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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진주류씨(토봉)편

 

 

진주류씨 (晉州柳氏:土本柳)

 

氏族의 淵源과 本貫 由來

 

진주류씨(晉州柳氏)는 류정(柳挺)을 시조(始祖)로 하는 토류계(土柳系)와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이봉한 류차달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류인비(柳仁庇)를 시조로 하는 이류계(移柳系:移封晉州柳氏系)가 있다.
그런데 오래도록 종계(宗系)에 관한 이론(異論)이 있어, 문화류씨의 후예, 즉 류공권(柳公權)또는 류언침(柳彦沆(琛))이 본관을 진주로 고쳤다는 등의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진주류씨 세보기사 보계변증(世譜記事 譜系辨證)에서 류사규(柳思規;移柳)등의 변론 등으로 이를 부정하는 근거를 밝히고 있어 보계(譜系)상으로는 명백히 구별되나 아직도 이 문제는 완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항간에 토류(土柳)인 류정(柳挺)의 선계(先系)가 문화계(文化系)에서 분파된 것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이는 진주류씨 6세손인 류인비(柳仁庇)를 문화류씨 10세손인 류성비(柳成庇)의 동생으로 착각 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현재 일본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에 소장돼 있는 최충헌(崔法獻;柳挺의 외손자) 묘지명(墓誌銘)이나, 문화류씨 가정보(嘉端譜;1562년발간)에 실린 류종례가장(柳宗禮家藏) 임씨호적(任氏戶籍;1332년때 것),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1475년발간)에 실린 권윤균(權允均)의 부인 류씨세계(柳氏世系),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실린 고려 공민왕 9년(1360년)의 진사 류원 세계(進士柳源世系), 1624년(인조2년)에 발견된 청주 가산(駕山)의 류덕림소장(柳德霖所藏)이씨(李氏:軍資監正 柳珦의妻)호적 등을 통해 살펴 볼 때, 또 이들 문헌을 신빙성있다고 주장한 당대 명보가(名譜家)들의 증언을 인용수록한 진주류석의 갑진보 서문(甲辰譜序;1724년)과 보계변증기사(譜系辨證記事)는 이러한 설이 사실이 아님을밝힌 바 있다. 따라서 진주류씨가 문화류씨에서 분관(分貫)된 것이 아니며, 시조 이래 진주인(晉州人)으로 알려져왔음을 알 수 있다. 시조는 류정(柳挻)으로 고려 중기에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좌우위상장군(金紫光祿大夫 中書令左右衛上將軍)에 이르고 진강부원군(晉康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진주(晉州)로 삼게 되었는데, 진주의 옛이름은 진강(晉康), 진녕(晉寧), 진원(晉原), 진양(晉陽), 진흥(晉興), 진산(晉山), 진천(晉川), 청양(書陽), 청천(菁川), 강주(康州)등 여럿으로 불렀음이그 자손들이 받은 봉군작호(封君爵號)에서 알 수 있다. 류정(柳挺)은 고려 희종 대에서 고종조에 걸쳐 정계에서 크게 활약했던 진강후 최충헌(晉康侯 崔忠獻)의 외조부로, 오래도록 진주에서 살아 온 토족(土族)출신이다. 그래서 문화류씨에서 분적(分籍)됐다고 주장하는 이류계(移柳系)와 구분, 토류(土柳:本柳)라 부른다.

진주류씨 시조 사당 진강사(晋康祠) 전경

소재지: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내리

  진주는 경남 서남부에 위치한 삼남(三南)의 요처로,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이었는데, 신라 문무왕이 빼앗아 주(州)를 설치하고, 신문왕(神文王)때는 거타주(居陁州)를 분할해서 진주총관(晉州摠管)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때 강주(康州)로 개칭했다. 그리고 고려 성종 2년에 목(牧)을 설치했다가 14년에 진주(晉州)라 고쳐 절도사(節度使)를 두었고, 현종(顯宗)때는 안무사(按撫使)로 개칭했다가 뒤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는데, 조선조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讓府)로 승격시켰다가 태종 때에 지금의 명칭으로 다시 고쳐 목(牧)으로 만들었다.

