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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고려 대승 문화(신도비 판독 편집)---퍼가기를 불허합니다.


上 : 남병철이 찬한 것으로 1863년에 건립----신도비 갓이 있는것

주 : 2008년 류릉을 찾은 일행이 비디오로 내리 급히 촬영한 것을 부분 stop 사진으로 조심스럽게 수십장으로 촬영하여 일주일 이상 조합한 사진으로 만든 대승공신도비 이미지입니다.

언젠가는 정확한 전체사진과 탁본 작업이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柳志世 구성 


下 : 이용원이 찬한 것으로 1911년에 건립----신도비의 갓이 없는 것

참고= 4~5m 간격으로 두개의 신도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대승 문화(신도비 판독 편집)


上 : 대승공 신도비(갓 있음)문을 찬한 사람인 것으로 알려진   남병철(南秉哲)은 누구인가?---柳志世 옯김 



남병철(南秉哲)에 대하여

1817년(순조 17)∼1863년(철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표적인 천문학자·수학자. 본관은 의령. 자는 자명(字明) 또는 원명(元明), 호는 규재(圭齋)·강설(絳雪)·구당(鷗堂)·계당(桂堂). 시호 문정(文貞)


남유상(南有常)의 증손이고, 판관 구순(久淳)의 아들, 철종의 장인 김문근(金汶根)의 외질이며, 병길(秉吉)의 형이다.


1837년(현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에 합격하였다. 김문근의 총애를 받았으며, 박학다식하고 문장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수학에 뛰어나 수륜지구의(水輪地球儀)와 사시의(四時儀)를 제작하였다.


1851년(철종 2)에 승지가 되고 이어서 예조판서·대제학에 올랐으며, 관상감제조도 겸하였다.


철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분격하여, 그 일파를 눌러보았으나 도리어 그들에게 억압당하여 나중에는 글씨와 그림 및 성색(聲色)으로 소일하고 지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해경세초해 海鏡細草解》·《의기집설 儀器輯說》·《성요 星要》·《추보속해 推步續解》·《규재유고 圭齋遺稿》 등이 있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대표명 남병철(南秉哲)

성명 남병철(南秉哲) , 남병철(南秉喆) 

성명 : "남병철(南秉哲)"에 대한 용례전거 용례

文蔭陞資錄v1 吏曹判書南秉哲己未十月十三日祔廟及尊崇都監提調大王大妃殿玉冊文製述官

文蔭陞資錄v1 左參贊南秉哲丁巳十二月二十四日廟號都監提調及追上尊號都監提調

文蔭陞資錄v1 工曹判書南秉哲丁巳三月二十日進饌所堂上

文蔭陞資錄v1 行護軍南秉哲丙辰五月十五日都摠管除授

文蔭陞資錄v1 行副護軍南秉哲壬子二月十四日上冊寶時及陳賀時禮房承旨

東國續修文獻錄v1 哲宗朝南秉哲圭齋宜寧人吏判趙斗淳見相徐箕淳仲裘榮輔子三世典金尙鉉經臺光山人吏判

東國續修文獻錄v1 淳子安東人承旨金炳韶判書蓍根子安東人承旨金左根景隱荷屋國舅祖淳子安東人左相徐有薰翰林淇修子大邱人判書南秉哲圭齋庶尹久淳子宜寧人吏判李㘾弘夫吏判光文子牛峯人判敦趙秉龜國舅萬永子豐壤人吏判忠貞趙秉鉉吏判得永子豐


남병철묘갈(南秉哲墓碣)

이 비는 1864년(고종 1년)에 건립된 남병철묘갈(南秉哲墓碣)로 김병기(金炳冀)가 비문을 지었고, 신석희(申錫禧)가 글씨를 썼다.

남병철(南秉哲, 1817~1863년)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자명(子明), 호는 규재(圭齋)이다. 1837년(헌종 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예조판서, 대제학 등 최고의 요직만을 역임하였다. 박학하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수학과 천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어 지구의를 만들고, 추보속해(推步續解)를 남겼다. 비문에는 공의 관직과 세계, 공적들이 잘 나타나 있다.

현재 탁본은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김조순신도비(金祖淳神道碑

이 비는 1860년(철종 11년) 경기도 이천에 건립된 김조순신도비(金祖淳神道碑)로 당시 국왕이었던 철종(哲宗)이 직접 비문을 지었고, 남병철(南秉哲)이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액도 하였다.

김조순(金祖淳, 1765~1832년)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사원(士源)이며, 호는 풍고(楓皐)이다. 1785년(정조 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 ·규장각대교를 거쳐 1792년(정조 16년)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직각(直閣) ·이조참의(吏曹參議) ·승지(承旨) ·총융사(摠戎使)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등을 지냈다. 1802년(순조 2년) 딸이 순조(純祖)의 비(妃)로 책봉되자,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작을 여는 인물이고, 시호는 충문(忠文)이며, 문집으로는 풍고집(楓皐集)이 남아있다.

현재 탁본은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下 : 대승공 신도비(갓 없음)문를 찬한 사람으로 알려진 이용원(李容元)은 누구인가? ----柳志世 옮김


 

이용원(李容元)에 대하여


1833년(순조 33)~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경춘(景春). 본관은 전주(全州). 부친은 이병은(李秉殷), 생부는 이병식(李秉植), 조부는 이헌위(李憲瑋)이다.


현감을 지낸 뒤, 1875년(고종 12)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동부승지·대사간이 되었다.


1876년 우부승지 서정순(徐正淳)과 함께 동부승지로서 최익현(崔益鉉)의 흑산도 안치를 해제해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882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성균관대사성을 지냈다.


1883년 형조판서를 지냈고, 1889년 대사간·대사헌을 지냈다.


1890년 예조참판으로서 민씨척족들의 고종 왕위선양(王位禪讓)모의를 항의하다가 찬배(竄配)당하였다가, 1894년 정치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정치범을 석방할 때 흑산도에서 풀려났다.


그뒤 이조판서와 법무아문대신, 우찬성을 지냈으며, 1896년 경연원경 겸 왕태자궁일강관(經筵院卿 兼 王太子宮日講官)에 임명되었다.


1897년 중추원일등의관을 지냈고, 1902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으며, 보국특진관(輔國特進官)에 올랐다.


1905년 최익현이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疎)를 올리고 거의를 준비할 때 그에게도 창의구국의 글이 보내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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