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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병렬(柳秉烈)


류병렬
柳 秉 烈

<류병렬, 字 : 淵心, 號 : 樂汕 : 1899~1976, 漢學者, 貞肅公派 大丞公 32世>

수신재 사신(守愼齋 士信)루 11대손이요, 우파 근하(又坡 根河)의 장남으로 고종 36년 12월4일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도천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질이 특이하고 재예가 총명하여 일찍 조부에게 글을 익혀 13세에 문리(文理)를 거의 해득하였다. 부조(父祖)의 교훈을 독실히 익혀 시례(詩禮)의 가풍(家風)을 떨어뜨리지 않고, 때때로 향중 장덕(長德)을 쫒아 성경현전(聖經賢博)을 섭렵(涉獵)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렇듯 학문에 몰두하고 산업에 일체 뜻을 두지 않으므로 가세가 곤궁하여 의식(衣食)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으나 그로써 조금도 뜻을 겪지 않았다.

당시 왜정치하를 당하여 복장을 변경하고, 두발을 깎고, 성씨를 고치는 등 갖은 탄압과 협박을 강행하였으나 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항거 끝내 굴복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언론이 초직하고 지절(志節)이 강개함으로 왜인들은 물론 사우(士友)들도 그 기개(氣槪)에 모두 놀랐으며 꿋꿋한 애국심(愛國心)에 감화되어 항일 투쟁에 앞장선 의사(義士)가 향리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병인년(丙寅 : 1926)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 간행시에, 진천(鎭川)에 내려와 당시 나이 30미만으로 감인(監印)을 보았는데 정밀한 자의(字義)와 해박한 식견(識見)으로 소임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1941년 평산(平산)으로부터 가족을 거느리고 남하, 충주 천등산 밑 명암(明岩)으로 이거하였는데 본래 이곳은 조선 말엽, 유학자(儒學者) 성재 류중교(省齋 柳重敎), 의병장(義兵將) 의암 류인석(毅庵 柳麟錫)의 자손 및 그 문인(門人)들이 많이 살고 있어 공과는 학문의 연원(淵源)과 교류(交遊)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작은 초가에 거처하면서 항상 의관을 정제하고 책상을 대하여 오직 경전을 탐독, 심성 이기(心性 理氣)의 깊은 뜻을 궁구하는 한편, 사우들을 종유(從遊)하여 견문(見聞)을 넓히었다.

1949년에 이음 고을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 송선곡(陰城那 三成面 仙亭里 松仙谷)으로 이거하여 한결같이 학업에 열중하며 수신제가(修身齋家),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몸소 실천하고 자녀들에게 권면(勳勉)하여 마지않았다. 이같은 높은 학행이 널리 알려지자 원근의 학도들이 책을 짊어지고 와서 학업을 청하는 자 날로 더 함에, 후진 양성을 자기 직분으로 알고 각기 재질을 가려 근실히 가르쳤다.

공은 천성이 강직하여 정사(正邪)와 선악(善惡)의 분별을 한 칼로 베듯 하여 돌이킴이 없었고, 불의(不義)와 불선(不善)을 보면 반드시 정색하고 바른 말로 꾸짖어 조금도 굽히거나 용서함이 없었으므로 문하에서 성취한 문인(門人)이 많았다.

한편 퇴폐한 유도(儒道)를 쇄신하기 위하여 만년에는 음성에 소재한 운곡서원(雲谷書完)의 원임(院任)을 맡아 의절(儀節)을 관장하고, 향교(鄕校)에 출입하여 유림(儒林)선도에 전력하였다.

갑인년(甲寅年 : 1974)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편찬시에 문헌 교정(文獻 校正)에 노령(老齡)으로서 종사(宗事)에 최후의 정력을 기울였다.

1976년 6월11일 경기도 성남시 태평동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78세로 광주군 광주읍 중대리 공원묘지 상록 간좌(上麓 艮坐)에 장례를 모셨다.

배위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祭) 필선(必善)의 따님이요, 순천박씨(順天朴氏)는 기석(箕錫)의 따님이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재룡(在龍) ․ 재홍(在鴻) ․ 재경(在俓) ․ 재돈(著)이요, 딸은 한양 조준동(漢陽 趙濬東) ․ 전주 최종준(全州 崔鍾準)에게 출가 하였다.

광산 김용숙(光山 金容肅)이 공의 묘갈명(墓碣鎔)을 지었는데 명(銘)에 이르기를, 『문화류씨(文化柳氏)는 우리 동방에 드러난 성씨인데, 아름답다 공이시여 ! 선대의 가풍(家風)을 계술(繼述)하였도다. 진학(進學)에 용기가 있었고 수도(修道)에 지성이 있었도다. 몸가짐은 검약(儉約)을 위주하고 마음은 정직을 일관했도다. 존화양이(尊華攘夷)에 엄정하고 효친우제(孝親友弟)에 독실했도다. 아아 ! 공의 아름다운 행실을 신명(神明)은 가히 알리로다. 공을 알고자 할진대 빗돌에 새긴 명(銘)을 볼지어다. 』

공의 저술(著述)이 많아 1988년 여름에 「樂汕集」 2권이 간행되었다.

※ 遣槁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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