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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광해왕의 비 류씨의 상소문과 그 의미


문체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조선 600년사에 길이 남을 글 가운데 하나인

문성군부인 류씨의 상소문 전문과 해설 

天下의 大義를 잃을 것입니다.


丁卯虜亂- 中殿 柳氏의 상소문


굵은 한양해서체는 中殿 柳氏의 상소문 전문 이고,

   가는 바탕체는 소설가 이수광씨의 소설 내 해설이며

   

   後記는 柳志世의 발췌 기록물입니다.


<참고 문헌> : ①공사견문록

              ②조야기문

              ③이수광 소설=5백년,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

                  "나는 야위어도 천하는 살찌리라"

 

 

본문 중에서


나 같은 아녀자가 마땅히 관여할 일이 아니나 불과 쓸데없는 휴지 한 장이로되, 마음이 극히 답답하여 감히 서계하나이다.

변방 장수 능히 적을 치지 못하므로 나같이 분해하여 반드시 등창이 나서 죽을 것이다.

더욱 통곡함을 더 하리로소이다.


광해군 즉위 14년 중전 류씨가 한 통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은 언문으로 되어 있고, 아녀자가 올린 것이라 하여 실록에 올리지 않고 광해군에게 직접 보고되었다.


천계 임술 중전 류씨 언서로 상소하여 아뢰되 변방 근심인 노적과 천조가 저와 같이 하고 또 아국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진실로 아국을 사랑하는 뜻이 아니라-----,


중전 류씨는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과의 줄타기 외교를 전개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이를 반대하기위해 상소를 올린 것이다.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왕비가 상소를 올린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중전 류씨는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상소를 올려야 했을까? 이는 남편인 광해군과 정치적 식견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대륙의 영웅 누르하치


광해군은 즉위하여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회복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군왕으로서 업적이 출중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많은 명신들을 참혹하게 죽였다. 그는 친형인 임해군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귀향 보내 죽이기도 했고,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만들어 서궁에 유폐시켰다. 폐모는 효를 중시하는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강상의 죄에 해당되는 가장 큰 죄악이었다. 이 일로 온 나라가 들끓었으며 이원익과 이항복 같은 충신들이 줄줄이 귀향을 가고, 조정은 대북인 이이첨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무렵 북쪽 만주대륙에서 누르하치(奴爾哈齋)가 세운  후금(後金)이 일어나 명나라를 위협하면서 조선에 친선을 요구하여 왔다. 후금은 조선이 상국으로 섬기면서 사대를 하는 명나라의 적이었기 때문에 친선을 거부했다. 그러나 명나라를 공격하려는 후금은 배후에 조선이 있는 것을 경계하여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친선을 도모하려고 했다.

조선이 후금이 강성해진 것을 알게 된 것은 광해군 즉위 초부터였으나, 만주대륙에 본격적인 전운이 감돌면서 이들을 경계하기 시작한 것은 광해군 5년 2월 함경북도 병사 李時言이 올린 장계 때문이었다.


호인(胡人)이 와서 고하기를 '노추(奴酋:누르하치)가 군병을 거느리고 홀자온(忽刺溫)의 부성(部城)을 포위한 다음 운제(雲梯)를  사용해 함락시키자 홀추가 탈출하여 북쪽으로 도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홀자온과 모추의 땅은 모두 두만강 밖에 있는 여진(女眞)을 일컫는 것이었다. 여진은 말갈(靺鞨).읍루(婁).숙신(肅愼).물길(勿吉)로 불리는 퉁구스계의 일족으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의 민족 구성원이었던 우리나라의 선조들 이었다.건주여진은 한때 금나라를 세워 중국 북부지역을 지배했으나 징기즈칸에게 멸망하고, 조선시대에 이르면 함경도, 평안도 일대와 국경을 접하면서 6진이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누르하치는 만주대륙의 작은 부족인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이 되어 광활한 만주대륙에 흩어져 있던 여진족들을 통일해 만주국을 세우고, 청나라 군대의 모태가 되는 팔기제도를 정착시켰다.

