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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편집인
  제    목  선산류씨 편
 
 선산류씨 (善山柳氏)

1. 시조

 

선산류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의 사람인 류원비(柳元庇)이다. 그는 류순(柳淳)의 아들로 선산군(善山君)에 봉해졌는데, 후손들이 문화류씨에서 분적, 선산을 관향으로 삼아 대를 잇고있다.

 

2. 선산류씨의 유명한 인물

 

1)  류성춘(柳成春)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천장(天章), 호는 나옹(懶翁)·성은(城隱). 계린(桂麟)의 아들이며, 대사간 희춘(希春)의 형이다.

1514년(중종 9) 생원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춘추관의 기사관을 거쳐 이조정랑에 이르렀으나, 1519년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대사헌 이항(李沆)과 대사간 이빈등의 합계(合啓)에 의해서 좌상 안당(安塘), 좌찬성 최숙생(崔淑生)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뒤 윤구(尹衢)·최산두(崔山斗) 등과 시주로 교우하였으며 호남의 삼걸이라 불렸다.

 

2)  류희춘(柳希春)

1513(중종 8)∼1577(선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해남출신.

계린(桂麟)의 아들이며, 부인은 여류문인인 송덕봉(宋德奉)이다.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간이다. 김안국(金安國)·최두산(崔斗山)의 문인으로서,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그뒤 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을사사화 때 김광준(金光準)·임백령(林百齡)이 윤임(尹任)일파 제거에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때 국경지방의 풍속에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그가 교육을 베풀어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졌다.

1565년 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삼정승의 상소로 석방되었다. 직강·응교·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이어 장령·집의·사인·전한·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5년(선조 8) 예조·공조의 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여 낙향하였다. 경전에 널리 통하였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였다. 시강원설서 재임시에 세자(후의 인종)의 학문을 도왔고, 선조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經史)강론에 종사하였다. 선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배웠으므로 항상 이르기를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고 하였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經書)의 구결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하여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성격이 소탈하여 집안살림을 전혀 할 줄 몰랐으나 사람들과 세상이야기를 할 때나 학문에 대한 것, 정치하는 도리에 관한 말을 꺼내면 그의 투철한 소견과 해박한 지식은 남들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외할아버지 최보(崔溥)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항(李恒)·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지방의 학풍조성에 기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미암일기》·《속몽구 續蒙求》·《역대요록 歷代要錄》·《속휘변 續諱辨》·《천해록 川海錄》·《헌근록 獻芹錄》·《주자어류전해 朱子語類箋解》·《시서석의 詩書釋義》·《완심도 玩心圖》 등이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록 國朝儒先錄》이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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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 류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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