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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충숙공송암 류관(柳灌) 추모시

 

충숙공 류관(柳灌) 추모시

공의 휘(諱)는 관(灌)이요, 자는 관지(灌之)이며 호는 송계(松溪)요 또 다른 호는 송암(松菴)이니 1484출생 벼슬이 좌의정가지올랐으나 을사사와로피화되었다. 공(公)이 돌아간지 二十四年인 1568년(선묘宣廟)설원되었다.

1577정축에 공의 벼슬을 회복하였고 영조(英祖) 1750 경오(庚午)에 충숙(忠肅)이란 시호(諡號)를 내리다. 1746 영묘(英廟) 병인(丙寅)에 충신정려(忠臣旌閭)를 특별히 세우다. 산하(山下)에 사정려(四旌閭)가 있으니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충비(忠婢)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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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명을 씻은 뒤 명공들의 추모시가 수편전한다

 


구재 김득추(懼齋 金得秋)의 추모시에 이르되,

  엎친 그릇 아래에도 해가 비치니, 무덤길에 임금의 은혜가 새롭도다.   한세대(一代) 사람의 사표(師表)요, 삼한국(三韓國)의 대신(大臣)이라.   연기와 안개는 동작(銅雀)에 저물고, 꽃나무는 효릉(孝陵)에 봄일러라.   한 물길(一水) 멀리 막혔으나, 외로운 혼(魂)이 혹여 자주 오리라.

覆盆天日照 泉路聖恩新

一代人師表 三韓國大臣

烟霞銅雀暮 花木孝陵春

一水盈盈隔 孤魂倘來頻 고 하였고,

주) 김득추(金得秋 ; 1574~1645)의 문집이다. 김득추의 자는 운서(雲西), 호는 구재(懼齋),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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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 홍적(荷衣 洪迪)이 공의 격동에 있는(格洞) 옛집의 늙은 잣나무를 보고 글을 지으니,
  늙은 잣나무가 푸르고 푸르러 단청처마를 가리니,   그늘이 몇 번이나 석양 빛을 빌어 더하였는고.   상근(霜根)에 다시 요지(瑤池)의 비를 만나니,   뜻 없이 지난 손도 또한 눈물을 적신다.

古栢蒼蒼掩畵檐 重陰幾借夕陽添

霜根更帶瑤池雨 過客無情亦涙沾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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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적洪迪 ;1549년(명종 4)∼1591년(선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태고(太古), 호는 양재(養齋)·하의자(荷衣子). 1583년 정언이 되었다. 1588년 병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교리·검상을 지낸 뒤 사임이 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집의가 되었다.

경학(經學)에 밝고 논사(論思)를 잘하여 홍문관에서 ‘학사전재(學士全才)’라 불렸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저서로는 《하의집》·《하의시십(荷衣詩什)》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시조 한 수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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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벽(權擘)의 시에
都人에게 加領하사 삼공(袞衣)되어 오시니

옥촉아래 모름지기 이(理)와 재(才)의 조화를 비기었도다.

황도가 처음열리니 임금행차 접대했고

청운의 뜻 스스로 이루니 중태(좌의정)자리 이루었도다.높은 빗돌 섯다 쓰러졌다 해도 봄빛은 흐르고

곧은 붓(董筆)이 크고 어질 으니 밤 누대 밝도다. 오랜 원통함을 맑게 씻으니 택조가 새롭구나

문득 알겠거니 生과 死. 榮과 哀의 극단 함이여...

都人加領袞衣來 玉燭須憑燮理才

黃道初開賓出日 青雲自致祈中台

魏碑起踣流春澤 董筆褒賢照夜臺

滌盡舊寃新卜兆 偏知生死極榮哀

주1)都人-도성에 사는 사람 * 세상이 어지러워 예제에 일정한 법도가 없어 개탄하는 말로도 쓰임[시경소아편] =都人士도성에 살면서 선비로서의 덕행이 있는 사람.