누르하치는 팔기제도로 강성한 군대를 거느리게 되자, 조선과 화친을 맺고 명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명나라는 누르하치가 건국한 후금이 강력해지자 이를 경계하면서 조선에 자문(咨文: 외교문서)을 보내 군사를 양성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도 비로소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면서 이들의 동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누르하치는 여진을 통일하자 명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누대에 걸친 부패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진 명나라는 수십만 군사를 동원하여 후금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나 부패한 조정은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변경이 점차 후금에 정복되어 국가의 명운이 조석 간에 있게 되었다.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


광해군 10년(무오년 1618) 윤 4월 27일 명나라 경략(經略) 왕가수(王可受)가 조선에 출병을 요청하는 자문을 보내오자, 마침내 조선에도 전운이 감돌았다.

흠차총독이자 요동 군문경락 왕가수는 조선 국왕에게 정중하게 아룁니다.

---이번에 건주의 소추(小醜:후금)가 발해 만에서 일어나 보잘 것 없는 제추(諸酋:여진 여러 부족의 족장)를 선동해서 감히 쥐새끼처럼 대 명나라를 엿보는 일을 은밀히 도모해왔습니다.-----이에 황상께서 크게 노하시어 기필코 섬멸해버릴 계책을 정하시고 사방의 정예병을 동원하여 6월에 정벌하려고 하고 계시는데, 군량은 산처럼 쌓이고 군사의 사기는 우레를 치듯이 사나우나  저 오랑캐의 멸망은  조석지간에 달려 있다고 할 것입니다.

국왕(광해군)의 충성심으로 볼 때 태연하게 보고만 계실 수 있겠습니까? 본조에서 나라를 세운 250여 년 동안 왕의 나라는 줄곧 본조의 보호를 받아왔습니다.

여러 해 전에 왕의 나라가 왜노(倭奴:임진왜란)의 변란을 겪게 되자마자 본조에서 즉시 10만 군사를 파견하여 몇 년 동안 혼신의 노력을 다해 왜노를 격파했는데, 이는 왕의 나라가 대대로 충성을 바쳐온 만큼 왕에게 계속 기업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탓입니다.----격문(檄文)이 도착하는 대로 왕께서는 즉시 신하들과 충분히 토의하신 뒤 군병을 잘 정돈시켜 대기하다가 기일에 맞춰 적을 토벌하는 데 실수가 없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왕가수의 자문을 받은 조선 조정은 벌집을 쑤신 듯이 웅성거리면서 대책을 세우기에 분주했다. 광해군은 중신들과 회의를 거듭하면서, 가능하면 여러 가지 핑계를 대어 명나라에 원병을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후금의 누르하치도 조선이 명나라와 연합하는 것을 염려해, 예물과 사신을 보내오며 불꽃 튀는 외교전을 펼쳤다. 광해군 11년(1619) 2월 24일 누르하치는 초피 5백 벌을 보내 조선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초피를 받으면서 이를 명나라에 비밀로 하라고 하며 실리외교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1620년 해가 바뀌자 후금과 명나라가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강성한 후금의 전쟁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조선의 출병을 줄기차게 요청했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청병이 계속되자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로,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아 1만 3천 명의 군사를 동원해 명나라를 돕게 했다.

"도원수는 명심하여 들으라, 우리는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 출병하는 것이다. 도원수는 압록강을 건너면 싸울 생각부터 하지 말고 명나라와 노추의 형세를 자세히 파악하여 보고하고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을 어전으로 불러 비밀리에 영을 내렸다.

"전하, 형세를 보라 하심은 무슨 뜻이옵니까?"

강홍립이 어리둥절하여 광해군을 쳐다보았다.

"명이 강한가 노추가 강한가, 형세를 살피라 하는 것이다.

노추가 강성하여 장차 명나라를 물리치면 훗날 우리에게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싸움을 하는 것만이 나라에 이익이 되고 백성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다."

