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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하현짐의차록변무(車錄辨誣);차원부설원기의 거짓을 밝힌다. -류주환-
하진현(河晉賢)의 "차록변무(車錄辨誣)" - 차원부설원기의 거짓을 밝힌다

- 류주환, 2011. 4. 5.   


1. 서론

조선시대에 이미 "차원부설원기"("운암선생실록", "차원부설원록", "차문절공유사" 등의 여러 이름으로도 불림; 이하 설원기)가 위서임을 간파한 선각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남극관(南克寬), 황윤석(黃胤錫), 이선(李選), 홍계희(洪啓禧) 등이다. 비록 소수에 불과했지만 때로는 대의명분이 진실보다 중요시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에 칼에 목이 들어와도 굽은 것을 곧다 하지 않는 선비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고,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 역사적 사실의 규명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차원부설원기"에서 가장 부당하게 다뤄져 있는 인물은 바로 차원부 자체이다. 그는 현재 주장되는 과거급제 사실도, 관력(官歷)도 모두 근거가 없고, 설원기에 그려진 행적을 뒷받침할 증거도 전무하다. 그가 받았다는 시호라는 문절공도 내린 적이 없음은 아예 "일성록"에 세 번이나 증명이 되어 있다. 이런 자취 없는 인물을 내세워서 한없이 높이고 그 위아래의 가계를 기록하여 집안을 높이는 것이 설원기의 위작 목적이다. 설원기에는 차원부 위의 10여대의 선조들의 혼인관계가 기록되어 있는데, 조작된 것임이 연구논문에서 증명되어 있다.

그리고 설원기에서, 비록 다른 면에서지만, 차원부와 마찬가지로 부당하게 다뤄지는 인물이 하륜이다. 차원부를 높이는 수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집안의 4명의 얼자(孽子 = 庶子(서자))들을 동원하여 그가 적자(嫡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 얼자들이 차원부가 자신들의 출신을 족보에 밝혔다 하여 원한을 품고 있다가 조선 초의 왕자의 난의 혼란함을 이용해서 70여명의 일가와 함께 참혹하게 죽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도전, 조영규, 함부림, 하륜인데 이들은 처음에는 '4얼'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하륜이 대표로 등장하여 '일흉(一凶)'이라 불렸다. 하륜은 또 '난신적자(亂臣賊子)', 곧 '나라를 어지럽힌 신하이며 불측한 사람'이라고 불렸다. 4얼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상세히 논하고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지만, 간단히 말해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날조이다.

태조에게 혁명가(革命家) 정도전이 있었다면 태종에게는 경세가(經世家) 하륜이 있었다. 하륜은 태종을 도와 조선을 강력한 왕권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또 외교에도 능력을 발휘하고 신문고 설치를 건의하고 태조실록을 편찬을 지휘했으며 최초로 단군을 정사(正史)에 올렸다.

태종 16년(1416년) 그가 70세로 죽었을 때 실록의 기자(記者)는 그를 극찬한다. "하륜이 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복 차림으로 묘당(廟堂)에 이르러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 몸을 가지고 물건을 접하는 것을 한결같이 성심으로 하여 허위가 없었으며, 종족(宗族)에게 어질게 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실(信實)하게 하였으며, 아래로 동복(僮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다. ...." 하륜에게 내려진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와 잘 어울린다.

온갖 사람들의 전면에 나서서 강력한 정책을 밀고 나간다면, 그 정책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필경 그 누구에겐가는 원한을 사거나 적어도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하고 기틀을 다져가고 있던 변환기에, 왕권에 강력한 뜻을 두고 있던 이방원(태종)을 도운 왕으로 세우고 각종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지략가와 정치가였던 하륜에게 특히 야사에서 몇 군데 부정적인 얘기가 발견된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출신을 드러냈다는 이유 때문에 수 십 명의 사람들을 참혹하게 죽였다는 설원기의 극심한 묘사는 그 자체로서도 전혀 역사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정도를 한참 넘어선,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모함이기도 하다.

필자는 몇 년 전부터 하륜의 집안에 연락을 시도했다. 설원기에서 하륜이 그토록 그릇 매도당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아니, 지금도 차문(車門, 연안차씨 가문)에서 집안의 내력을 언급할 때마다 하륜을 짓밟아 낮추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가문을 높이고 있음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전에는 연락할만한 마땅한 곳도 찾아지지 않아서 겨우 연락된 몇 분에게만 설명을 해주고 말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찾아보니 인터넷 사이트도 잘 구축이 되어 있어 문중 일을 하는 몇 분의 연락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설원기에 대한 문중의 반응도 궁금했지만 혹시 집안에 설원기 관련한 문헌이나 사료가 내려오는 것이 없을까도 궁금했다.

필자의 연락에 반응을 보여 오신 분이 선생님이면서 문중일도 보시는 하만흥씨였다. 필자가 쓴 글들을 모아 책자로 만들어서 집안에서 검토하고 있다고 했고, 집안에서 찾아낸 사료를 소개해 주셨다. 그것이 이 글의 제목인 "차록변무"라는 글인데, 한문을 직접 번역하셨다.

이 글에서는 먼저 "차록변무"가 어떤 글인가를 요약하고, 그 원문과 하만흥씨의 번역을 제시한 후, 몇 가지 관련된 사료와 토론을 덧붙였다.


