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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형국(柳亨國 )
 

류 형 국 柳  亨  國

 

<류형국 : I596~1670 : 孝宗刻 學行 大丞公 22世 : 祇候使公派>

 

자 경오(慶吾). 호 봉황정(鳳凰亭)

오촌 기문(梧村 起門)의 장남으로 선조(宣祖) 29년 申에 연기(燕岐)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유명(遺命)으로 과거 공부를 폐하고 인조(仁祖) 14년 丙子(1636) 호란(胡亂)에 동지10인으로 더불어 창의(倡義), 북상도중에 화전(和戰)이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 파병 (籠兵)한 후 군량을 관청에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만년에 동진강(東津江)위에 정자를 지어 봉황정(鳳凰亭)이라 이름하고 친붕(親朋)으로 더불어 시주(詩酒)로써 스스로 즐기니 이름난 관리들이 제영(題詠)하여 당세에 명망을 떨치었고 수창록(酬唱錄)이전하고 있다.

효종(孝宗) 2년 辛卯(1651)에 나라에서 의금부도사(義禁莩事)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초야(草野)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5세로 연기군 남면 둔덕산(燕岐郡 南面 屯德山)아래 시목동 자좌(杮木洞 子坐)에 장례를 모시었다.

배위 해주최씨(海州 崔氏)는 창랑 준(滄浪 濬)의 따님인데, 효우(孝友)의 행실은 물론 유순한 덕이있어 시부모를 잘 섬기고 뜻을 순종하며, 시누이를 대함에 골육(骨肉)과 같이 하고 비복(婢僕)을 부리되 은혜와 위엄이 겸하여 집안이 엄숙하고 정연하였다. 인조(仁祖)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경성(京城)의 사촌 오라버니 감사 최공(監司 崔公)의 집에 있다가 난리를 만나 최공(崔公)을 따라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갔는데 드리어 성(城)이 함락되어 위금하게 되자, 입고 있던 홑저고리에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血書)를 써서 부군(夫君)의 집에 보냈다. 그 혈서에 이르기를 "성이 이미 함락되어 형세가 어쩔수 없으니 이 옷으로 나를 장사하기 바란다"하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으니 때는 T丑(1637)딘 정월25일로 나이 겨우 38세였다 이에 혈서가 씌어진 옷으로 초혼(招魂)하여 부군 묘소곁에 합부하였다. 후인(後人)이그 절의(節義)를 감모하여 시를 지어 이르기를

『난리에 임하여 몸을 던졌으니

  열열한 절의가 어기지 않았도다.

  만고에 강화성 위의 저 달은

  지금도 오히려 혈의(血衣)를 비추누나,』

후배 여흥민씨(後配 賤興閔氏)는 당(戇)의 따님인데 역시 부군 묘소에 합부하였다.

자녀를 두지 못하여 공의 종형 창국(從兄 昌國)의 2자 세장(世檣)을 맞아 계자하였다.

세장(世檣)은 풍채가 훌륭하고 충효(忠孝)의 천성을 타고 났었다. 선비(先妣)께서 전란에 돌아가심을 애통히 여기는 한편 국가에서 치욕(恥辱)을 당한것을 통분히 여기고 복수할 뜻으로 무술(武術)을 익혀 마침내 효종(孝宗) 2년 幸卯(1651)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익공 이 완(貞翼公 李 流)의 천거로 선전관(宣傅官)에 제수되었다가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에 이르렀더니 10년 己亥(1659)에 효종께서 승하(昇遐 )하신 후 벼슬을 그만 두고 자정(自堉)하였다.

※ 鎭川. 燕嶋邑誌. 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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