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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문양부원군(류자신) 묘역및 신도비(朗惠 柳志世 제공)


上:문양부원군(류자신)묘역---경기도 시흥시 능곡동 산32 

下:문양부원군 신도비----------경기도 시흥시 능곡동 산33

촬영:13世孫 朗惠 柳志世


柳自新 神道碑文


有明朝鮮國贈竭忠盡韶德賛謨佐運衛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文陽府院君行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文陽府院君贈謚公柳公神道碑銘并序上即位之五年領敦寧府事文陽府院君柳公卒于好賢坊私第訃聞上震悼輟視朝三日自歛殯至葬皆官庀用一等禮禮官率禮吊祭之外上特遣中使護喪致吊致祭中殿亦如之東宮臨哭自我朝以來居國舅之重夫婦偕老子孫昌而顯福祿俱隆哀榮兩至未有盛於公者是歲四月二十七日葬于安山郡西廣谷里先墓下寅坐申向之原從治命也旣葬公之諸子斬然憂服之中未能來請使公第二子文原之子信立持家乘抵于根曰先友在世秉筆者惟公一人敢以墓道之碑相託噫根登從賢季游受知最久義不可以孤陋辭第念公以達尊法宜謚有謚而後宜有銘以是遲之癸丑春追第公衛聖之功爲元勳贈竭忠盡韶德賛謨佐運十字六號加贈大匡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文昌諸公速銘曰碑己具乃序而銘六公諱自新字止彥系出文化麗代大丞車達即鼻祖也有諱悌根軍器寺僉正贈吏曺判書曾祖考也諱壽千敦寧府正贈議政府左賛成祖考也是生諱潜工曺判書贈議政府領議政公之考也推恩三世皆以公貴妣河東鄭氏贈貞敬夫人河東府院君麟趾曾孫女贈戶曺叅判承廉之女也嘉靖辛丑十二月壬子生公公早登靜存李大司諫湛之門爲一時軰流所推許中甲子進士乙丑文定之喪議政公膺守泰陵之命明廟下敎曰守陵官身有疾病其以子爲陵叅奉使看護其父公因是口命始入官丁卯服闋復命爲敦寧府直長己已遷內資寺主簿轉掌苑署掌苑出掌平康縣辛未以事解任爲司果壬申陞戶曺佐郎遷刑曺正郎乙亥春爲金縣浦令丙子冬丁外艱廬墓三年己卯授刑曺正郎拜金堤郡守以慈親年七十辭遞施授漢城府判官陞濟用監僉正拜楊根郡守幸已冬遞還壬午授尙衣院判官癸未轉司宰監僉正乙酉移掌樂院僉正兼內乘丁亥三月宣祖以公第三女選爲王子君夫人即當代王妃也是年夏季丁內艱執禮猶前喪己丑秋授京兆判官是冬特除安岳縣監是時逆變起于是縣故有是命言者爭特命請寢之聖批以爲才器可合濆許赴任庚寅捕獲本縣齋逆類先朝嘉之命授通政階仍莅是邑特移廣州牧使壬辰之變兇鋒將逼畿甸觀察使權徵委公上流淺灘防守公領衆方赴灘上四月晦車駕將西幸冊上爲王世子夫人陞世子嬪宜祖下敎于都承旨李恒福曰廣州牧使柳自新遞任使扈從蒼黃之際未遑奉旨及到松都始行會于觀察使因道挭經旬始達公聞命即赴冒萬死追及箕壤行在拜敦寧莩正宣祖命公陪東宮奉廟社東還跋涉關東諸路是冬衛王世子駐成川府宣祖在龍灣特命陞公嘉善階同知敦寧府事癸已大駕東宮偕駐永柔縣是夏授春川都護府使將之任相臣尹斗壽啓于榻前曰當此播越之日東宮陪衛不可無親之之臣請勿許補外宣祖從之遞授同知敦寧府事秋拜成川都護府使乙未授護軍轉漢城府右尹兼都摠府副摠管丁酉冬拜資憲漢城府判尹兼都