2. "차록변무"란 어떤 글인가

제목 "차록변무(車錄辨誣)"에서 '차록(車錄)'은 "차원부설원록"을 뜻한다. 이것은 "차원부설원기"(설원기)라는 명칭으로 대표되는데, 여러 다른 이름들로 불린다. "차록변무"란 '설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밝힌다'는 뜻이다. 이 글은 조선의 유학자인 하진현(河晉賢 1776-1846) 선생의 글이다. 그의 호가 용와(容窩)인데, 하륜의 방손(傍孫)이며, "용와선생문집(容窩先生文集)"(이하 용와집)을 남겼다. "차록변무"는 용와집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은 "차록변무"의 원문과 하만흥씨의 번역 및 주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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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原文)
車錄辨誣
車錄有世亂立功之說 謹按東閣雜記 雲巖留宿大內三日 而闕門之變作 若如錄中之言 翦除兩藩 退斥三峰 謇謇爲太宗謀忠 密勿啓沃 則闕門之變 何從而作 而設有是變 定社之日 有功必賞 有罪必刑 則雲巖之獨不策勳 而竟受顯戮 何哉 其所云云節節 可知誕妄也
車錄有陰邪酒之說 今按國乘及野史 餞席覆杯 汚瀎御衣 規畵寢室 奠安宗社 正廟親製諭文中 潭潭杯酤扶我羲御者是也 當時集賢諸士 獨何見聞不到 指以爲陰邪酒 而肆然筆之於書耶
車錄有擅殺兩藩太宗不知之說 按乘史 則公以湖伯 覆杯餞席 翌曉發行 留待事成於衿川之地 及變出 太宗躬執 凱仗力扶元儲 斬充之擧 誅管之事 蓋出於爲宗社不得已之地 而若其密勿之策 旋轉之機 皆出於公 故勘定大禍 擧爲首揆 諭文中 猶魚有水伯仲伊呂者是也 兩藩卽太祖之愛子 太宗之親弟 則夫誰敢私自擅殺 而雖時君世主 斷不當日一容貸也 豈以太宗之聖 不報同氣之深讐 而反作定社之元勳耶
車錄有十年爲僧之說 按墓誌 則公十四歲中太學試 十九歲登廷試第 歷敭淸華 以崇儒術斥左敎爲已任 卞春亭文曰 擧世佞佛 公獨麾之 尹淸香銘曰 觝排異端 倡鳴道學 魚大諫疏曰 經學大臣河崙 革寺利削田民 以爲小正之始 蓋我朝之崇儒斥佛 自公而權輿 則托跡禪門 決無考據也
車錄有忌嫡滅口之說 按邑誌 姜河兩姓 晉之著閥也 公自侍郞公以下九世 登第世掌文任 諭文中 晉陽之望奕世簪組者是也 考晉陽君 娶姜尙書承祐之女 姜氏自通亭公 前後宰輔相繼 鼎甲一時 則豈其娶妻 必車門之孼屬乎 設有是事 何傷於外外之家 而赤其族而火其譜乎 原頫之子 被竄而得生 則豈有不殺其子 而先赤其族乎 車氏之譜 至今尙傳 則投火之說 同歸於鑿空也
車錄有盡殺一門自上不知之說 按稗說 則太宗履阼之後 原頫受刑 以其有讒間之罪 而一門奸連 擧多竄斃 今其言曰 河相 因其私怨 不由君命 而以馬尾穿舌 縱鐵騎推殺七十餘人於兩原之間 信有是事 則實非細故 而衆口莫防 百目難掩也 以太宗之明 階前萬里 無遠不燭 而況此兩原 在輦轂咫尺之地乎 謂之自上不知 都不成說也車錄有李孟畛誣公之疏 按 李公牧隱先生之孫也 嘗出入於公之門 親炙甚密 若見得公 不是處 如錄中之言 則必不請賢祖之墓銘 以爲記德之信筆 而又豈肯與之通家 以其妹妻公之子耶
車錄有尹子雲河生腹釰之說 按 尹公卽淸香堂淮之孫也 淸香受業公門 淵源明的 祭公之詞曰 才爲王佐 學冠儒宗 恩義俱全 比邸山而增重 涓埃莫報 曾豺獺之不如 銘公之文曰 灑落胸中 霽月光風 德崇業廣 宜國黃耉 若如錄中之言 有腹釰之詩 則乃家之悖孫也 豈有文憲公之賢 而操他人之戈 入其祖之室乎
車錄有六臣奉敎撰 按丹溪河先生文集跋曰 雪冤記事 不但其文字荒陋 斷不出於先生 而攷其年月 乃在景泰丙子五月 竊想其時 熱血苦衷 噴薄弸蕩 與神爲謀 與天相抗 則此等閒漫文字 萬萬不留心明矣 後之托名贗作者 多見其欲巧而破綻爾 遂爲刪去 今觀車錄 則奉敎之撰 在於五月之晦 謀復之禍 出於六月之初 則日之相間不過三四也 端廟擯處別宮 此何等時 而一原頫冤不冤 何關於宗社之存亡 而有此張皇著述耶 噫 古之人看文字而知其荒陋 攷年月而辨其贗托 而今之人 專昧本朝之乘史 不察當日之事實 而隨唱隨和 因謬成謬 自陷於非理之罔 寧不惜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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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차록(車錄)[1]의 거짓을 밝힘
                                                             방후손(旁後孫) 하진현(河晉賢)[2] 삼가 짓다.