"삼가 영을 따르겠습니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비밀 명령을 받고 출정했다. 조선의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관전(寬甸) 부근에 명나라 제독  유정의 군대와 합류해 동가강을 따라 회인에서 노성으로 향하는 후금의 대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일부러 군량을 공급하지 않았고 강홍립은 군량이 없다는 이유로 행군을 늦추어 선봉에 서지 않앗다.

명나라는 조선이 구원병을 보냈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하여 굳이 선봉에 서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강홍립은 후금의 군사력과 명나라의 군사력을 자세하게 살펴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후금이 강성하면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 도원수의 장계를 살피고 국경에 나가 있는 장수들의 장계를 종합하여 보건대, 명나라는 조만간 기업이 다하게 될 것이다. 누르하치에게 비밀리에 사신을 보낼 것이다.

도원수는 ㅣ회를 보아 싸우는 척하고 투항하라."

광해군은 비밀리에 강홍립에게 지시하고 명나라 몰래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조선이 출병을 하여 명나라를 돕는 것은 진심이 아니고, 기회를 보아 투항을 할 것이라고 통고했다.

1620년 명나라의 대군은 3월 4일 누르하치에게 삼하(三河)에서 대패했다.

명나라의 대군은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선두에 서고, 명나라 도독이 중간에서, 강홍립이 중영(中營)을 거느리고 전진하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후금은 개철(開鐵)과 무순(撫順) 두 방면의 군대를 회군시켜 동쪽의 산골짜기에 매복시켰다. 이때 명나라의 개철 총병 두송(杜松)이 매복을 살피지 않고 전진하다가 누르하치의 기습을 받고 위기에 빠졌다. 교일기는 부거(富車)지방에서 진격하다가 두송의 선봉군이 위급한 상태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 군사들을 휘몰아 달려갔으나, 후금의 대군이 갑자기 산과 들판을 가득 메우고 철기(鐵騎)를 앞세워 돌격해 오자 우왕좌왕하다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후금군은 명군을 완전히 포위하여 닥치는 대로 배어 죽였다. 강홍립은 조선 군사들에게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명나라 도독 이하 장군들은 화약포위에 앉아서 불을 질러 자살했다.

"조선군의 대장은 누구인가? 우리 대왕이 만날 것을 요구한다."

후금군은 조선군과 전투를 벌이지 않고 역관 하서국(河瑞國)을 불러 협상을 하고 무장을 풀라고 요구했다. 강홍립과 김응서는 편복(便服)차림으로 투구와 갑옷을 벗어 후금깃발 아래에 세워 두고 후금 진영에 가서 누르하치와 투항 문제를 논의했다. 광해군으로부터 국서를 받은 누르하치는 조선군을 죽이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강홍립은 조선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누르하치에게 투항했다.

명나라 군이 대패하고 강홍립이 투항했다는 사실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조정의 대신들은 오랑캐에 투항한 강홍립의 일가족을 모두 하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강홍립이 자신의 명령을 받고 투항한 것이기 때문에 죄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실리외교를 전개하자 대의명분에 어긋난다는 상소가 빗발치듯 올라오고 비변사와 승정원에서도 후금과 강화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


천하의 대의를 잃을 것입니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 여파는 대궐 안 내전에까지 휘몰아쳤다. 강홍립과 김응서가 1만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후금에 투항하고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에 이중외교를 전개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내전이 뒤숭숭했다. 조정과 내전까지 광해군의 이중외교를 비난하는 여론이 높았다. 이때 광해군의 부인 중전 류씨가 언문으로 상소를 올린 것이다.


천계 임술(天啓 壬戌) 중전 류씨(柳氏:광해군 왕비) 언서로 상소하여 아뢰되 변방 근심인 노적(후금0과 천조(명나라0가 저와 같이 하고 또 아국(조선)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진실로 아국을 사랑하는 뜻이 아니라 아국이 천조와 더불어 협력하여 후금을 공격하면 제 대적하는 힘이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국을 꾀는 것이오, 아국이 또한 저 적에게 거스르지 않으려하여 일절 천조(명나라)를 돕지 아니하고 피난한 당(唐)인을 또한 허접(許接;허락하여 대접함)지 아니 하니 후일의 천조 사람 보기가 부끄러울 것입니다.

