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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매돈거사 류광선의 매돈유고집과 서문 민창도


매돈유고---10세손 낭혜 류지세 영인본 제작 소장

 

梅墩居士 柳廣善23世先祖님에 대하여


1616(戊辰)年 10월 13일 文陽府院君 柳自新20世의 曾孫이며, 文陽府院君의 5子인 京畿觀察使, 禮曹參判을 지내고 바로 윗 兄인 希發과 함께 賜暇讀書에 선발되었던 希亮21世(監司公 宗中)의 孫이며 光海君 7년 1615(乙卯)年 600년 朝鮮時代를 통 털어 극히 드문 만 14歲의 나이에 進士試에 합격하고 光海君 13年 1621(辛酉)年 만 20歲에 文科에 급제한 進士 斗立22世의 獨子로 태어났다.


7歲 되던 해인 1623年 仁祖反正으로 祖父는 게제도로 유배되고,父親 마져 유배되어 집안이 滅門之禍을 당하였다.


雪上加霜 5年 후 겨우 11歲 되던 해인 1628年 父親 斗立22世이 큰집 삼촌이신 孝立22世의 모역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伏誅(正刑)를 받게 되었고, 멀리 거제도에 유배되셨던 祖父님 마져 絞首刑을 받았던 관계로 仁祖가 역모의 子孫들은 11~12歲 이상 되면 정배시키라는 命에 어렵게 숨어서 지내야만 하는 어린 나이에 悲運을 맞게 되어 家勢가 沒落하게 되었다.


집안이 禍를 당하였으나 글을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난을 걱정하지 않고 천하고금의 책을 사들이고 學文에 전념하였다.

어머니가 眼疾(눈병)이 심하였는데 삼복 더위에 파리를 쫓느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성스럽게 부채질을 하는 등 효자였다는 고문서 사실(아래 원문 내용)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 “字汝居號梅墩文化人斗立子年十三遭家禍 廣善曰曰禍家子不文又何以齒人讀書數年文乃大暢於是斥臧獲市天下古今書蓄一室而居焉晝夜誦覽發爲文章事母孝母病眼廣善操扇辟蠅貫三夏無一息”

遭-만나다.操-조심스럽게 하다.蠅-파리 승


어려서부터 詩文에 능통하여 朔寧 崔氏인 어머니 여동생의 子이고 25歲 손아래인 承旨,京畿觀察使,禮曹參判을 지낸 博泉 李沃(1641~1698)에게 詩文을 가르쳐 주었으며,그와 뜻이 통하여 함께 유람하며 교분을 쌓았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내려오고 있다.   


 

※ 身心을 닦는 聖地(柳廣善이 詩를 읊었다)


修理山 남쪽 중턱에 修理寺라는 절이 있다.

지금은 비록 영락했어도 예전엔 큰 절이었다고 한다 신라 진흥왕 18년(558년)에 건립된 유서 깊은 사찰로 한때 암자만도 12곳을 거느렸으나 임진왜란과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쇄락했다고 한다.

창건 당시 身心을 닦는 聖地라 하여 修理寺라 했는데 그 후 산 이름조차 修理山이 되었다고 한다.

修理寺는 고려중기 불교의 종파인 유가종 중심 도량의 한곳이요 왕실과 관계가 깊었던 곳이었다.

그것을 고려의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쫓기고 있을 때 보호를 받은 곳이 삼각산 신혈사 유가종 사찰 장의사요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修理寺는 당시 안산에 있으면서 왕실과 두터운 인천이씨, 안산김씨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인천이씨는 대대로 유가종 승려를 배출해온 가문이었다.

고려 8대 현종은 강조가 쿠테타를 일으켜 왕실의 불륜의 씨앗이라며 목종을 폐위 비운의 고아를 데리다  앉힌 주인공이다.

태조 왕건의 손자면서도 어려서 조실부모한 현종은 소년 시절에는 억지로 삭발 출가를 하기도 하였다.

적통이 끊기게 되자 김치양이 헌애왕후와 사통해서 낳은 아들을 임금으로 삼으려 흉계 절간의 왕손에게 내거나 독이 든 음식을 먹도록 강요하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구사일생으로 현종은 살아났다. 그것은 스님들의 도우심 때문인데 한 노승이 방안에 토굴을 파서 그 위에 침대를 놓아 숨기는 등 방책을 썼다.

그러니 현종이 유가종의 사찰과 밀접하고 修理寺는 번창할 수 있었다.


그러한 修理寺를 광해군의 처남 柳希亮의 손자요 죽임을 당한 廣善이 다음과 같이 詩를 읊었다.


“한스럽다 승이 되어 이몸 하나 숨기지 못하고/ 평생을 물가에 늙어 운수 얄궂어라/ 까닭없이 동루의 기둥이 무너지더니/ 달은 지고 샘물소리에 새벽 골 안이 비었 구나”

1988년간 “시흥군지에서”

1684年 10월29일 69歲의 生을 마감하셨고 평생 詩文을 지어 현재 13~14萬 字의 梅墩遺稿를 남겨졌으나 너무 방대하고 詩文 내용이 깊어 아직까지 이렇다할 解釋文이 전혀 없다.


梅墩 居士 柳廣善23世先祖님 死後 위에서 밝힌 姨從弟인 李沃이 墓碑銘을 撰하였고, 그 후 30年이 지난 1714(甲午)年 賜暇讀書하던 중 호당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肅宗으로부터 賞으로 豹皮를 받았고 부제학,이조참의,대사성을 지냈으며 특히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곽산의 開元寺 佛糧碑文과 영변의 普賢寺 月渚大師碑文을 撰하였던 李沃의 妹弟 되는 閔昌道(1654~?)가 梅墩遺稿의 序文을 撰하였다.


민창도(閔昌道)에 대하여


1654년(효종 5)∼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회(士會), 호는 화은(化隱). 좌의정 희(熙)의 아들이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80년 정언이 되었고, 1689년 부제학 유명현(柳命賢) 등이 홍문록(弘文錄)을 만들 때 1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그해에 헌납·부교리를 지냈고,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중 호당시(湖堂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숙종으로부터 상으로 표피(豹皮)를 받았다.


1690년 헌납으로 사서(司書)를 겸하였고, 이어 이조좌랑·승지를 거쳐 1691년 경상도관찰사, 이듬해 부제학을 거쳐, 1693년 이조참의, 1694년 대사성이 되었으며,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장수(長水)에 유배되었다.


특히,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곽산의 개원사(開元寺) 불량비문(佛糧碑文)과 영변의 보현사(普賢寺) 월저대사비문(月渚大師碑文)을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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