摠管戊戌王世子嬪誕生元孫己亥春拜開城府留守辛丑拜知敦寧府事戊申二月聖上嗣服踐祚嬪冊封王妃元孫冊爲王世子例陞公爲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院君自是盛滿是懼謙恭彌篤杜門謝客若無意於世間事其心未嘗不以時政得失賢邪進退爲憂喜我朝舊䂓年七十爵正二品以上稱耆老所堂上春秋設宴賜樂遣中使承宣宣醞庚戌秋公以年七十與是會賜樂宣醞一如故事世以爲榮是年王世子受封于天朝辛險公遘疾壬子二月七日遂下起享年七十有二公幼而端重長益醇謹律己則嚴接物以和素性恬靜無所玩好惟以圖書爲長物留心經史至老不釋如見古人嘉言善行必令諸子書紳而取法焉居家奉職動遵法式衣服飮食每戒靡麗雖至極貴猶不替韋布之志大夫人寡居十有餘年愉色婉容盡其誠意左右奉養得其歡心議政公有副室年少無兒議政捐館舍之後公事之如初副室感德守節益謹年垂几袤終于門下友一弟最篤連床共被每欲與之同居或綠仕宦相離則輒嗟惜不能已待故舊毋棄貧賤恤宗族無問親疏如有抱才不售者必欲吹噓窮病婚喪竭力相救人皆愛戴如其父兄晚年恒感祝聖恩南湖有一區之亭扁曰泳恩嘗自製感君恩詞七闋居常對洒必令侍者詠歌之其不忘君恩如此疾革每遇御醫承命來診輒泣而辭之曰聖恩至此感激罔極顧念老臣無過人才與德而年至寵極子孫多在顯列人事盡矣盈虛替代之數何可獨免不須服藥求生諸子勸進藥餌或有少効則必垂涕哽塞曰我蒙國恩醫藥備至追念先君易簀時疾頗類余今曰之病而其時吾兄弟年少力微用藥不能如救我之亐憾終天之痛到此益切云其追慕之誠聞者莫不感動夫人東萊鄭氏號蓬原府夫人左議政惟吉之女文翼公光弼實會祖考也嘉靖甲寅歸于公時公年十四議政公頗重之指以爲玉潤議政公於丁卯妊極副使朝京師議政胤子右議政蓬萊府院君昌衍纔成童議政公在燕京寄書云凡事薰灸于公可以成人其取重如此生六男四女男長希鏗成均進士早逝次希聃行判決事文原君次希奮即文昌府院君兼兵曺判書次希發吏曹叅議次希亮京畿觀察使次希安司僕寺判官女長適漢城府左尹漢昌君趙國弼次適兵曹正郎李德一次即王妃殿下次適殷栗縣監金時輔進士娶宗室箕城君俔之女生二男一女男長孝立世子侍講院弼善承重服公之喪次忠立議政府舍人女適平康縣監朴安鼎文原娶承文院判校尹晛之女生一男一女男信立今改鼎立工曹佐郎女年十三以處子隨外家在大丘府任所遭壬辰賊之女生二變節死癸已春朝廷旌表文昌娶光陵叅奉成礩之女生二男四女男長正立生員次命立女長適戶曹叅議趙有道次適四山監役慶有後次適翊衛司洗馬崔蘤次適翊衛司副率曺實久叅議娶富平府使沈信謙男一女男長時立翊衛司洗馬次中立生員女適司諫院正言金世濂後娶社稷令朴綵之女生五男一女男長有立次顯立次英立次昌立次漢立女適士人李袤觀察使娶忠義衛具思誠之女生一男三女男斗立進士女長適四山監役李敏樹次適士人沈翊次適士人吳世獻判官娶都事鄭廓之女生一女適成均進士尹商美後娶監察丁好誠之女漢昌生一男弘文舘修撰趙裕善正郎生四男二女男表進士李厚載次李弘載次李尙載女長適士人申櫛次適四山監役柳之豪殷栗生四男二女男長金振聲女長適禮曹佐郎奇俊格餘皆幼弼善娶大司憲丁胤福之女生四男七女男長宗善諸曾孫不能盡載文昌庶子男長益立進士次福立次厚立次偉立女適學生尹善行銘曰維公愷悌維德之基公有儁才屢屈有司我朝用人或有所拘不由科第鮮達亨衢公所踐履庶僚州縣人或尼之天固佑善餘慶果大於身親見恭惟聖女正位中殿夙誕元良主鬯春宮任姒鄧馬不啻此隆巍乎母儀本之家法公即謙謙不危不溢有子若婿繼圖麒麟種德流芳赫赫振振詩書所稱蔑以加之我銘在石庶其昭垂