이제 들으니 모유격(毛遊擊)의 수병이 나와 진강(鎭江)을 회복하고 인하여 아국에게 군사를 청하거늘 또한 허락지 않는다 하니, 아국이 조금도 고견(顧見):돌아보지)지 아니하여 만일 적이 따라와 다 죽이면 아국이 천하 일을 잘못되게 만드는 것이니, 어찌 통석치 않으리이까?

상께서는 천조에 죄를 짓지 아니하고  또한 저 적을 격노하지 않게 두 가지 모두 안전하고자 하나, 천하 일이 모름지기 한 곳에 전일(全一)할 것이오, 결단코 두 가지 이(利)를 좇는 이치는 없는지라, 마지못하여 저 적이 화를 내어 틈을 내거든 군신이 한 번 죽기로 기약하여 천병(天兵:명군)과 더불어 굳게 협력하여  싸우고 지키면, 비록 흉적을 탕멸치 못하더라도 우리는 천하 대의를 잃지 아니할 것인데 , 어찌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이제 저 적에게 밉보이지 않으려 하여 일절 천조를 고견치 아니하니,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니 마침내 두 가지를 다 잃어 큰 환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정부 대신  비국 당상이 극히 이해를 따져 임금의 뜻을 도로 하지 아니하고  임금께 하는 대로 날마다 저러할 따름이니, 군사의 사기가 떨어져 진실로 민망하나이다.


중전 류씨는 광해군이 실리외교를 전개하는 것을 두고, 나름대로 확고한 논리를 가지고 조목조목 비판했다. 후금과 강화하지 않고 명나라와 연합하면 비록 적을 탕멸하지 못하더라도 천하의 대의는 잃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아울러 두 마리 토끼를 쫓으려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은 북으로 피난을 가다가 남조를 이끌었고, 중전 류씨는 세자빈 시절 피난길에서 많은 고생을 했다.


그윽이 살피니 춘추(春秋) 사기(史記)에 이웃 나라의 환란이 있으매 구하지 않은 일이 없거늘, 하물며 부모의 나라가 저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하리이까?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우리 구하던 일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나옵니다. 엣 사기를 들어보니 금(金)나라와 더불어 강화하여 장사(壯士)의 마음을 게으르게 함으로 송(宋)나라가 마침내 패망하니 사람들이 한탄했는데, 아국이 그 자취를 밟으니 알지 못하겠나이다. 정녕 어찌 하려 하는 것입니까?

옛 장수 악비(岳飛)가  오백 잔병으로 크게 올출(兀朮)을 파하고, 사현(謝玄)이 팔천 병사로 부견(府堅)의 백만 군사를 파하고, 우윤문(虞允文)이 금(金)조 냥(亮)을 파하였으나, 아국이 비록 힘과 형세 미약하나 정병 일만은 가히 판출할 것입니다.

조정에 나라를 꾀할 신하 없고, 변방에 뛰어난 장수 없고, 위로부터 분발하여 도적 칠 뜻이 없으니 뉘 능히 나라를 위하여 전장에 나가 죽으려 하겠습니까?

또 아국 병사 비록 천조로 더불어 협력하여 적을  치나 마침내 김경서(金景瑞)와 홍립(弘立)처럼 살기 위하여 도적하기를 본받으면 반드시 하나의 화살도 쏘지 않을 것이고 적을 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나 같은 아녀자가 마땅히 관여할 일이 아니나 불과 쓸데없는 휴지 한 장이로되, 마음이 극히 답답하여 감히 서계하나이다. 변방 장수 능히 적을 치지 못하므로 나같이 분해하여 반드시 등창이 나서 죽을 것이니, 더욱 통곡함을 더 하리로소이다.

