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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치진(柳致眞)

 

류치진(柳致眞)


1905년∼1974년. 극작가 겸 연출가. 호는 동랑(東朗). 경상남도 통영 출신. 아버지 준수(焌秀)는 한약방을 경영하였고, 동생 치환(致環)은 시인이다.

1914년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하였다.
그뒤 부산우편국 부설 체신기술양성소에 입소하여 6개월간의 교육을 마친 뒤 귀향하여 통영우체국 사무원이 되었다.
3·1운동 이후 일어난 교육열의 영향으로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중학교(豊山中學校) 2학년에 편입하여 1925년에 졸업하고, 다음해 릿쿄대학(立敎大學)영문과에 입학하여 1931년에 졸업하였다

.롤랑(Roland, R.)의 〈민중예술론〉을 읽고 연극에 뜻을 두고 귀국, 해외문학파(海外文學派)동인들과 함께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약칭 극연)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신극운동을 벌였다.
극연을 주도하면서 극작·연출 등을 주로 맡았다.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극연이 해산된 이후, 1941년에는 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을 조직하여 〈흑룡강 黑龍江〉(1941)·〈북진대 北進隊〉(1942)·〈대추나무〉(1942)같은 어용극을 직접 쓰기도 하면서 총독부의 지시에 따른 연극을 주도하였다.

광복 이후 잠시 침묵하다가 1947년 봄부터 연극계 전면에 나타나 좌익연극과 대결하여 우익민족극을 주도하였다.
이해랑(李海浪) 등을 내세워 극단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를 조직하였고, 한국무대예술원을 창설하여 초대원장(1947)이 되었다.
1950년에 국립극장이 창설되자 초대극장장에 취임하였고, 자작극 〈원술랑 元述郞〉으로 개관기념공연을 가졌다.

6·25남침 때에는 은거하면서 희곡창작에만 전년하였다.
1958년부터는 국제연극협회(ITI) 한국본부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국제회의에 자주 참가하였고, 1960년에는 동국대학교 연극학과 창설과 드라마센터건립공사에 전념하였다.
1962년 드라마센터가 완공되자 초대소장으로 취임하여 연극진흥에 힘썼다.
그러나 드라마센터가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되자, 인재양성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1962년부터 드라마센터에 부설 연극아카데미를 설치하여 배우·연출가·극작가 등의 양성에 힘썼는데, 이것은 몇 년 뒤 연극학교로, 다시 예술전문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식민지수탈과 민족의 궁핍화과정을 사실주의수법으로 그렸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하여지자 역사극과 낭만주의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주로 애정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쓰는 등 현실도피를 꾀하였다.광복 이후에는 주로 분단문제와 공산주의비판, 전쟁의 참혹상 등을 주제로 한 민족주의적 리얼리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주요희곡작품은 데뷔작 〈토막 土幕〉(1932)·〈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1933)·〈빈민가〉(1934)·〈소〉(1934)·〈마의태자〉(1937)·〈제사〉(1938)·〈조국〉(1946)·〈자명고〉(1947)·〈별〉(1948)·〈장벽〉(1950)·〈가야금〉(1952)·〈처용의 노래〉(1953)·〈푸른 성인〉(1954)·〈청춘은 조국과 더불어〉(1955)·〈한강은 흐른다〉(1958) 등이다.

시나리오로는 〈철조망〉(1953)·〈논개〉(1957)·〈단종애사〉(1957)·〈개화전야〉(1958) 등이 있다. 연극계에 끼친 공로로 예술원상, 문화훈장, 5월문예상, 3·1연극상 등을 수상하였다.저서로 《유치진희곡전집》 상·하권과 《동랑자서전》, 그리고 많은 연극관계 논문을 남겼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리얼리즘 희곡작가로서, 역사극의 장르를 개척한 극작가이며, 극작·연출·연극비평·연극교육·연극행정 등 연극전반에 걸쳐 활동한 근대연극사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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