▨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忠奮義丙幾翼社功臣輔國崇祿大夫晋原府院君 柳  根 撰

▨通 政 大 夫 兵 曹 叅 議 知 製 敎 吳  靖 書

▨ 崇 政 大 夫 行 知 中 樞 府 事 金尙容 篆

萬曆 四十五年十一月 日

西紀 1617年 11月  日 立




류자신 신도비문


유명조선국증갈충진성동덕찬모좌운위성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문양부원군 행보국숭록대부영돈녕부사 문양부원군 증시 공유공 신도비명 병서상께서 즉위하신오년만에 영돈녕부사 문양부원군 유공이 호현방의 사제에서 돌아가셨다. 상께서 부음을 들으시고는 슬피 애도하여 삼일 동안 조회를 거두었으며, 손수 빈소를 점검하고 장례에 이르기까지 드는 비용을 관비로 하게하고, 일등의 예우로써 예관으로 하여금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게 하는 이외에 특별히 환관을 보내어 호상하여 조문과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중전 역시 이와 같이 하였고, 동궁은 가서 곡을 하였다.

우리 조정이 생긴 이래 국구의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 부부가 해로하고 자손의 번성함이 현저하며, 복과 녹이 함께 융성하여 슬픔과 영화가 공보다 더한 분은 아직 없었다. 이해 4월 27일에 안산군의 서쪽 광곡리 선영 아래에 인좌신향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공의 유명을 따른 것이다.

장례를 마치고 나서 공의 여러 아들들은 상복을 입은 우복중이라, 능히 와서 부탁하지 못하고 공의 둘째 아들 문원(文原)이 아들 신립(信立)을 시켜 가승(집안의 기록)을 가지고 나를 찾아보게 하였다. 신립이 말하기를“선조고의 벗 중에서 글을 써 주실 분은 오직 공 한 분이니 감히 묘도비의 글을 부탁합니다.”라고 하였다. 아! 내가 공의 어진 아우를 따라 교유하면서 공에 대하여 아는 바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의리상 어찌 내가 견문이 좁고 학식이 천박하다 하여 이를 사양하겠는가? 생각하건대 공은 존귀한 지위에 오른 분으로 법에 따라 마땅히 증시가 있어야 하고 시호가 내려진 후에 명이 있어야 옳으므로 이처럼 미루어 온 것이다.

계축년 봄에 임금을 호위한 공이 크다 하여 공을 원훈에 추급 책봉하였고 갈충진성동덕찬모좌운이라는 열자의 호를 내리고 대광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를 더하여 추증하였다. 문창과 여러 공이 명을 부탁하여 말하기를 비문은 이미 갖추어졌다하므로 서에 이어 명을 짓는다.

공의 휘는 자신(自身)이요, 자는 지언(止彦)이다, 문화 유씨의 계출이니, 고려 때 대승인 차달(車達)이 곧 비조이다.

군기시첨정을 이조판서에 추증된 휘 제근(悌根)은 공에게 증조고이고, 돈녕부정으로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휘 수천(壽千)은 조고가 된다. 이 분에게서 태어난 휘 잠(潛)은 공조판서를 지내고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부친이시다. 삼대가 추은된 것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된 까닭이다. 어머니 하동정씨는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는데, 하동부원군 인지(麟趾)의 증손녀로 호조참판으로 추증된 승렴(承廉)의 따님이다. 가정 신축 12월 임자일에 공을 낳으니, 공은 일찍이 대사간 정존 이담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그 무리들 중에서 가장 추앙을 받았다. 갑자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을축에 문정공의 상을 당하였다. 이때 의정공이 태릉 수직의 장으로 있었는데 명종께서 하교하시기를 “능을 지키는 관리가 몸에 질병이 있으면 그 아들로써 능참봉을 삼아 그 아버지를 대행케 하라.”라고 하였다. 공은 이로 인하여 비로소 관직에 들어갔다.

정묘에 복을 마치고 다시 돈녕부직장에 임명되었다. 기사에 내자시주부로 옮기었고 이어 장원서장원에 전임되었다가 평강현으로 나갔다. 신미에 해임되었다가 사과에 임명되었다. 임신에 호조좌랑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형조정랑으로 전임되었다. 을해년 봄에 김포현령이 되었고, 병자 겨울에 부친상을 당하여 삼 년간 묘막살이를 하였다.

기묘에 형조정랑을 제수하고 이어 김제 군수에 배수되었으나 어머님 연세가 일흔을 넘었다 하여 사양하니 한성부판관으로 바꾸어 제수되었다. 또 제용감첨정으로 승진하였고, 양근 군수에 제배되었다가, 신사 겨울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임오에 상의원판관에 제수되고 계미에 사재감첨정으로 전임되었다가 을유에 장악원첨정으로 옮겨 내승을 겸임하였다.

정해 삼월에 선조께서 공의 셋째 따님을 뽑아 왕자군의 부인으로 삼으니 즉 당대의 왕비이다. 그해 여름에 모친상을 당하여 집례하기를 앞의 부친상 때 같이 하였다.

기축년 가을에 경조판관에 제수되고 그해 겨울에는 안악현감에 특별히 제수되었는데, 이때 이 고을에서 역변이 일어났기 때문에 언관들이 다투어 특명으로 쉬게할 것을 청하니 임금께서 비답하되 “재주와 기량이 가히 적합하니 부임토록 하라”라고 명하셨다. 경인년 봄에 안악현에 도망하여 숨어 있던 역적 무리들을 체포하니 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통정대부의 품계를 제수하고 그 고을에 잉임 하도록 하다가 특별히 광주목사에 옮겨주셨다.