수로로 왕래함이 심히 위태하나 방물은 비록 가져가지 못하여 다만 표문만 가져갈지라도, 성절 동지의 다 같이 갈 것이로되 여러 해 동안 보내지 아니하니, 원통함이 망극하나이다. 2백년 지성으로 사대하던 일이 그릇되어 돌아가니, 아녀자가 보기에도 망극비참한지라 사신, 역관들도 피하는 것을 어느 겨를에 꾀하리이까?

친히 휴지를 보시고 답을 내려주시기 바라나이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는 그의 업적 중에서도 가장 높게 평가받는 부분이다. 그러나 2백여 년 동안 명나라에 사대를 해오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중전 류씨는 대의명분을 버리면 안 된다는 뜻으로 언문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녀는 <춘추>.<사기>까지 예를 들고, 송나라의 장수 악비까지 거론하며 반박했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지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왕비가 정치에 노골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상소를 올린 일도 없었다.


묘당에 노성한 인재를 모두 내쫓았다.


강홍립은 누르하치의 진영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후금의 강대한 군사력에 대한 세세한 내용을 적었고, 그 문서를 종이 노끈으로 만들어 비밀리에 광해군에게 전하며 후금과 강화할 것을 권했다. 비변사는 투항한 강홍립이 문서를 보내오자 이를 막아야 한다면서 강홍립의 가족들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광해군은 비변사에서 강홍립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계사가 올라오자 불만이 가득한 전교를 내렸다.


지금 비변사의 계사를 보니, 뜻은 좋다. 나는 비록 병중에 있어 정신이 맑지 않은데 경들은 후금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나라의 군사로 추호라도 막을 형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난해 격문이 왔을 때부터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걱정했던 것은 명나라를 구원하는 병사를 파견하는 것을 굳이 막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이 굳세지 못하고 평소에 군사들을 조련하지 않아서 명나라를 구원하러 가면 전쟁에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을 ㅕㅇ나라에 말하되, 경락이 나오기 전에 미리 중국에 알리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앞으로 후금과 전쟁을 하여 패배하더라도 지난해에 말한 것과 서로 같으니 어찌 명나라에 책잡힐 일이 있는가? 그런데 경들은 나의 심오한 뜻은 헤아리지 않고 내 뜻을 막으려고만 해왔다. 내가 명나라에 우리의 사정을 말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끝내 내 영을 이행하지 않는 것인가?

나는 진실로 경들의 짧은 소견이 통탄스럽다.

지난해 군사를 파견할 때 마치 일거에 후금을 물리칠 것처럼 주전론을 내세웠는데, 병가(兵家)의 일을 어찌 함부로 단정할 수 있겠는가?

내가 들으니 누르하치의 용병하는 지혜와 계략은 실로 당해내기 어려우니 소국인 우리나라는 앞으로의 환란을 예측할 수 없다. 강홍립이 비록 적에게 항복하였다고는 하나 이토록 성급하게 그의 죄를 다스릴 필요가 있는가? 강홍립이 불행히 적에게 투항했으나 적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밀서로 아뢰는 것이 무엇이 안 될 것이 있는가? 진실로 비변사의 계문과 같이 한다면 비록 후금에 투항했다하더라도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여 나라를 위하여 보내지 않아야 옳다는 말인가?

아, 조정의 사려 깊고 노성(老成)한 인재는 거의 모두 내쫓아 국정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젊고 일에 서투른 사람이 비국에 많이 들어갔으니, 국가의 운영이 잘못되는 것은 당연하다.

명나라 섬기는 성의를 다하고 한창 기세가 왕성한 적을 잘 미봉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 훌륭한 계책이다.

그런데 이러한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번번이 강홍립 등의 처자를 구금하는 일만 가지고 줄곧 아뢰어 왕을 번거롭게 하고 있으니, 나는 마음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비변사에서 누차 청하는 뜻을 나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후금의 서신이 들어 온지 이미 7일이 되었는데 아직도 처결하지 못하였다.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하늘의 운수이니, 더욱 통탄스럽기만 하다.


광해군은 국가에 원로가 없어서 나라의 장래를 모른다고 질책했다.

