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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전주류씨편

 

전주류씨(全州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租 및 本貫의 由來)

 전주 류씨(全州柳氏)는 문화 류씨(文化柳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의 9세손 상장군(上將軍) 순(淳)의 여섯째 아들 양재(良梓)의 증손(曾孫) 습(濕)이 고려(高麗) 말에 전주(全州)로 이거(移居)하여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추증되고 완산백(完山伯)에 추봉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일세 조(一世祖)로 하고 전주(全州)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한국성씨대관 인용)

고려사 및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양재의 둘째 아들 방헌은 고려 광종 때 인물로 확인되고 있어 연대가 크게 차이가 나서 양재의 子로 보기어렵다.
문화류씨 분관 설에 의문을 제기하기도한다.
전주류씨 200??년간 대동보는 문화류씨 분관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도산류영렬>

 <참고사항>

류방헌 (柳邦憲)-

944(헤종1년갑진)~1009(현종즉위년/ )

光宗 24년(972) 문과급제... 父 良梓-(允謙)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시호 정간(貞簡).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때 예부시랑, 목종 때 한림학사 우간의대부(翰林學士右諫議大夫)를 지냈다. 工文博士 光文校書郞, 1009년(목종 12)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금자광록대부 (金紫光祿大夫)에 이르러 졸하였다.
侍仲을 追贈貞簡公,戴肅公,莊定公등 3평장사가 고려사열전에 기록/ -한국정신문화원간인명사전-

* 문화류씨보 무자보에는 고려 혜종 갑진(944년)생으로 기록하였음

* 방직, 방헌은 형제요 父는 良梓로 문화류씨보에 기록되었다. 양재는 방헌의 30년 전(1대30년추산) 분으로 추산한다면 대승공 류차달과 같은 시대에 생존했던 인물로 상정할 수 있음 방헌과 방직은 같은 형제로보기어렵다과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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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지명 고

전주(全州)는 전라북도(全羅北道) 중앙(中央)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대(古代)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하여, 백제시대(白濟時代)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 ․ 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리우다가 555년(신라 진흥왕 16)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그 후 경덕왕(경덕왕: 제35대왕, 재위기간 742~765)이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白濟)를 세워 40여 년 간 이곳을 도읍으로 하였으나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때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다가 공민왕(恭慾王)이 완산부(完山府)로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태조(太祖)가 선조(先祖)의 고향(故鄕)이라 하여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개칭하였다가 1403년(태종 3) 다시 전주부(全州府)가되었으며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전주시(全州市)로 개편되었다.

  씨족사 개요 (氏族史 槪要)

  1세조 습의 아들 5형제 중 둘째 극서(克恕)가 고려조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증현대부(中顯大夫)로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 提學)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빈(滾)과 손자 의손(義孫)이 크게 현달(顯達)하여 명문(名門)의 위치에 올랐다.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서 문장(文章)이 뛰어나 남수문(南秀文) ․ 권채(權埰)와 더불어<집현전 삼선생(集賢殿三先生)> 으로 일컬어졌던 의손(義孫)은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전주(全州) 황방산(責方山)으로 내려가 시문(詩文)으로 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우 신손(信孫)은 참판(參判)을, 말손(末孫)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거쳐 집의(執義)를 역임했다. 한편 판관(判官) 경손(敬孫)의 손자 숭조(崇祖)는 18년간 성균관(成均館)에 재직하는 동안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공부하여 경사(經史)에 통달했으며 도학정치(適學政治)를 실현하려는 최초의 학자로서 문하(門下)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대학자(大學者)를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말손(末孫)의 손자 헌(軒)은 연산군(燕山君) 때 삼사(三司)의 벼슬에 있으면서 난정을 극간하는 만언소(萬言疎)와 임사홍(任士洪) ․ 류자광(柳子光)의 방자함을 탄핵하는 소(疎)를 올렸다가 제주도(濟州適)로 귀양보내지고. 화가 난 연산군은 사간원(司談院)을 귀찮고 말이 많은 기관이라 하여 폐지해 버림으로써 헌은 연산조의 마지막 대사간(大司諫)이었다. 그의 아들 세린(世麟)은 기묘 사화(己卯士禍) 때 성균관의 유생들을 이끌고 조광조를 구제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말손(末孫)의 세째 아들로 중부(仲父)의 의손(義孫)에게 출계(出系)한 계동(季潼)은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詞直)을 역임했고, 그의 손자 윤덕(潤德)이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정유재란 때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활약했던 영길(永吉:대사간 헌의 증손)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러 치사(致仕)했고, 그의 아우 영경(營慶)은 선조(宣祖) 때 소북파(小北派)의 영수로 정유재란에 공(功)을 세워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선조(宣祖) 말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광해군에 대신하여 세자로 옹립하려 했으나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경흥(慶興)에 유배되어 사사(賂死)되었다.