임진년 왜란에 적의 에봉이 장차 기전에 육박하게 되므로 관찰사 권징이 공에게 한강 상류 여울의 방어를 맡기매 공이 무리를 거느리고 상류 여울의 위쪽으로 부임하였다. 그해 사월 그믐날 임금을 태운 수레가 장차 서쪽으로 행차 할새 광해군을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고, 부인을 세자빈으로 승격시켰다. 선조께서 도승지 이항복에게 하교하여 이르기를 “광주목사 유자신을 체임시키어 호종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창황한 나머지 미처 그 교지를 받들어 시행하지 못하다가 송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찰사에게 지시되었는데 길이 어긋나서 열흘이 되어서야 공에게 전달되었다. 명을 듣자마자 만사를 무릅쓰고 어가를 뒤쫓아 평양의 행재소에 도착하니 돈녕부도정을 제배하였다.

선조께서 공에게 명하시기를“동궁을 배종하여 종묘사직을 받들라.”라고 하셨다. 이에 동쪽으로 돌아가 관동의 여러 길을 두루 걸어 그해 겨울에 왕세자를 호위하고 성천부에 머물렀다. 선조가 용만에 계시면서 공을 가선대부의 품계로 올리도록 특명을 내리고 동지돈녕부사에 임명하였다. 계사년에 임금과 동궁이 모두 영유현에 머물렀는데, 이해 여름에 공을 춘천도호부사에 제수하여 장차 부임하려 하는데 상신 윤두수가 탑전(임금 집무 의자)에 계를 올려 말하기를“피난 때를 당하여 동궁을 모시는 일은 친함이 없는 신하는 아니 되는 일이니, 청컨대 외직에 보임하지 마소서.”라고 하니, 선조께서 이를 쫓아 체직시키어 동지돈녕부사에 임명하고 가을에 성천도호부사에 배수하였다.

을미년에 호군에 제수되고 한성부우윤에 전임되어 도총부부총관을 겸하게 하였다. 정유년 겨울에 자헌대부 한성부판윤겸도총관에 제배되었고, 무술년에 왕세자빈께서 원손을 낳으셨다. 기해년 봄에 개성부유수에 제배되었고, 신축년에는 지돈녕부사에 제배되었다.

무신년 이월에 세자께서 성상을 이어 왕위에 즉위하였고, 빈은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원손은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공은 관례대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원군으로 승진하였다. 이로부터 가문이 너무 번영함을 두려워하고, 겸양하기를 더욱 돈독히 하여 대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세간사에는 뜻이 없고 그 마음은 단지 시정의 득실과 현사의 진퇴에 근심과 기쁨을 삼았을 뿐이다.

우리 조정의 옛 규례에 나이 일흔이고 관직이 정이품 이상이면 기로소당상이라 칭하고 봄과 가을에 잔치를 베풀어 악공을 보내고 내관을 보내어 어주를 베풀었었다. 경술년 가을에 공이 나이가 일흔이 되니 이 연회를 가져 풍악과 어주를 내려 옛일과 같이 하니 세상에서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이해에 왕세자 책봉이 천조로부터 인정되었다.

신해년 겨울에 공이 병이 들어 임자년 2월 7일 마침내 돌아가시니 향년 일흔둘이라.

공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중후하였으며 자라서는 더욱 성품이 어질고 신중하여 자신을 다스리는 데 엄격하였고, 타인을 접할 때에는 온화하게 하였다. 성품이 본래부터 고요하여 별로 좋아하는 것이 없었고 오로지 도서만을 유일한 취미로 남아 평생토록 하였다. 경서와 사기에 마음을 두어 늙도록 책을 놓지 않았고 고인의 좋은 말씀과 선행을 보게 되면 반드시 여러 자식들로 하여금 이를 기록하여 본받도록 하였다. 가정에 있어서나 관직에 있어서나 법을 지킴에 어김이 없고 의복과 음식에 있어서는 항상 사치하고 화려함을 경계하여, 비록 존귀한 지위에 있었으나 선비로서의 본연의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어머님이 혼자 되신 지 십여 년을 한결같이 기쁜 안색과 유순하고 온화한 몸가짐으로 정성을 다하여 좌우에서 봉양하니 모친께서 흡족해 하셨다. 의정공이 측실을 두셨는데 나이가 젊었고 자식이 없었다. 의정공이 돌아가신 후에도 공이 섬기기를 처음과 같이 하니 측실도 공의 덕행에 감동하여 수절하고 더욱 삼가하여 나이 여든에 문중에서 생을 마쳤다.

