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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식(柳埴)
 

류 식 柳  埴

 

<류 식 : 1766~1836 : 純祖朝 學行 大丞公 30世 : 祗候使公派>

 

자 원직 (元直). 호 아재(啞齋).

석헌 옥(石軒 沃)의 12대손이요, 수초당 현(遂初堂 俔)의 7대손이요, 환경(煥經)의 장자이며, 주부 나주임적화(主濤 羅州林迪夏)의 외손으로 영조(英祖) 42년 丙戌 2월 21일 창평 유곡(昌平 維谷)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세에 글을 배우는데 글 읽는 소리가 주옥(珠玉)같으므로 부친께서 기뻐하고 이르기를 『우리 집이 대대로 문학(文學)의 집안인데 계술(繼述)할 사람이 있도다. 』하시었다.

8세에 모친을 여의었는데 조석(朝夕)으로 전곡(奠哭)을 성인같이 행하고, 계모 최씨(繼母 崔)를 섬기는데 최씨가 성품이 엄중하여 조금도 용납이 없었으나 유독 공만은 칭찬을 아끼지 않고 종신토록 나무람이 없었다.

점점 장성함에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고 경전(經博)을 두루 읽었는데 특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열중하여 이르기를 『이 두 책은 체용(體用)을 구비하였으니 이것이 아니면 진덕(進德)의 기반을 이를 수 없다.』하였다.

순조(純組) 3년 癸亥(1803)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어버이께서 늙고 집이 가난하므로 오직 숙수(菽水)의 공양에 그 심력(心力)을 다하고 일찍 맹자(孟子)를 읽으면서 증자(曾子)의 양지(養志)에 이르러선 거듭 칭탄하여 마지 않았다.

14년 甲戌(1814)에 부친상을 당하여 슬픔을 다하고 상복(喪服)을 벗지 않았으며, 상중에 예서(禮書)를 읽어 손수 10여권을 기록, 집에 두고 항상 쓰도록 하였다.

평상시에 일찍 일어나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배알한 후 계모의 거처를 살피고 물러나 책상을 대하여 글 읽는 것으로 매일 일과를 삼았다.

21년 辛巳(1821)에 계모의 상을 당하여 때에 공의나이 56세로 늙었었지만 애훼(哀談)를 전상과 같이 행하였다.

헌종(憲宗) 2년 丙申 2월 3일 졸하니 향년 71세로 순창군 풍산면 함촌 안산(淳昌郡 豊山面 濫材 案山)에 모셔졌다.

공의 유고(遺稿)가 있는데 송사 기우만(松浴 奇宇萬)이 서문을 짓고, 아울러 공의 행장을 지었으며, 증손 창수(昌秀)가 묘비의 음기(陰記)를 지었다.

배위 연일정씨(延日鄭氏)는 생원 예환(生員 禮煥)의 따님인데 5남을 두고 헌종(憲宗) 11년 乙巳(1845) 6월 29일 향년 81세로 졸하니 고위(考位)와 쌍분으로 모셨다.

장자 승현(昇鉉)은 호 수졸재(守拙齋)인데 자품(資稟)이 순수하고 지조(志操)가 전아하였으며, 2자 택현(宅鉉)은 자품이 어질고 효우(孝友)가 지극했으며, 3자 순석(舜錫)은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이 찬(賃)에 이르기를 『자품이 아름답고 지조가 굳다.』하였으며 , 4자 우현(禹鉉)은 호 롱묵재(聾黙齋)인데 노사 기정진이 공의 유고(遺稿)의 서문에 이르기를『근약(謹約)으로 본분(本分)을 지키고, 효우(孝友)로 가법(家法)이 있었다.』하였으며, 5남 정현(鼎鉉)은 종사(宗事)를 관섭(管攝)하고 능히 보전하여 가성(家聲)을 이었다.

후손들이 담양군 창평면 유곡리(潭繼郡 昌平面 維谷里) ․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長城郡 北二面 白巖里)에 세거하고 있다.

※ 追先錄. 丙寅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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