    『차록(車錄)』에는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 공을 세웠다'는 주장이 있다.
    『동각잡기(東閣雜記)』[3]를 찬찬히 살펴보니, "운암(雲巖)이 대궐 안에서 사흘을 머물러 묵었는데 궐문에서 변란[4]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만약 차록 속에 있는 말과 같이, 양번(兩藩)[5]을 제거하고 삼봉(三峯)[6]을 물리치고 곧은 말로 태종(太宗)을 위하여 충성스러운 사람들과 의논하고 자세하게 태조(太祖)에게 충간하였더라면 궐문의 변란이 어떻게 일어났겠는가?
    설령 변란이 있었더라도 사직이 안정되었을 때, 공적이 있었다면 상을 받았을 것이고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운암만 유독 공훈이 기록되지 않고 마침내 법에 따라 죽임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차록에 기록된 것들은 절절이 허무맹랑한 거짓말들이다.

    『차록』에 '음험하고 사악하게 술을 부었다'라는 주장[7]이 있다. 지금 국사(國史)와 야사(野史)를 살펴보니, 전별하는 자리에서 술잔을 엎어 어의(御衣)를 더럽혀서 침실로 가게 함으로써 종사(宗社)를 안정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정조(正祖) 몸소 지은 「유문(諭文)」[8] 중에, "잔 가득 계명주(鷄鳴酒) 부어[潭潭杯酤], 우리 왕실에서 나라 다스리는 것을 도왔네.[扶我羲馭]"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 집현전의 모든 학사들만 유독 이것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이 없어서, '음험하고 사악하게 술잔을 쏟았다'라고 꼬집고 마침내 차록에 기록하였겠는가?

    『차록』에 "양번(兩藩)을 멋대로 살육하였으나 태종(太宗)은 그 사실을 몰랐다."는 주장이 있다.
    국사(國史)를 살펴보니, 공은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그 전별연에서 술잔을 엎지른 다음 날 새벽에 길을 떠나서 금천(衿川) 땅[9]에서 머물면서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란이 일어났을 때, 태종이 몸소 나서서 군사력에 의지하여 승리를 거두고 동궁[10]을 세웠는데, 제거하고 보충하는 일과 주살하여 다스렸던 일은 대개 종사(宗社)를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비밀스러운 계책과 주선하는 책략은 모두 공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큰 재변(災變)을 헤아려 안정시키는데, 공을 등용하여 재상(宰相)으로 삼았던 것이다. 「유문(諭文)」에서 "고기가 물에서 노는 듯하니[猶魚有水],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뒤지지 않네.[伯仲伊呂]"라고 하였던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양번(兩藩)은 태조(太祖)가 아꼈던 아들들이고, 태종(太宗)의 친근한 아우들이니, 대저 누가 감히 혼자서 멋대로 이들을 죽일 수 있었겠고, 비록 당시의 군주(君主)가 이런 짓을 했더라고 결단코 하루도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태종과 같은 밝은 덕으로 동기(同氣)의 깊은 원한을 갚지 않고, 도리어 종사를 안정시킨 최고의 공적을 세운 사람으로 인정했겠는가?

    『차록』에 "십 년간 승려 생활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묘지(墓誌)를 살펴보니, 공은 14세에 태학(太學)의 시험에 합격하였고, 19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맑고 화려한 관직을 두루 지내면서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다.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11] 의 글[12]에서 "온 세상이 부처를 섬기나(擧世佞佛), 공은 홀로 이를 물리치셨네.(公獨麾之)"라고 하였고, 청향(淸香) 윤회(尹淮)[13]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에 " 이단을 배격하고 도학(道學)을 밝히셨네."라고 하였으며, 대간(大諫) 어변갑(魚變甲)[14]의 『벽불소(闢佛疏)』에서 "경학대신(經學大臣) 하륜이 사찰을 혁파하고 사전(寺田)과 노비를 삭감하여 소정(小正)의 실마리를 열었다."라고 하였다. 대개 조선이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절간에 몸을 맡겼다'라는 것은 결코 근거가 없는 말이다.

    『차록』에 "적통(嫡統)을 증오하고 입막음을 하려고 원부(原頫) 일족을 몰살시켰다."라는 주장이 있다. 『읍지(邑誌)』를 살펴보면 '강(姜) ․ 하(河) 두 성씨는 진양(晉陽)의 벌족이라고 하였다. 공은 시랑공(侍郞公) 이하로 9세손인데,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은 한 시대의 문임(文任)[15]을 장악하였다. 「유문(諭文)」중에서 "진양(晉陽)의 명망(名望)이 있는 집안[晉陽之望], 빛나는 고관(高官)들이 대를 이었네.[奕世簪組]"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공의 아버지 진양군(晉陽君)은 상서(尙書) 강승우(姜承祐)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강씨(姜氏)는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姜淮伯)[16]에서부터 재상들이 앞뒤로 이어져서 한 시대의 뛰어나고 성대한 집안이 되었는데, 어찌 차문(車門)의 서얼(庶孼)에게 장가들었겠는가? 설령 이런 일이 있었더라도, 차문(車門)은 외가(外家)의 외가 집안[17]인데 무슨 상관이 있어서 그 족속을 모두 죽이고 그 족보를 불태웠겠는가? 원부(原頫)의 아들이 유배를 가서 살아남았다면, 어찌 그 아들을 죽이지 않고 먼저 그 족속을 모두 죽였겠는가? 차씨의 족보가 아직 전해지고 있는데, 그 족보를 불태워 없앴다는 주장은 결국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닌가?