진주류씨는 상술한 류정(柳挺)을 시조로 하는 성씨인데, 시조 이래 5대에 걸처 계속 봉군되었다. 유정은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류숙(柳淑)으로 신호위 보승중랑장(神虎衛保勝中郞將)을 지내고 딸은 우봉최씨가(牛峰崔氏家)의 최원호(崔元浩)에게 출가하여 최충헌(崔忠獻), 최충수(崔忠粹)를 낳았는데, 충헌의 누이를 다시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최충헌 집권시에 우봉 최씨가에서 사위와 며느리를 얻었음은 당시의 진주류씨 가문을 짐작케 하며, 또 그러므로써 진주류씨는 최고의 가세(家勢)를 누렀을 것이다. 이는 진주류씨의 상계를 살펴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니, 시조 이래 7세손에 이르기까지 칠원윤씨 윤수(漆原尹氏 尹秀)집안, 해주최씨 최유엄(海州崔氏 崔有渰)집안, 문화류씨 류언침(柳彦琛)집안, 안동권씨 권한공(權漢功)집안, 남양홍씨 홍언유(洪彦猷)집안 등과 혼인을 맺고 있는데, 당시 최고의 문벌을 자랑하던 이러한 집안들과 통혼한 진주류씨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고려 왕족인 개성왕씨 족보를 보거나, 진주류씨 9세손 류용생(柳龍生)의 족보기록을 보아도 진주류씨는 고려 왕실과 특별한 관계가 있던 문벌(門閥)임을 짐작할 수 있다.

상서공(尙書公;洪林) 유허비각(遺墟碑閣)
소재지: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내리에 있다.

  씨족의 분좌(分派)와 世屠地

  진주류씨의 분파(分派)는 크게 보아 5세손 때 처음으로 나뉘어지는데, 형인 시 양화공 류욱(諡良和公 柳栯)을 파조(派祖)로 하는 양화공파(良和公派)와 동생인 군부총랑류부(軍簿摠郎 柳博)를 파조로 하는 총랑공파(摠郎公派)둘로 나뉘어진다.

양화공파는 양화공의 손자인 안간공 류혜손(安簡公 柳惠蓀)을 파조로 한 안간공파(安簡公派)와 양화공의 5대손인 참판 류종식(參判 柳宗植)을 파조로 하는 백참판공파(伯參判公派)와 종식의 동생 참판 류양식(柳陽植)을 파조로 하는 계참판공파(季參判公派)로 나뉘어진다. 백참판공파는 다시 사복시정공파(司俟寺正公派)와 곡산공파(谷山公派), 수재공파(睡齋公派), 문정공파(文貞公派), 충찬공파(忠贊公派)로 나뉘어지는데, 이들은 대체로 서울, 경기도 안산, 안성과 충북의 괴산, 청안, 청원 등지에 세거해왔다.

계참판공파는 다시 현감공파(縣監公派), 어모공파(禦侮公派), 보령공파(保寧公派), 사의공파(司議公派), 하양공파(河湯公派), 서봉공파(西峰公派), 세마공파(洗馬公派), 직장공파(直長公派)로 나뉘어져 대체로 경기도의 안성과 이천, 강화, 금천, 충북 진천, 충남 성환, 황해도 신천, 해주, 평산지역에 세거해 왔다.

안간공파도 다시 현감공파, 학생공파, 진사공파, 승지공파(承旨公派)로 나뉘어졌는데 주로 경기도 여주와 파주, 장단, 그리고 충주지역에 세거해 왔다.

총랑공파는 총랑공의 손자 대에서 진천군 류지정(晉川君 柳之淀)을 파조로 하는 진천군파(晉川君派)와 대사성류지택(大司成 柳之澤)을 파조로 하는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판서 류지습(判書 柳之濕)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로 나뉘어진다.

진천군파는 다시 삼사부사공파(三司副使公派)와 재신공파(宰臣公派)로 나뉘어지는데, 삼사부사공파는 다시 대암공파(臺巖公派), 입암공파(立巖公派), 현감공파(縣監公流), 찰방공파(察訪公源), 부사공파(府使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로, 재신공파는 둔와공파(遯窩公派)와 장사랑공파(將仕郎公源)로 분파되는데, 이들은 주로 경북의 상주, 문경, 예천, 의성, 안동, 봉화에, 일부가 경남 밀양, 양산과 경기도 안성, 용인, 충북의 음성 등지에 세거해 왔다.

대사성공파는 크게 군수공 백통(伯通)을 파조로 하는 군수공파와, 참의공 백규(伯逵)을 파조로 하는 참의공파 및 군수 인몽(仁蒙)을 파조로 하는 군수공파로 나뉘어 지고, 백통을 파조로 하는 군수공파는 다시 백사정공파(伯司正公派), 헌납공파(獻納公派), 단양백공파(丹陽伯公派), 계사정공파(季司正公派)로 나뉘어지는데, 주로 경남의 산청, 하동, 사천, 남해, 진주, 거제, 합천, 거창, 함양 등 경남 일원과 충북 제천, 충주지역에 세거해왔으며, 참의공파는 다시 첨지공파(僉知公派)와 소윤공파(少尹公派)로 나뉘어 주로 경기도 용인, 구리, 판교, 명금 지역 그리고 경북의 상주, 강원도의 춘성, 평북의 영변, 함남의 함흥 등지와 경남의 산청, 전남 남원지역에 세거해 왔고, 인몽을 파조로 하는 군수공파는 주로 경기도 안성 공도지역에 세거해 왔다.