아우 하나가 있어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자리와 이불을 같이하였고 매양 같이 동거하고자 하였다. 혹 벼슬에 나가 서로 떨어지게 되면 애닲아 하고 안타까워 마지않았다. 친구를 대접함에는 가난하다고 하여 버리는 일이 없었고 문중의 구휼에는 가깝고 먼 것을 가리지 않았다. 포부와 재능이 있으면서 크지 못한 사람을 적극 장점을 들어 추천하였고 궁병과 혼상에는 힘을 다하여 도와주니 사람들은 모두 공을 존경하기를 부형과 같이 대하였다.

만년에는 항상 성은에 감축되어 남쪽 연못 한 모퉁이에 정자를 짓고 편액을 영은정이라 하였다. 일찍이『감군은사칠결』을 스스로 지어 놓고 늘 술을 대하게 되면 반드시 시종으로 하여금 이를 읊게 하였으니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기가 이와 같았다.

병이 들어 어의가 매번 왕명을 받들어 진료차 오면 울면서 사양하여 말하기를“성은이 지나치니 감격하고 망극하옵니다. 돌이켜보건대 노신이 남보다 뛰어난 재주나 덕행도 없으면서도 나이가 들수록 총애는 더욱 지극함에 이르고, 자손들도 많이 현달한 반열에 들어갔으니 이로써 인사는 다했다고 봅니다. 충만함과 공허함은 서로 번갈아 대신하는 것이 온데 수를 어찌 홀로 면하겠습니까?”하고 약을 복용하여 살기를 구하지 아니 하였다. 여러 자손들이 약을 드시기를 권하여 혹 작은 효험이라도 있으면 공은 눈물을 흘리면서 목이 메어 말하기를“내가 나라의 은혜를 입어 의약이 갖추어져 왔는데, 옛날을 생각해 보면 선친이 돌아가실 때의 병환이 지금 나의 병과 같은 것이었는데, 그 때에는 우리 형제들이 나이가 어려 힘이 모자라 약을 쓰지 못해 나의 구병과 같이 하지 못한 한없는 통한이 지금이 와서 더욱 간절하구나.”라고 하였으니 그 추모하는 정성은 듣는 자마다 감동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인은 동래 정씨로 택호는 봉원부부인이고 좌의정 유길(惟吉)의 따님이니, 문익공 광필(光弼)은 증조고가 된다. 가정 갑인년에 공에게 시집오니 그때 공의 나이 열넷이었다. 의정공이 매우 애중히 하여 옥윤(玉潤)이라 하였다. 의정공이 정묘년에 선조의 등극을 알리는 연행부사로 연경에 가서 조회할 제 의정공의 맏아들 우의정 봉래부원군 창연(昌衍)이 그 때 겨우 성동인 15세였는지라, 의정공이 연경에 있으면서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범사에 있어서 공에게 교화 받으면 가히 사람이 되리라.”하였으니 그 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다.

육남 사녀를 낳았는데, 장남 희갱(希鏗)은 성균 진사였으나 일찍 죽었고, 둘째는 희담(希聃)으로 행판결사인 문원군이다. 셋째는 희분(希奮)으로 즉 문창부원군 겸병조판서이고, 넷째는 희발(希發)로 이조참의이며, 그 다음은 희량(希亮)으로 경기도관찰사이고, 막내 희안(希安)은 사복시판관이다. 맏딸은 한성부좌윤 한창군 조국필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병조정랑 이덕일에게 시집갔다. 그 다음은 즉 왕비전하이며, 막내는 은률 현감 김시보에게 시집갔다. 진사 희갱은 종실 기성군 현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남 일녀를 낳았다. 장남 효립은 세자시강원의 필선으로 공의 상에 승중복(장손으로 아버지가 안 계셔 조부모의 상에 아버지를 대신해 상제복을 입음)을 입었다. 둘째는 충립으로 의정부사인이고, 딸은 평강현감 박안정에게 시집갔다. 문원군 희담은 승문원판교 윤현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 일녀를 낳으니, 아들 신립(구명), 지금은 정립으로 개명하여 공조좌랑이다. 딸은 열세 살의 처녀 나이로 외가를 따라, 대구부 임소에 가서 있다가 임진년 난 때에 적변을 만나 절개를 지키어 죽으니 계사 봄에 조정에서 정표하였다. 문창 희분은 광릉참봉 성질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남 사녀를 낳으니, 장남 정립은 생원이고, 둘째는 명립이다. 장녀는 호조참의 조유도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사산감역 경유후에게 시집갔다. 셋째는 익위사세마 최위에게 시집갔으며, 막내는 익위사부수 조실구에게 시집갔다. 참의 희발은 부평부사 심신겸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남 일녀를 낳으니, 장남 시립은 익위사세마이고 둘째 중립은 생원이다. 딸은 사간원정언 김세렴에게 시집갔다. 참의희발은 후취하였는데 사직서령 박채의 딸이다. 오남 일녀를 낳으니, 장남은 유립이고 둘째는 현립, 셋째는 영립이며 넷째는 창립이고 막내는 한립이다. 딸은 사인 이무에게 시집갔다. 관찰사희량은 충의위 구사성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 삼녀를 낳으니 아들 두립은 진사이다. 큰딸은 사산감역 이민숭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사인 심익에게 시집갔으며, 셋째는 사인 오세헌에게 시집갔다. 판관 희안은 도사 정곽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으니 성균 진사 윤상미에게 시집갔다. 판관 희안은후취하였는데 감찰 정호성이 딸이다. 한창 조국필(큰사위)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홍문관수찬인 조유선이다. 정랑 이덕일은 사남 이녀를 낳으니, 장남은 진사 이후재이고, 둘째는 이홍재, 셋째는 이상재이다. 큰 딸은 사인 신즐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사산감역 유지호에게 시집갔다. 은률현감 김시보는 사남 이녀를 낳으니 장남은 김진성이고, 큰 딸은 예조좌랑 기준격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필선 효립은 대사헌 정윤복의 딸에게 장가들어 사남 칠녀를 낳으니 장남은 종선이고 나머지 증손들은 기록하지 않는다. 문창 희분의 서자로 장남 익립은 진사이고, 둘째는 복립이며, 셋째는 후립, 넷째는 위립이고 딸은 학생 윤선행에게 시집갔다. 명하노니, 오로지 공은 호락하고 단아하였으니 이는 덕행에서 바탕하였도다.