    『차록』에 "한 집안 사람을 모두 죽였는데 위에서 모르게 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패설(稗說)을 살펴보니, "태종이 등극한 뒤에 원부(原頫)가 형벌을 받았는데 이간질을 한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집안 전체가 간사한 무리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대부분 유배가고 죽임을 당하였다."라고 되어 있었다. 지금 차록에 "하상국(河相國)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말꼬리로 만든 노끈에 혀를 뀌어놓고 철갑을 입은 기병(騎兵)을 풀어 양원(兩原)의 사이[18]에서 70여 인을 추살하였다."라고 하였다. 진실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참으로 작은 사건이 아니므로 여러 사람의 입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고 여러 사람의 눈을 가릴 수 없었을 터이다. 태종의 총명함은 탑전(榻前)에서 만 리 밖을 밝히지 않음이 없었는데, 더구나 이 양원(兩原)은 도성(都城)에서 가까운 곳이니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를 두고 '임금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은 모두 말이 되지 않는다.

    『차록』에 "이맹진(李孟畛)[19]이 공을 모함하는 소(疏)를 올렸다."라는 말이 있다. 살펴보니, 이공(李公)은 목은(牧隱)선생의 손자로서 일찍이 공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아 매우 가깝게 지냈다. 만약 공을 알았다면 이렇게 처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록 속의 말과 같다면, 훌륭한 할아버지의 묘명(墓銘)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여 그 덕망을 기록할 만한 믿을 수 있는 문장가로 여겼겠는가? 그리고 어찌 즐겨 서로 집안과 교유하고 그의 누이를 공의 아들에게 시집보냈겠는가?

    『차록』에 "윤자운(尹子雲)[20]이 '하생(河生)이 뱃속에 칼을 품었다'라고 읊은 시"가 있다. 살펴보니, 윤공(尹公)은 청향당(淸香堂) 윤회(尹淮)의 손자이다. 청향당(淸香堂)이 공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니 그 연원(淵源)이 분명하고, 공을 제사하는 글에서 "재주는 임금을 도왔고(才爲王佐), 학문은 높아 유림의 종장이었네(學冠儒宗). 은혜와 의리 모두 온전했으니(恩義俱全) 산악에 견주어도 더욱 무겁네(比邱山而增重).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했으니(涓埃莫報), 승냥이나 수달[21]만도 못하네(曾豺獺之不如)."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의 묘갈명(墓碣銘)에 "산뜻한 가슴속은(灑落胸中), 갠 달과 맑은 바람이라(霽月光風). 덕은 높고 하신 일 많아(德崇業廣), 국가의 원로이었네(宜國黃耉)."라고 하였다. 만약 차록의 말대로 '뱃속에 칼을 품었다라는 시'를 지었다면 그는 집안의 패악한 손자이다. 어찌 문헌공(文憲公, 윤자운의 시호)처럼 어진 사람이 남의 창을 들고 그 할아버지의 방을 침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차록』에는 '사육신(死六臣)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지은 글'이 있다. 「단계하선생문집발(丹溪河先生文跋)」[22]을 살펴보니, "설원(雪冤)의 기사(記事)는 그 문자가 거칠고 비루하니 결코 선생이 지은 것이 아니다. 지었다는 시기를 살펴보니 경태(景泰)[23] 병자(丙子 1456)년 5월이다. 그 시기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피 끓는 의기와 괴로운 심사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고 들끓어 귀신에게 의논하고 하늘과도 맞설 때인데, 이같이 한가하고 느긋한 문자를 조금도 마음에 둘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후세에 이름을 훔쳐서 위조한 것은 잘 만들려 하다가 되레 들통이 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마침내 이것을 빼고 싣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지금 차록을 보건대, 임금의 명을 받고 지은 것이 5월 그믐이고,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6월 초에 화를 당하였으니, 그 사이의 기간이 불과 사흘나흘이다. 단종이 별궁으로 내쫓긴 이때는 어떤 시기이며, 일개 원부(原頫)가 원통하건 원통하지 않건 사직의 존망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같이 장황하게 글을 지었겠는가?

    아! 옛사람들이 글을 보고 그 거칠고 비루함을 알았고 그 시기를 살펴서 이름을 훔친 위작(僞作)임을 분별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은 우리 조선의 역사에 아주 어둡고 그 당시의 사실을 살피지 않고 주장에 따라 화응만 하니, 잘못된 것이 또 다른 잘못을 만들어 낼 뿐이고 스스로 터무니없는 속임에 걸려들 뿐이로다. 어찌 애석하지 않으랴!
    [번역/주석: 하만흥]