이이첨 등이 옥사를 일으켜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 심희수 등 많은 원로대신들을 탄핵한 것을 비난한 것이다. 광해군은 국가의 위기가 닥치자 비로소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 심희수  같은 명신들을 숙청한 것을 후회했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중전 류씨의 상소에 어떻게 답을 했는가. 또한 중전 류씨는 왜 이러한 상소문을 올렸는가.

광해군시대의 사대부들은 한 결 같이 명나라의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전하. 조정 모든 대신들은 명나라에 사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뜻을 거스리면 위태로울 것입니다."

중전 류시는 조정 대신들이 반정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대신들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소."

"전하께서 뜻을 굽히시면 나라는 위태로우나 사직은 보존될 수 있습니다."

류씨의 말은 반명정책을 쓰면 반드시 광해군이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뜻을 굽히지 않으면 나는 위태롭지 않으나 나라가 위험에 빠지겠지."

광해군은 공허하게 웃었다. 친명정책을 쓰다가 후금이 강성해져 투항을 하더라도 임금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반명정책을 쓰다가 친명파 사대부들이 반정을 일으키면 광해군은 ㅗㄱ숨을 잃게 된다. 광해군은 중전 류씨의 상소가 올라오고 1년이 채 못 되어 인조반정으로 실각한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이 대부분 친명파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중전 류씨가 상소를 올린 것은 오히려 이 점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명나라에 사대를 해온 지 2백여 년인데, 의리로는 구신지간이고 은혜로는 부자지간이나 다를 바 없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우리 조선을 구원한 일은 만세가 되도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명나라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강홍립에게 은밀하게 저들의 동태를 살펴 행동하다가 군사를 들어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만들어 수치스러운 소문이 사해에 퍼지게 되었다.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조선으로 하여금 오랑캐의 금수가 되게 하였으니, 그 통분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에 광해군을 폐위시키라는 전교를 내리면서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악을 형제 살해, 폐모 사건과 함께 명나라에 반대 했다는 사실도 중요한 죄악으로 거론하고 있다. 중전 류시의 상소는 단순하게 광해군의 정책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친명파 대신들의 반정을 경계한 것이다.

글에는 때때로 표현하지 못하는 문장이 있으나 행간을 읽으면 그 진실이 보인다. 좋은 글은 행간까지 읽히는 글이다.

후금은 광해군의 실리외교로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으나, 인조가 등극하여 후금과 적대를 하게 되면서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된다.

강홍립은 1627년(인조5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先導)로 입국하여 화의(和議)를 주선했다.

그러나 강홍립은 끝내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 당했다.



<後記>

  나는 종친회 중책을 맡아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틈만 있으면 우리 직계 선조 분들의 행적을 찾아 추적하고, 그 내용을 나만의 것이 아니라 유지종친들과 공유하고자 고문서, 고문헌 뒤져보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익숙해져 거의 일상화 된지 오래 되었다.

2007년 여름 어느 날 고문헌을 살펴보던 중 조야기문(朝野記聞)에 중전 류씨의 언문 상소문을 만나보게 되어 그 순간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조선왕조 600년 동안 중전의 상소란 들어보지 못하였던 유일한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상소문의 일부만 실려 있는 족자 형 그림을 만나 보았고, 그 이전에 중전의 친정어머니 蓬原府夫人 東萊 鄭氏(左議政 惟吉의 둘째 딸)가 1612년 문양부원군이 서거, 홀로 되셔 3년 뒤인 光海王 乙卯(1615)年에 75歲되시던 해에 鄭氏를 위하여 瑞蔥臺와 通明殿에서 壽宴를 베풀었는데, 世子 祗, 蓬原府夫人, 光海王, 中殿 柳氏 4사람이 서로 번갈아가며 詩를 지어 주어, 당시의 동궁인 세자, 蓬原府夫人 東萊 鄭氏, 광해왕 中殿 柳氏의 詩文이 鄭載崙의 公私見聞錄에 수록되어 내려오고 있다.  

                             朗惠  柳志世 구성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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