공은 빼어난 재주가 있었으나 과거를 버리고 유사로 입신하였도다.

우리 조정은 사람을 쓰는 데 혹 구애하는 바 있으니 과거에 등재하지 못하고서는 현달한 벼슬길에 나아가기 어려웠더라.

그러나 공께서 거친 이력은 조정에서 서료를 지냈고 외직으로는 주현을 다스렸도다.

사람은 혹 그 재주가 가려 떨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늘은 선한 이를 복되게 하는 도다.

공의 여경(餘慶),즉 착한 일을 많이 한 갚음으로 그 자손이 누리는 경사가 참으로 훌륭하였음이여!

이는 내가 직접 본 것이로다.

삼가 공의 거룩하신 따님을 우러러보니 중전이 합당한 자리였도다.

중전께서 원자를 탄생하니 춘궁에 상스러운 기상이 가득하도다.

태임 · 태사 · 등후 · 마후 등도 이러한 융성함에 비할 것인가?

훌륭하도다! 국모의 거동과 범절! 이는 본디 가정의 법도에서 연유함이라.

공은 항상 겸손하고 또 겸손하여 편안할 때에는,

‘위태로움이 가득 차면 넘친다’는 성현의 말씀을 항상 실현하였도다.

훌륭한 아들과 사위를 두었으니 계속하여 기린각에 그 모습 비쳤도다.

이는 공께서 덕을 심어 향기를 떨쳤음이니 참으로 혁혁하고 진진하도다.

시와 서에 칭찬이 자자하니 공보다 뛰어난 자 그 누구일꼬!

내가 명을 돌에 새기니 공의 빛난 자취 영원하리라!


▨근정양효절협책호성공충분의병기익사공신보국숭록대부진원부원군 유근(柳根)이 짓고,


▨통정대부병조참의지제교 오정(吳靖)이 쓰다.


▨숭정대부행지중추부사 

김상용(金尙容) 전서하다.


만력 45년(1617년) 11월   일.