[1]『차록(車錄)』: 『차원부설원록(車原頫雪冤錄)』을 가리킨다. 이 문헌이 1456년에 찬술되었다고 하였으나, 1580년 즈음에 처음 나온 뒤에 계속 개작되고 보완해온 위서(僞書)로 판명 났다. 이 책의 전편에 걸쳐 연안(延安) 차씨(車氏)의 상대(上代) 가계(家系)를 조작할 목적으로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을 서얼(庶孼)로 폄하하고, 차원부(車原頫)를 죽인 원악(元惡)으로 꾸미고 있는 악서(惡書)이다.
[2] 하진현(河晉賢 1776-1846) : 조선 후기 유학자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고 자는 사중(師仲)이며 호는 용와(容窩)이다. 당시 거유인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등과 교유했으며, 사산초당(士山草堂)을 짓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용와선생문집(容窩先生文集)』이 있다.
[3]『동각잡기(東閣雜記)』 : 조선 명종 · 선조 때의 문신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이 찬술한 야사(野史)이다.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조선 건국부터 선조 때까지의 정치 상황과 명신(名臣)들의 행적을 적고 있다.
[4] 궐문에서 변란 : 1398년에 있었던 제1차 왕자의 난을 가리킨다.
[5] 양번(兩藩) : '두 명의 왕자(王子)'라는 뜻이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제거되었던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소생인 방번(芳藩) · 세자였던 방석(芳碩)을 가리킨다.
[6] 정도전(鄭道傳 1342-1398) : 여말선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종지(宗之)이고 호는 삼봉(三峯)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제거되었다.
[7] "음험하고……주장 : 차록에는, 문충공 하륜이 신덕왕후(神德王后)의 가까운 친척인 강호(康昊), 강민(康敏)과 사이가 틀어져서 강씨의 일족을 모함하여 그 권한을 빼앗으려 하였다. 그리고 당시 연안 차씨들이 고려와 조선에 걸쳐 최고의 벌족(閥族)으로써, 정종(定宗)의 여자 권속들이 모두 차원부의 직계들이었는데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는 전별연에서 일부러 술잔을 엎어 당시 태제(太弟)였던 이방원의 옷을 더럽힘으로써 실내에서 단독으로 만날 수 있었고, 이 자리에서 이방원으로 하여금 방번(芳藩)과 세자인 방석(芳碩)을 의심하도록 만들었다는 거짓 주장을 말한다.
[8] 정조(正祖)가 지은 「유문(諭文」: 정조 23년(1799)년에 내린 하륜에게 내린 제문(祭文)을 가리킨다.
[9] 금천(衿川) : 지금 서울의 금천구이다.
[10] 동궁(東宮) : 방과(芳果)로 뒤에 정종(定宗)을 가리킨다.
[11]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1369-1430) :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거경(巨卿)이며 호는 춘정(春亭)이다. 조선 초 관인문학을 좌우했던 인물로,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춘정집(春亭集)』을 남겼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2] 글 : 『춘정집(春亭集)』11권에 실려있는 「제진산부원군호정선생문(祭晉山府原君浩亭先生文)」을 가리킨다.
[13] 윤회(尹淮 1380-1436) :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자는 청경(淸卿)이고 호는 청향당(淸香堂)이다. 조선 초기 문신으로,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참의 ․ 집현전 학사를 총괄하는 부제학 ․ 예문관제학 · 대제학과 같은 문한직(文翰職)을 역임하였다. 『청경집(淸卿集)』을 남겼다.
[14] 어변갑(魚變甲 1380-1434) :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함종(咸從)이고 자는 자선(子先)이며 호는 면곡(綿谷)이다. 식년문과에 장원한 뒤, 교서관부교리 · 성균관주부 · 좌정언 · 우헌납 을 거쳐 집현전이 발족되자 응교로서 지제교(知製敎) ·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을 겸임하다가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고성의 면곡서원(綿谷書院)에 제향되었다.
[15] 문임(文任) :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을 가리킴.
[16]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姜淮伯 1357-1402)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백보(伯父)이며 호는 통정(通亭)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좨주가 되었으며,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통정집(通亭集)』이 있다.
[17] 외가(外家)의 외가 집안 : 문충공의 외할머니의 어머니가 차씨의 첩으로 되어 있다. 곧 외할머니가 차씨의 서녀(庶女)라고 조작하고 있다.
[18] 양원(兩原)의 사이 : '양원'은 개성 근교의 송원(松原)과 마원(麻原)이라고 한다.
[19] 이맹진(李孟畛 1374-1456) :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호는 청허재(淸虛齋)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손자이다. 태보(太保)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추증되었다.
[20] 윤자운(尹子雲 1416-1478) :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자는 망지(望之)이며 호는 낙한재(樂閑齋)이다. 집현전학사 윤회(尹淮)의 손자이다. 세조는 그를 위로하고 1469년에는 우의정으로 승진시켰다. 세조 때 좌의정 ․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21] 승냥이와 수달 : 조상의 은덕에 보답할 줄 안다는 짐승이다. 승냥이는 계추(季秋)에 보은(報恩)하는 제사를 지내고, 수달은 맹춘(孟春)에 제사를 지낸다 한다.
[22] 단계하선생문집발(丹溪河先生文跋) : 홍계희(洪啓禧, 1703년~1771년)가 지었다. 그는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는 순보(純甫)이며 호는 담와(淡窩)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23] 경태(景泰) : 명(明) 경제(景帝)의 연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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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토론

3-1. "차록변무"에 관한 토론

이 "차록변무"(이하 변무)에서는 각 부분에서 먼저 "차원부설원기"(이하 설원기)의 내용을 언급하고 그에 대한 반박을 하고 있다. 그런데 설원기와 대조해 보면, 설원기의 구절들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아니고, 내용을 축약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변무에서는 다음과 같은 9가지의 사항에 대해 각각 거짓임을 논증하고 있다.

    (1) 설원기의 차원부와 왕자의 난의 관련 묘사.
    (2) 하륜이 왕자의 난 전에 태종에게 비밀리에 말을 하기 위해 일부러 태종의 옷을 더럽힌 일이 있었다. 이것을 설원기는 흉악하게 표현하고 있음.
    (3) 왕자의 난 때 방번과 방석이 죽임을 당했는데, 설원기에는 태종은 그 사실을 모른 채 하륜이 자행한 일로 묘사되어 있음.
    (4) 설원기에는 하륜을 비방하여 십 년간 승려생활을 했다고 주장함.
    (5) 설원기에 하륜이 차씨집안의 서얼이고 그 사실을 밝힌 차원부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차원부와 그 일족을 몰살시켰다고 묘사함.
    (6) 설원기는 차문 일족의 몰살을 태종이 모르게 행했다고 묘사함.
    (7) 설원기에는 이맹진이 하륜을 모함하는 소(疎)를 올렸다고 말하고 있음.
    (8) 설원기에 윤자운이 지었다는 응제시가 나오는데, 하륜의 행위를 비난하고 있음.
    (9) 설원기는 곳곳에 사육신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지었다고 명기하고 있음.