판서공파는 판서공의 손자 승지 류안생(柳安生)을 파조로 하는 승지공파(承旨公派)와 그의 동생인 종묘서령 류효생(柳孝生)을 파조로 하는 서령공파(器令公派)로 나뉘어지고, 승지공파는 다시 진사공파와 참판공파로, 서령공파는 다시 학생공파와 충순공파(忠順公派)로 나뉘는데, 이들은 주로 서울과 경기도 양주, 이천, 포천, 개풍, 충북의 제천 등지에 세거해 왔다.

                                                                                           자료정리.편집 ; 류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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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류씨 (晋州柳氏) 인물

 

 1> 시조 :  류 정[柳 挺]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토봉진주류씨( 시조 柳挺)가 있다

    진주(晋州)는 경남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거열성인데 신라때 거열주,       

     강주, 진주라 불리웠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진양도호부, 진주목으로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가 되었다.

      진주류씨(晋州柳氏)의 시조  류정(柳挺)은 고려조에, 진강부원군에 봉해졌

     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진주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세 숙[淑]이 진녕부원군에, 3세 돈식(敦植)은 진원부원군에,  4세 홍림(洪林)
      평장사를 거쳐 진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홍림의 아들
[부]는 진흥부원군,

     손자 [간]은 진성군에  봉군되어 6대(代)가 현달하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그외에도  조선 세조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문통(文通)이 사간을 거쳐 상주

     목사를 지냈으며 [청천유고]를 저술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맏아들

     인귀(仁貴)와 막내 인숙(仁淑)이 뛰어났다.

     그밖의 인물로는  조의(祖誼)의 아들 진(縝)이 형조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쳐 태천, 단천, 평창 등지의 군수를 지냈으며, 선조때의

     명신 근(根)은 호성이등공신으로 진원부원군에 봉해지고  대제학에 이어

     좌찬성에 올랐으나 광해군때 폐모론을 반대하였다 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

     인조반정의 공신 근(根) 의 손자로서  진주군에 봉해졌으며, 영(潁)

     아들 명견(命堅)은 숙종때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냈다. 그의 아우

     명천(命天)은  숙종때  예조판서와 판중추부사를 지냈으나  인현왕후를 모해

     하려 했다는 무고로 아우 명현(命賢)과 함께 지도(智島)에 귀양갔다 돌아와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류씨(晋州柳氏)는 남한에

     총 17,667구, 72,8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진현리

경남 합천군 묘산면 가산리, 야로면 하빈리

     경북 상주군 은척면 두곡리

경남 거제군 둔덕면 방하리

     경남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

  경남 합천군 봉산면 봉계리


                             


황해도 신청군 남부면 서부리

 

 


진주류씨(士柳)대종회 연락처

주소 : 서울 강동구 길1동 454-1 일성 오피스텔 503호

전화 : 02) 473-0485, 474-0485

대표 : 회 장 류종수(柳宗秀)

 1> 시조 :  류 정[柳 挺]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진주(晋州)는 경남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거열성인데 신라때 거열주,       

     강주, 진주라 불리웠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진양도호부, 진주목으로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가 되었다.

      진주류씨(晋州柳氏)의 시조  류정(柳挺)은 고려조에, 진강부원군에 봉해졌

     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진주를      명신 근(根)은 호성이등공신으로 진원부원군에 봉해지고  대제학에 이어

     좌찬성에 올랐으나 광해군때 폐모론을 반대하였다 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

     인조반정의 공신 근(根) 의 손자로서  진주군에 봉해졌으며, 영(潁)

     아들 명견(命堅)은 숙종때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냈다. 그의 아우

     명천(命天)은  숙종때  예조판서와 판중추부사를 지냈으나  인현왕후를 모해

     하려 했다는 무고로 아우 명현(命賢)과 함께 지도(智島)에 귀양갔다 돌아와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류씨(晋州柳氏)는 남한에

     총 17,667구, 72,8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진현리

경남 합천군 묘산면 가산리, 야로면 하빈리

     경북 상주군 은척면 두곡리

경남 거제군 둔덕면 방하리

     경남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

     경남 합천군 봉산면 봉계리

황해도 신청군 남부면 서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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