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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창현(柳 昌鉉)



류창현 柳 昌 鉉

<류창현, 字 : 文甫, 號 : 汎我 : 1885~1968, 天道敎 傅敎師, 獨立運動家, 貞肅公派 : 大丞公 34世>

관찰사 장(觀察使 章)의 후예로 자여도찰방 경엽(自如道察訪 景曄)의 11대손이요, 상렬(商烈)의 손이요, 재춘(在春)의 장자이며, 동래정기준(東萊鄭基準)의 외손으로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에서 태어났다.

천도교(天道敎)를 신봉하는 가문에서 태어나 일찌기 가정에서 한학(漢學)을 독실히 익히었다.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체결된후로 공의 부친께서 천도교 도로서 독립운동에 가담, 가산(家産)은 물론 종재(宗財)까지 독립운동자금으로 바치고, 드디어는 면세(面稅)를 거두어 바쳤다가 그 사건이 발각되어 공금유용죄로 충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에 공께서 조선인 관리와 변호사를 찾아 30여회를 왕래하면서 그 억울함을 호소하여 드디어 부친께서 옥고 3개월 만에 출옥하게 되었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언변이 쾌활하여 향리의 추중을 받더니 역시 천도교에 입교하여 인내천(人乃天)을 생활화하면서 포교(布敎)에 전심, 1920년 12월에 옥천군교구공선원(沃川郡敎區共宣員)에 임명되고, 1924년 5월에는 옥천교회 전교사(傳敎師)로서 경리부간사에 임명 되었다.

이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옥천은 물론 대전 ․ 영동 ․ 무주까지 교인(敎人)들을 찾아다니며 성금을 모아 천도교연합회로 송금하다가 왜경의 탄압에 못이겨 교인 200여명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쫒겨 났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굴하지 않고 활동하다가 일인(日人)에게 발각되어 부득히 귀향 하였다.

일제 말엽에 이르러서도 천도교연합회의 지령을 받고 왜경의 집요한 감시 속에 성금을 모아 보내다가 광복(光復)이 되자 30여 동민(洞民)과 함께 마을 앞산에 올라 만세를 부르며 조국 광복의 기쁨을 맞았다.

이에 앞서 용바우보(龍岩洑)를 설치함에 즈음하여 송씨(宋氏)로 더불어 이해관계로 공주재판소에서 채판이 걸렸는데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마침내 승소(勝訴)하여 류씨(柳氏) 문내의 정답을 옥토로 전환시켰으며 위선(爲先)사업에 헌신적인 노력을 다하여 선세의 제향 참석은 물론 옥천 종중의 위토(位主)를 마련하고, 파보(派譜)를 편찬하는 등 공적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또 존현(尊賢)의 성의가 순독하여 공주의 삼현각(三賢閣) 및,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선생의 동상 건립에 참여하고,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선생 추모회의 임원으로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84세의 고령으로 1968년 11월4일 별세하시었다.

배위 진주강씨(晋州姜氏)는 만선(萬先)의 따님으로 4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제억(濟億) ․ 제홍(濟洪) ․ 제호(濟浩) ․ 제구(濟求)이며, 사위는 해주 오학선(海州 吳學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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