이들은 대개 지금까지 상세하게 밝혀진 설원기의 거짓 주장들과 상통한다. 그리고 변무에서만 다룬 사항은 (7)과 (8)인데, 이것들은 그 당사자로 거론된 이맹진과 윤자운의 하륜과의 관계를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변무에서 외적인 정보로 명시되어 있는 두 군데에 관심이 끌렸다. 그 중 첫째가 (1)에 언급된 "동각잡기"이다. 변무에서는 "동각잡기"에 "운암{차원부를 지칭}이 대궐안에서 사흘을 머물러 묵었는데 궐문에서 변란{왕자의 난을 말함}이 일어났다"고 쓰여 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차원부를 설원기 외에서 다룬 글이라서 필자가 주목한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설원기에 나온 사건과 행적들을 (하륜이 태종의 옷에 술을 엎지른 것 등의 알려진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설원기가 세상에 나온 16세기 후반 이전의 다른 문헌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엾었다. "동각잡기"는 선조 때 이정형(李廷馨)이 저술한, 고려 말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의 사실(史實)을 서적(書籍) 또는 견문(見聞)에 의하여 연대순으로 수록한 문헌인데, 1605년에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필자는 "동각잡기"에서 차원부가 등장하는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이본(異本)이 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동각잡기가 "知退堂集"(지퇴당은 이정형의 호)에 들어 있어 그것도 살펴보았지만 차원부는 찾아지지 않았다. 물론 동각잡기에 차원부가 등장하는 대목이 있다면 설원기가 세상에 등장한 것이 1580년대쯤이고 동각잡기는 1605년에 나왔으므로 동각잡기가 설원기를 보고 쓴 것일 것임은 자명하다.

둘째는 (6)에 언급된 "패설"이다. 변무는 여기에 "태종이 등극한 뒤에 {차}원부가 형벌을 받았는데, 이간질을 한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집안 전체가 간사한 무리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대부분 유배가고 죽임을 당하였다"고 쓰여 있었다고 말한다. 설원기가 위서라는 주장은 조선시대에도 나왔지만, 이렇게 설원기의 묘사와는 정반대로 '태종이 등극한 후에 차원부와 집안이 죄가 있어 벌을 받았다'는 설명은 변무에서 처음 본 것이어서 무척 흥미롭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이 "패설"이라는 것이 어떤 문헌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물론 이제현의 "역옹패설"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것은 고려 때라 시기가 맞지 않는다. 혹시 "패설"이 일반 명사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위 두 가지는 차원부의 행적이 설원기 이외의 문헌에 묘사된 것으로 보이는 경우라서 상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설원기가 나온 후에 설원기의 묘사를 그대로 옮긴 문헌들이 허다하고, 차원부의 행적과 역사적 묘사가 정사(正史)에 나오지 않거나 정사와 정반대로 되어 있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이미 판명되어 있다.

노파심에 부언하자면, 하진현 공은 차원부의 행적과 태조-태종과의 관계가 무엇인가 있음을 상정하고 글을 썼다. 예를 들어 차원부가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죽었다는 것은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해석은 차원부가 하륜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태종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알려져 있는 차원부의 관력도, 과거급제 사실도 모두 근거가 없으며 태조-태종과의 관계나 왕자의 난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등의 행적도 완전 날조된 것이다. 설원기의 실체를 간파한 유학자도 여전히 일부분에서는 속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설원기의 교묘함에는 경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다른 여러 요소들과 함께 설원기를 지금까지 회자되게 만들었다. 앞으로 "차록변무"가 소개될 때는 이런 지적이 함께 제시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3-2. "제차씨설원록"

하진현 공의 "용와집"에는 "차록변무" 앞에 "제차씨설원록(題車氏雪冤錄)"(차씨설원록에 대해 씀)이 있는데, 여기서는 구체적인 증거는 대지 않고 종합적으로 설원기를 비판하고 있다.



題車氏雪冤錄

事不出於常理之外 理亦在於常情之中 故君子 可欺以其方 難罔以非其道 欺者誑之以理之所有 罔者眛之以理之所無也
近世有所謂車氏雪冤錄者 未知其纂出於何時之何人 而其事則雲庵之枉死也 其罪則歸之於太宗朝二三大臣而尤加詆誣於浩亭河先生
蓋當時伏罪漏網之餘孽 潛懷射怨之暗箭 造語於虛無之地 借構於䵝昧之時以此無理之言 輒假六臣之名乃敢誣詆先正 略無顧忌人心世道一胡至此於乎
蕭相國曾是刀筆之小吏而不念曹參之宿患 王茂弘僅稱中興之賢輔而 猶恨伯仁之由死 贓貪之劾或及於子瞻之廉潔 帷薄之誚不累於永叔之淸介
語曰雖欲自絶其何傷乎 詩曰愼爾言也謂爾不信