13世孫 志 世 교정 옮김





蓬原府夫人東萊鄭氏碑陰


柳根 撰

吳靖 書

蓬原府夫人東萊鄭氏領敦寧府事文陽府院君柳公之配也領敦寧國舅例授職非有策勳不得封君而國舅封府院君正一品外命婦封貞敬夫人而國舅夫人封府夫人國制待國舅若是其隆盛文陽公與府夫人俱嘉靖辛丑生夫人年十四歸文陽文陽享年七十有二卒于萬曆壬子春二月癸丑之春追▨公衛 聖元勳 贈竭忠盡韶德賛謨佐運之號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公卒之九年庚申冬府夫人年八十而終以根旣銘文陽公諸石諸孤於憂服之中又求根一語將刻之碑陰根今雖老且病義不敢辭夫人曾祖考文翼公諱光弼議政府領議政扶植己卯諸賢于斯道有大功配享中宗廟庭國朝以來數相業以文翼爲稱首祖考諱福謙江華府使贈領議政以子貴也考曰惟吉二十四魁戊戌謁聖試能文章繼祖父爲左議政妣曰元氏貞敬夫人原州人禮曹叅判繼蔡之女也夫人幼有至性歲壬子議政遭內艱癸丑▨▨▨▨▨▨▨▨▨▨▨來▨舍時議政胤子蓬萊相公生纔經歲夫人年十三色憂甞▨衣不解帶十夜不離間議政素鍾愛益奇之嘉其氣質▨淑頴悟過人敎以古訓閨範內則之外凡經史之可誦者靡不習自甲寅于歸之▨上事舅姑下恤婢僕篤於婦儀一門內外翕然▨爲賢婦五十九年如鼓瑟琴逮至文陽下世之後雖以衰麻在身之年執喪供祭一出於誠服闋之後不以家事爲念惟奉先祀賙門族是務無間於所天在世之時坤殿以七十偏親終能勝喪爲莫大之幸涓吉▨迎入于通明殿設宴以慰翌日上設酌親執盞以壽錫賫便蕃又明日東宮亦設宴三殿各自製詩以紀盛事每歲宮中有大小慶禮未甞不奉邀俱歡情禮備至此實古今所罕聞者十數年來諸子諸孫出入臺省金玉輝暎夫人以榮爲懼常謂諸子曰爾曹致位列卿皆由先世積德發於今日門戶之盛可憂非可喜也爾等盍各畏愼牧以卑遜諸子公退必齊會膝下夫人就寢然後方退私室日以爲常子希發久吊銓夫人甞謂曰爾自叅議陞叅判爾兄長西銓一家二人並居兩銓爾宜先解以謝人言凡其識見透徹皆類此生長文獻世家習於耳目者無非義方諸子幼少時勿許出就外傳親自敎導易致成就上有寡兄年今八十九夫人事之如母如得天厨珍膳必先分送然後始許進庚申冬患微恙上遣御醫多方救藥終不救訃聞上震悼輟視朝自歛殯至襄奉皆官庇用一特禮禮官率禮吊祭三殿各遺中使護喪致吊致祭一如前喪鳴呼生榮死哀非此之謂也歟若其子若孫職名具錄前碑今不重載仍竊惟念公之孫忠立中庚戌文科別試聞喜之席公持座上賓賀杯謂根曰子希奮中丁酉別試希亮中戊申別試子希發長孫孝立中己酉增廣今忠立又釋褐三子二孫是即五子登科云厥後孫鼎立中戊午增廣庶孫厚立中同年別試武科孫命立己未秋榜魁進士夫人在世時也是果非積善餘慶乎鳴呼盛哉

天啓二年十月 日刻 





봉원부부인동래정씨비음

  

유근(柳根)이 짓고 오정(吳靖)이 쓰다.


봉원부부인 동래정씨는 영돈녕부사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유공의 배위(配位)이다. 영돈녕부사는 국구(國舅)에게 의례 주는 직위로, 책훈이 없으면 봉군(封君)되지 못하지만 국구로서 부원군 정일품에 봉해졌다. 외명부로는 정경부인에 봉해졌으나 국구부인이 되었으므로 부부인에 봉해졌다. 나라의 제도로써 국구를 이와 같이 융성하게 대우하였다.

문양공과 부부인은 다 같이 가정 신축년에 출생하였다. 부인은 14세에 문양공에게 출가하였다. 문양공은 향년 72세로 만력 임자년 봄 음력 2월에 사망하였다. 계축년 봄에 위성원훈에 추록되고 갈충진성 동덕찬모좌운의 호칭이 내려졌으며 대광보국 승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공이 사망한 지 9년이 되는 경신년 겨울에 부부인이 향년 80세로 사망하였다. 내가 이미 전에 문양공의 비문을 지어 석각하였는데 공의 아들들이 복상 중에 또한 내게 비문을 받아서 장차 비음(碑陰)을 새기려고 하니, 나는 지금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부인의 증조고(曾祖考)는 문익공(文翼公) 휘(諱) 광필(光弼)로서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다. 기묘사화 때 여러 유교 명현들을 도운 공적이 있어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국조 이래 여러 차례 재상을 지냈으며, 문익(文翼)이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조고(祖考)의 휘(諱)는 복겸(福謙)으로 강화 부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이는 아들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친은 유길(惟吉)로서 24세인 무술년에 알성시에 장원하였는데 문장에 뛰어나 조부에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모친은 정경부인 원씨(元氏)로 원주인(原州人) 예조참판 계채(繼蔡)의 따님이다.