주2)袞衣; 제왕이나 삼공이 입던 용무니의 예복 .삼공이 봉군될 때 一命이 더해져서 공의를 입는일. 轉意되어 三公을 이른다 ./ 黃道=천자가 거둥하는 길 *태양이 운행하는 길 *벼슬길 / 中台=三台의 하나.좌의정 / 司徒의 벼슬..교육담당관

홍적(洪迪)에 대하여

/ 魏碑 -우뚝한비 /기북(起踣)- 일어섯다 쓰러젔다함. 스러진것을 일으켜 세우다. 踣;쓰러질북

/ 董筆 -바르게 씀 *正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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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祖戊辰公殁後二十四年弘文舘上箚請雪乙巳三大臣疏辨陳奏誣罔之罪十二舘學儒生上疏請伸雪乙巳罪人三公率百官啓同年十月朔乙未乃命伸雪三大臣逆名庚午栗谷李文成公四十一度上章訟寃白忠肅公仁傑亦疏辨大臣三司舘學同聲迭請上大悟焚武定鑑罪群小丁丑復公官爵英祖庚午贈諡忠肅公伸雪後懼齋詩云

覆盆天日照泉路聖恩新一代人師表三韓國大臣烟霞銅雀暮花木孝陵春一水盈盈隔孤魂倘來頻

洪荷衣迪見公古宅在昭格洞栢樹感吟云

古栢蒼蒼掩畵檐重陰幾借夕陽添霜根更帶瑤池雨過客無情亦涙沾

權擘詩云

都人加領袞衣來玉燭須憑燮理才黃道初開賓出日青雲自致祈中台魏碑起踣流春澤董筆褒賢照夜臺滌盡舊寃新卜兆偏知生死極榮哀 문화류씨대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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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廟丙寅特立忠臣旌閭山下有四旌閭門忠臣孝子烈女忠婢行蹟與舊譜有不同者今考明宣兩朝實錄改正

 

(상세한 행적(行蹟)은 문화류씨포럼 인물항에서 보실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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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왕조실록. 문화류씨대보.무자보 * 역문, 원문정리 류영렬2011.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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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관(柳灌)의 약사

1484년(성종 15)∼1545년(명종 즉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관지(灌之), 호는 송암(松庵). 사헌부장령 유정수(柳廷秀)의 아들이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2년 뒤에는 정언이 되었고, 1513년에 지평으로 일시 경기도도사에 임명되어 진상(進上)의 전결분정(田結分定)에 따른 폐단의 개선을 건의하였다.

그뒤 장령을 거쳐 1519년 7월에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이때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 대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같은해 11월에 기묘사화가 발생하였을 때, 그는 사헌부집의로서 조광조 일파가 득세시에 심히 교만하고 방종하였다고 비난하고, 현량과(賢良科)의 파과(罷科)와 그 급제자의 파방(罷榜)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광조 일파를 공격하였다.

그뒤 동부승지·참찬관·강원도관찰사·대사간·이조참의 등을 거쳐 1525년 12월에는 특별히 통정대부에 승진하면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다.

이어서 우부승지·병조참판 및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고, 예조판서·우참찬·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조판서 재직시에는 간신인 병조판서 이기(李芑)의 비행을 공격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이기의 모함을 받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우찬성·좌찬성에 승진되었고 1541년 11월에는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이 임명은 중원(中原)에서의 오랑캐〔㺚子〕의 침입과 같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자 중신을 파견하여 축성(築城)·입거(入居)문제의 처리와 사신왕래에 따른 폐단제거 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왕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그뒤 인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尹元衡)·이기 등의 모함으로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윤임(尹任)·유인숙(柳仁淑) 등과 함께 삼흉(三兇)으로 몰려 종사(宗社)를 모위(謀危)하였다는 죄목으로 처벌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절도유배형(絶島流配刑)에 처해져 서천으로 귀양갔지만, 온양에 이르러 사사(賜死)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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