"차씨설원록"에 대해 쓴다

    일이란 당연한 이치를 벗어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이치 역시 인지상정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군자는 사리에 맞는 일을 가지고는 속일(欺) 수 있지만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가지고는 기망할(罔) 수는 없다. (맹자 만장 장구 상) 기(欺)는 이치의 있는 바로써 속이는 것을 이름이오, 망(罔)은 이치가 없는 바로써 어둡게 하는 것을 일컫는다. (논어집주)
    근래에 소위 "차씨설원록"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언제 어떤 사람이 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내용은 운암(차원부)의 억울한 죽음이다. 그 (죽음에 대한) 죄를 태종 때의 두세 명의 신하에게 돌리고 있는데, 그중 특히 호정 하선생(호정은 하륜의 호임)을 무고하고 헐뜯고 있다.
    대개 당시 죄를 받기도 하고 빠져나가기도 한 그 여얼(餘孽: 망한 사람의 자손)들이 원한의 비방하는 화살을 쏘려는 생각을 품고 허망한 곳에 말을 만들고 어두컴컴한 때를 빌려 이런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꾸며내어 사육신의 이름을 거짓으로 사용하여 감히 선대의 현인을 무함하고 비방하였다. 사람들의 마음과 세상의 도리(道理)를 꺼리어 조심함이 전혀 없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소상국(蕭何)은 일찍이 글씨를 쓰는 천한 벼슬아치였지만 조참(曹參)과의 숙환(宿患)을 생각하지 않았고, (蕭規曹隨의 고사) 왕무홍(王導)은 나라를 중흥시킨 현명한 보상(輔相)이라고 불리지만 오히려 백인(周顗)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한탄하였다. (伯仁由我의 고사) {어떤 일에 남 탓을 하지 않음을 말함}
    재물의 탐냄에 대한 탄핵이 혹시 자첨(蘇軾의 字)의 청렴결백에 미칠 수 있고, 규방이 문란하다는 꾸지람도 영숙(歐陽脩 의 字)의 맑고 고결함에 허물이 되지 않는다. {청렴한 인물은 남이 뭐라 흠을 잡아도 영향을 받지 않음을 들어 하륜을 옹호함}
    논어에 말하였다: 비록 스스로 관계를 끊으려 한들 어찌 해를 입힐 수 있으리오. (논어 자장)
    시경에 말하였다: 그대 말조심하시오, 당신 못 믿겠다 말하리라. (시경 小雅 節南山之什 巷伯)
    [번역: 류주환]


하륜이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고 있음을 간결하고 힘 있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모함하려고 해도 하륜의 청렴결백함에 해를 입히지 못할 것임을 밝히면서,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설원기의 위작의 주체들을 향해 못 믿겠으니 말조심하라고 일갈을 하고 있다.

3-3. "호정집" 발문

"호정집(浩亭集)" 곧 "호정선생문집(浩亭先生文集)"은 하륜(1347-1416)의 문집이고, 1847년에 초간이 나왔다. 하륜의 호는 '호정'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호정집"의 발문을 하진현이 썼는데, 그 중간쯤에서 설원기를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는 발문 중에 직접 관련되는 부분만 소개한다.

浩亭先生文集 跋 - 河晉賢

[전략]
世所謂車雲巖雪冤錄。以其冤死歸怨於河,咸,鄭三相。而搆捏無根。詆詬罔像。尤及於公。言亦汚口。不足爲辨也。
蓋鄭道傳。時以首相。陰結黨援。有挾幼擅政之意。間人父子。戕人兄弟。危人宗社。滔天禍機。殆哉岌岌。而彼雲巖。適際此時。出入大內至再至三。形跡旣涉於可疑之端。痕影自露於莫顯之中。
太宗之心。一則道傳。二則原頫。故肉口之斬。先之於手劍之下。穿舌之誅。繼之於履祚之後。蓋罪犯興戎之機。而變出難言之地。故雖置赤族之典。而竟有伸理之日也。
今觀雪錄。則辭旨慘刻。體製奇巧。假借諸公之名。而實出一人之手也。如莊書之誚侮孔門。庾史之誣毀陶威。搆成一部之文案。誑惑百世之盲瞽。而苟有知言之士。則詖遁之辭。亦豈可欺之方耶。
若因私怨。枉害賢良。則如必報睚眥之范叔。不救伯仁之茂弘。特一救時之相。此豈公所屑爲哉。殺一不辜。得天下不爲。公之所以輔相哲辟。而以伊,呂之心爲心也。
如靑天白日。廓乎昭明。而彼蛙觀之小。犬吠之妄。多見其不知量也。其何有損於公哉。
[후략]

    세상에 전하는 이른바 "차운암설원록"이라는 것은 차원부의 억울한 죽음을 하륜, 함부림, 정도전의 세 명의 재상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근거 없는 말을 날조하고 있지도 않는 사실을 교묘히 꾸며댔다. 특히 하륜 공에 이르러서는 표현도 더러워서 따져 밝히기에도 적당치 않다. 당시 정도전은 수상(首相: 원래는 영의정의 뜻이나, 여기서는 고위 관직)이었는데, 몰래 도와주는 무리들을 모아서 어린아이(방석과 방번)를 끼고 정사를 멋대로 휘두르려 했다. 그는 아비와 아들 사이를 이간시키고, 형제를 죽였으며, 종묘와 사직을 위태롭게 하였으며 하늘까지 퍼지는 화(禍)의 기틀이 몹시 위태로웠다. 저 운암(차원부)은 이때를 맞이하여 궁궐에 몇 차례 드나들었는데 형적이 이미 의심할만한 정도를 넘어 있었고 자취가 감출 수 없어 저절로 드러났다.
    태종의 마음이 하나는 정도전에 가 있고 다른 하나는 차원부에게 가 있었다. (제거하려는 마음을 뜻함.) 그리하여 혈육을 벨 때에 (방번과 방석의 제거) 그들을 먼저 칼날 아래 두어 혀를 뚫고 베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 그들의 죄가 싸움이 일어난 때에 지어졌고, 변란 때문에 무어라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운 처지라서 비록 (전에) 멸족의 처분을 받았어도 마침내 도리를 펴는 날이 있었다. (후대해 주었다는 뜻)
    지금 설원기를 보니 말의 취지가 참혹하고 그 체재(體裁)가 기이하고 교묘하다. 여러 사람의 이름을 빌려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 장자의 글이 공자의 문하를 업신여긴 것과 같고 사가(史家)가 도간(陶侃)을 비방한 것과 같이, 하나의 글을 써서 미혹하여 오래도록 소경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진실로 사리가 통하는 인사(人士)가 있으면 편벽되고 숨기는 말이 어찌 그를 속일 수 있으리오.
    만일 사적인 원한으로 인해 어질고 착한 이를 무고하여 해를 입혔다면 눈을 흘긴 것도 반드시 보복하는 범저(范雎)와 같고, 주의(周顗)를 구하지 않은 왕도(王導)와 같은 것이다. 특히 세상을 바로잡는 모습의 하나일 뿐 이 어찌 공(하륜)이 기꺼이 행한 일이리오.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맹자에서 나온 구절)은 공이 어질고 밝은 임금을 도왔고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은 까닭이다.
    맑은 하늘의 밝은 해처럼 크고도 환하도다. 그러나 저(설원기)는 개구리가 보는 것 같이 협소하고, 개가 짖는 듯 망령되고, 그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자주 보인다. 그 어찌 공에게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힐 수 있겠는가.
    [번역: 류주환]