부인은 어려서부터 지성이 있어 임자년에 의정공이 모친상을 당하자 계축년에 돌아왔을 당시 의정공의 맏아들인 봉래상공이 출생한 지 일 년 이 되었고 부인은 당시 13세였는데, 근심하는 낯빛으로 의대를 풀지 않고 열흘 밤을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의정공은 본래 부인을 총애했었는데 이에 더욱 기특하고 여기고 그 기질이 정숙하여 남보다 뛰어난 것을 가상해 하였다. 의정공이 고훈과 규범과 내칙을 가르친 것 이외에도 읽을 수 있는 경사는 스스로 익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갑인년에 시집와 위로는 시부모를 모셨고 아래로는 종복들을 돌보아 부도(婦道)에 충실하였으니 문중의 안팎에서 모두가 하나같이 현부(賢婦)로 여겼다. 59년을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으며 문양공이 하세한 후 비록 본인이 상중에 있었지만 한결같이 정성으로 상제 노릇을 하고 제사를 받들었으며 상을 마친 후에는 가사를 생각지 않고 오직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문족을 위로하고 돌보는 일에 힘써 부군이 살아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하였다.

곤전은 부인이 나이 70세로 남편의 상을 무사히 마친 것을 아주 큰 다행으로 여겨 길일을 택하여 통명전에 맞아들여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다음날엔 왕이 주연을 베풀어 친히 잔을 들고 장수를 기원하고 편번(便蕃)을 하사하였다. 또 다음날 동궁도 연회를 베풀었으며 삼전이 각기 시를 지어 성대한 일을 기리었다. 해마다 궁중에 크고 작은 경사가 있으면 맞이하여 모시고 함께 기쁨을 나눴는데 정성과 예를 극진히 하였으니, 이는 실로 고금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십 수 년 동안 여러 자손들이 대성(臺省)에 출입하며 높은 벼슬로 빛났는데 부인은 이러한 영화를 걱정하며『너희들의 지위가 경의 반열에 이른 것은 모두 선조께서 쌓은 덕이 오늘날 나타난 것이다. 집안이 번성하는 일은 우려할 일이지 기뻐할 일이 아니니, 너희들은 각별히 삼가고 조심하며 몸을 낮추어 겸손한 자세로 처신하라』하였다. 여러 자제들은 퇴궐하여 그 슬하에 함께 모였다가 부인이 잠자리에 든 뒤에야 제 방으로 물러 나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들 희발(希發)이 오랜 동안 동전(東銓)에 있었는데 부인은 항상 일러 말하기를『 너는 참의에서 참판에 올랐고 너의 형은 서전의 판서이니 한 집안에 두 사람이 함께 양전에 벼슬하게 되었다. 네가 먼저 사직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 식견이 이와 같이 투철하였다. 이는 문헌 세가에서 자라나면서 보고 들으면서 익힌 것으로 모든 일이 의롭고 반듯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밖에 나가 사부에게 나아가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친히 가르치고 이끌어 쉽게 성취할 수 있었다.

위로 과형(寡兄)이 있는데 지금 나이가 89세로 부인은 마치 어머니처럼 모시어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먼저 나누어 보낸 뒤에 자신에게 올리게 했다. 경신년 겨울에 가벼운 병환을 얻었는데 왕이 어의를 보내 다방면으로 약을 구하였으나 끝내 구하지 못하였다. 부음을 듣고 왕은 매우 슬퍼하며 정사를 철폐하고 몸소 지극히 염빈(殮殯)하였다. 장례 절차를 모두 관의 도움으로 특별한 예로 치렀다. 예관들이 예를 갖추어 조문하고 제사 지냈으며 삼전은 각각 중사를 보내어 호상하고 치조, 치제하였으니 한결같이 문양공(유자신)의 상(喪) 때와 같이 하였다. 아아! 살아서 영광이고 죽어서 애통하다는 말이 이를 일러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 자손의 직명은 문양공(유자신)의 비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 중복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가만 생각해 보건대 공의 손자 충립(忠立)은 경술년 문과별시에 합격하였는데 문희연에서 공은 상빈의 자리에 앉아 축하주를 주며 나 근(根)에게『아들 희분(希奮)은 정유년 별시에 합격하였고 희량(希亮)은 무신년에 별시에 합격하였으며, 아들 희발(希發)과 장손 효립(孝立)은 기유년 증광시에 합격하였다. 지금 충립이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아들 셋과 손자 둘, 곧 다섯 자손이 등과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후에 손자 정립(鼎立)이 무오년 증광시에 합격하였고 서손 후립(厚立)은 같은 해 별시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손자 명립(命立)은 기미년 가을 진사시에 장원하였으니, 부인이 살아계실 때의 일이다. 이것이 과연 선(善)을 쌓은 집안에 넘치는 경사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번창하도다.


천계 2년 10월 일 세움.

1622년 임술 광해14년 10월

13世孫  志 世 교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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