키고 경서(經書)의 깊은 뜻을 탐구하여 실지로 행하니 원근의 학자들이 흠모하여 마지 않았고 종유(從遊)를 원하는 손님의 내왕이 그치지 않았다.

한때 나주 문평(羅州 文平)에서 공에게 청하여 그곳에 가서 4년 동안 후진들을 가르쳤는데 문하에 학문을 성취한 선비들이 많았다.

79세를 일기로 별세하시니 본량면 동림리 구룡촌 선영하 사좌(本良面 東林里 九龍村 先塋下 巳坐)에 안장되었다. 이때 호서, 호남의 망사(望士)들이 공을 추모하여 지어 보낸 만사(挽辭)와 제문(祭文)이 60여장에 이르렀다.

공께서 생존시에 문생들이 무열계(茂悅契)를 조직하여 1963년 6월, 덕림리 동구 밖에 청덕비『淸德碑』를 세워 공의 고결한 뜻을 추앙하였다. 비문은 술암 송재성(述庵 宋左晟)이 지었다.

공의 행장은 겸산 류인원(謙山 柳寅瑗)이 짓고, 묘갈명은 술암 송재성(述庵 宋左晟)이 지었으며, 공의 저서 송은유고 『松隱遺稿』가 있다.

배위 광산김씨(光山金氏)는 귀선(貴璿)의 따님으로 2남을 두어 재만(在萬)과 재호(在鎬)이다.

아들 재만 역시 효행이 뛰어나고 위선에 성의가 지극하여 인근에서 삼대효문(三代孝門)으로 일컫고 있다.

※ 淸德碑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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