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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익선(柳益善)



류익선 柳 益 善

<류익선 : 字 永安, 號 念菊堂, 1919.6.27. 孝行. 忠景公派 大丞公 34世, 서울 강남구 역삼동 830-19>

국헌 재복(菊軒 在復)의 장자이며, 포산 곽진룡(苞山 郭鎭龍)의 외손으로 무안군 청계면 사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후하고 자상하며 침착하고 관대하여 위로 부모의 뜻을 순종하고 아우들로 더불어 우애함이 범상하지 않으므로 친척(親戚)은 물론 향당(鄕黨)에서까지도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일찌기 목포상업전수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가정 형편상 더 진학을 못하고 향숙(鄕塾)에서 한학(漢學)을 수업하였다.

일제(日帝) 말기 1940년에 목포(木浦)에 있는 본전석유회사(本田石油會社)에 취직하여 수년을 지내다가 1944년에 무안군청(務安郡廳)에 들어가 청계면(淸溪面)에 주재, 양잠지도원으로 봉직하면서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이듬해 남조선 미유주식회사(南朝鮮 美油株式會社) 목포본점 경리과(木浦本店 經理課)에 취직, 5년여를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시작하여 목포시 보광동(木浦市 寶光洞)에서 문화상사(文化商社)로 상호를 걸고 비료위탁판매를 경영 하였다.

1955년에 서울로 올라가 중구을지로(中區乙支路)의 방산시장(芳山市場)에서 역시 문화상사를 개점, 식료품상을 10여년 경영하였다. 이렇듯 생계를 위하여 객지에 살면서도 고향에 계시는 부모를 잊지 않고, 매월 내려가 안후(安候)를 살피고 구미(口味)에 맞는 반찬이 떨어지지 않음은 물론 약제(藥材)를 구하여 봉양에 지성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모친께서 환후(急候)로 병석에 눕자 1965년 봄에 즉시 부인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시병(侍病)에 지성을 다하다가 동년 9월 상(喪)을 당하여 상장제전(喪葬祭奠)을 한결 예제(禮制)에 쫒아 행하고 홀로 계신 부친을 더욱 효성으로 받들다가 1975년 9월 상을 당하여 제반 절차를 전상(前喪)과 같이 행하였다. 이렇듯 그 효행이 널리 알려져 1980년 8월에는 무안향교(務安鄕校)로 부터 효령표창장을 수상하고, 1982년 4월에는 차류대중회(車柳大宗會)로 부터 효행표창장을 수상하였다.

한편 모현지성(慕賢之誠)이 남달라 무안향교 및 병산사(柄山祠), 애송사(愛松祠) 등의 향중 사우(祠字)를 출입, 헌관(獻官)등 제관을 누차 행하였다.

1981년 다시 서울로 이거, 자녀들을 뒷바라지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인 무안박씨(務安朴氏)는 한학자(漢學者)인 우국 현기(友菊 顯基)의 따님으로 1921년 6월 29일생인데 현숙한 부덕(婦德)을 갖추어 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많은 시동생, 시누이를 우애로 감싸고, 곤궁한 형편에도 혼취(婚娶)를 유감없이 행함은 물론 승상접하(承上接下)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 인근의 칭송이 자자하다.

3남 3녀를 두니 아들은 호일(浩一), 호이(浩二), 호인(浩寅)이며. 따님 원자(元子)는 해평 윤우진(海平 尹宇鎭)에게 출가하고, 형자(亨子)는 선산 임동복(善山 林東福)에게 출가하고, 의숙(義淑)이 있다.

씨의 호기념국당기(念菊堂記)를 이천 서인남(利川 徐仁楠)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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