이 글에서도 "차록변무"와 일관되게, 차원부가 왕자의 난에 연루되었고 태종(이방원)이 직접 죽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흥미로운 설명이지만, 현재 밝혀진 바로는 차원부 자체가 역사성이 있는 인물이 아니어서 이런 묘사는 하진현 공이 이 부분에서 여전히 설원기에 속아 넘어간 것이 분명하다. 또한 태종이 나중에 차원부의 후손을 용서해주었다는 뜻의 표현도 나오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하진현 공은 설원기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위작자가 한 사람임을 간파하고 있고, 그 내용이 허망(虛妄)함을 설파하고 있다.


4. 맺는말

하진현 공이 쓴 설원기 관련 글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같은 맥락의 주장 혹은 묘사를 하고 있는데, 설원기에 나온 차원부의 행적들을 설원기와는 달리 해석하고는 있지만 일부 사실 자체는 있었다고 파악하고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하진현 공이 설원기의 교묘함에 다시 속아 넘어간 부분이다. 설원기 자체의 현란한 묘사들도 그런 기망에 일정한 역할을 했겠지만, 설원기가 다른 책에서 다뤄진 것을 보고 그것을 다시 설원기에 나온 이야기들의 사실적 근거로 받아들이는 오류가 더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날 수 있다. 곧 어떤 책(A)이 어떤 주장을 하면 그 주장을 다른 책(B)이 인용한다. 그런 다음 그 책(B)을 다른 책(C)이 또 인용하고 해서, 나중에는 여러 사람이 다루니 처음 주장이 사실로 굳어져 버린다. 더구나 간혹 B, C의 묘사를 다시 A에 넣어 책을 만들기도 한다. 바로 필사본 설원기를 제외한 다른 설원기의 본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문헌을 부풀려 신빙성을 높였다.
지금은 설원기의 정체가 잘 밝혀져 있다. 간단히 말해 설원기에서 찾아낼 수 있는 역사적 진실은 전무하다.

설원기에서 그릇 다뤄진 진양하씨는 그 서문의 저자로 조작된 하위지 선생과 이 글의 중심 인물인 하륜 선생이 있다. 가문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그런 조작을 한 것이다. 하위지를 서문의 저자로 조작한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가문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하륜에 대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온갖 험악한 날조를 한 것에 대해서는 감탄스럽기조차 하다. 이와 유사하게 설원기와 해당 문중에서 여타 가문을 속여 넘긴 일은 다반사로 이루어졌다. 그 중 하나가 순천박씨 집안이다. 바로 설원기의 핵심인 본문(記)를 작성한 것으로 조작된 박팽년 선생이 순천박씨인데,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일찍이 18세기에 설원기를 찍어낼 때 박팽년의 후손인 박승동(朴昇東), 박성동(朴聲東)에게 서문과 발문을 받아내었고, 최근 1998년에 "국역 차원부설원기"를 발행할 때에도 순천박씨종친회장을 발간위원회 고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필자는 몇 년 전에 순천박씨 문중에 설원기의 정체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었다.

위서(僞書)요 악서(惡書)인 "차원부설원기"에서 시작한 악의 뿌리는 깊기도 해서 한 부분을 캐내면 또 다른 부분이 죽근(竹根)처럼 또 뻗어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이 글은 근본적으로 뿌리를 뽑고자 하는 필자의 노력의 일환이다. 부디 독자들께서 엄정하게 살펴 더 이상 사회와 역사와 민족의 정기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륜을 애곡함
하륜을 애곡한다. 물경(勿驚) 수 백 년 동안 극심한 부당함을 당해온 하륜을 말이다. 만일 혼백(魂魄)이 있어 이승의 인생세간을 지각한다면 그 얼마나 원통했을까. 시퍼런 거짓의 칼날에 찟긴 언어의 부관참시였다. 상상만 해도 가슴 저려온다. 이제라도 그를 짓눌러온 그 무거운 차꼬를 풀어 넋을 자유롭게 만들고 그를 위로하는 진혼제(鎭魂祭)라도 올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의 애곡은 지금도 허위가 진실을 짓밟는 부당함 속에 고통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아, 밝은 날이여 오라.


2011년 4월 5일
彩霞 류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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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주환작가의  승인하에 옮김.                                            편집실        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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