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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재복(柳在復)


류재복 柳 在 復

<류재복 : 字 : 宗大, 號 : 菊 軒 1896~1975, 行관誼, 忠景公派 : 大丞公 33世>

종부시소윤 한생(宗簿寺少尹 漢生)의 후예로 화설당 운(花雪堂 運)의 10대 손이요, 매헌 문창(梅軒 文昌)의 7대 종손이요, 동렬(東烈)의 아들로 무안군 청계면 화설당에서 3대독자로 태어났다.

자성(姿性)이 순수하고, 재질(才質)이 뛰어나 일찌기 스승을 쫒아 학문을 익힘에 남달리 문리(文理)를 속히 터득하여 장로(長老)의 칭송을 받았다. 한편 효성이 지극하여 혹 친환(親患)이 계시면, 시탕(情湯)은 물론 간호에 정성을 다하여 침식(寢食)을 폐하였다. 14세에 부친을 여의고 3년을 행소(行素)로서 거상(居喪)하고, 편모를 섬기되 뜻을 순종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과 출고반면(出告反面)에 자식된 도리를 다하다가 이윽고 돌아가심에 전상(前喪)과 같이 행하였다. 기일(忌日)을 당하면 반드시 3일을 제계(齋戒)하고 밤새껏 자지 않음은 물론 마치 초종(初終)때와 같이 슬픔을 다하였다. 항상 여러 아들들에게 경계하기를 『돌아가신이 섬기기를 살아 있는 이와 같이 섬겨야 한다.』하셨으니, 이로써 가히 공의 지극한 효성을 알겠도다.

중년 이후로는 산업(産業)을 거들지 않고, 족형 후설 재오(後雪 在午), 설재 재능(雪齋 在能), 족제 성암 재성(誠庵 在晟)으로 더불어 승선유후(承先裕後)의 사업에 진력하는 한편 향당의 사우(士友)들은 종유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유도(儒道)의 진작에 기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사우들이 공의 풍도(風度)를 듣고 찾아옴이 별로 그칠 날이 없었으나 공은 혼연히 영접(迎接)하여 회포를 풀었다. 또한 사우들이 공을 국헌이라 불렀으니 이는 만절(晩節)을 능히 지킨 공의 지취(志趣)를 취한 것이다.

향년 80세에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묘소는 청계면 월선리 신촌 후록, 선조 만포공(晩圃公) 묘소 아래 간좌(艮坐)에 모셔졌다.

배위 포산곽씨(苞山郭氏)는 진룡(鎭龍)의 따님으로 어려서부터 규범(閨範)이 남다르더니 16세에 류문(柳門)으로 우귀(于歸)하였는데 가세가 지극히 곤궁하여 낮이면 밭을 매고, 밤이면 길쌈하며 근검으로 일관하는 한편 위로 시부모를 지성으로 섬겨 정성 감지(定省 甘旨)의 절차에 빠짐이 없었고, 또한 부군을 공경히 받들며, 아래로 많은 자녀들을 의방(義方)으로 가르쳐 성취시키었다.

비록 부인이었지만 성품이 개결(介潔)하고 두뇌가 명석(明晳)하여 공사(公私)의 분별이 각별하고 약자를 돕고 강자를 억제하는 특이한 기질이 있었으므로 향당에서 모두 여중군자(女中君子)라 일컫었다. 공보다 수년 먼저 돌아가셨는데 후에 공의 묘소에 쌍분으로 모시었다.

4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익선(益善), 영선(永善), 필선(必善), 경선(京善)이요, 사위는 순응 안일봉(順興 安一奉), 광산 김계현(光山 金季鉉)이다.

공의 행장은 무안 박학주(務安 朴學周)가 짓고, 묘갈명은 이천 서인남(利川 徐仁楠)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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