그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외숙(外叔)인 김성일(金誠-)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던 복립(復立)이 진주성(晋州城)을 방어하다가 함락되자 의병장(義兵將) 김천일(金千溢)과 함께 투신자결하여 충신정문(忠臣旅門)이 세워졌고, 인조(仁祖) 때 전창위(全昌慰)에 습봉된 심(淪)은 송설체(徐雪體)로 유명했다.

1623년(인조 1) 알성문과(諂聖文科)에 급제한 질(秩)은 영성(永成)의 셋째 아들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철원 부사(鐵原府使) 청병(淸兵)에게 살해되었으며, 즙(楫)의 맏아들 경창(慶昌)은 인조(仁祖) 때 등과(登科)하여 홍문관부정자(弘文館副正字)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지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현종(顯宗) 때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간(大司諫)과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영조(英祖)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천문(天文) ․ 지지(地支)에 정통했던 정원(正源)은 병률(兵律)과 도학(道學)에도 능통하여 「삼산문집(三山文集)」과 「하락지요(河洛指要)」를 저술했고, 의양(義養)은 정조조(正祖朝)에서 「춘관지(春官志)」와 「영희전지(永禧殿誌)」를 편찬하고 승지(承旨)가 되어「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增補文獻備考)」의 수찬에 참여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정조조에서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의(誼)는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홍산(鴻山)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고 3 ․ 1운동 때 독립만세 시위를 별였던 준근(濬根)과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한 인식(寅植)이 가통(家統)을 이어 전주 류씨(全州柳氏)를 더욱 빛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류씨는 남한(南韓)에 총 19.008가구, 61,650명의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歷代 人物)

  류극강(柳克剛) : 시조(始祖) 습(濕)의 맏아들. 고려(高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전교시 사(判典校侍事)를 역임하였다.

류극서(柳克恕) : 고려(高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중현대부(中顯大夫)로 보문각 직제학(寶文 閣直提學)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 직 되었다.

류 정(柳 汀) : 고려에서 오위도총부 절제(五衛都摠府節制)를 지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 府事)에 호조정랑(戶曹正郎)에 이르렀다.

류 빈(柳 濱) : 1386년(우왕 12) 문과(文科)에 급제, 응교(應교) ․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통 정대부(通政大夫)로 영흥 부사(永興府使)를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류효지(柳孝池) : 조선(朝鮮) 때 진보 현감(眞寶縣監)을 지냈다.

류혜생(柳惠生) :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류효천(柳孝川) : 1435년(세종 17) 문과(文科)로 급제, 이듬해 중시(重視)에 올라 직제학(直提 學)을 역임하였다.

류경손(柳敬孫) :1395년(태조 4) ~ 1445년(세종 27) 호(號)는 상락정(雙樂亭), 직제학(直提學) 빈(濱)의 아들. 변계량(卞季良)의 문인(門人), 학행(學行)으로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를 거쳐 해주 판관(海州判官)을 지냈다.

류의손(柳義孫) : 1398년(태조 7) ~ 145O년(세종 32) 자(字)는 효숙(孝叔), 호(號)는 회헌(檜 軒) ․ 농암(聾巖), 직제학(直提學) 빈(濱)의 아들. 1419년(세종 1) 생원(生員)이 되고, 1 426년(세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闊)을 거쳐 감찰(監奈) ․ 집현전 수 찬(集賢殿修撰)을 역임한 뒤 1436년(세종 18)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고 직제학 (直提學)에 올랐다.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도승지(都承旨)를 역임, 1447년(세종

29) 이조 참판(吏暫參判)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기용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문장 으로 알려졌다. 안동(安東)의 기양서원(岐陽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류말손(柳末孫) : 조선 때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 다.

류맹기(柳孟沂) : 초명(桃名)은 지간(之幹) ․ 지윤(之潤), 판관(判官) 경손(敬孫)의 아들. 음보 (蔭補)로 지평(持平)과 장령(掌令)을 지내고 고양군수(高揚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1426년(세종 8)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류지성(柳之盛) : 초명은 맹하(孟河), 자(字)는 무숙(茂叔). 조선 때 서령(署令)을 지내고 참판 (參判)에 추증 되었다.

류계동(柳季潼) : 조선 때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詞直)을 지내고 도승지(都承旨)에 증직되었 다.

류계번(柳季淄) : 직제학(直提學) 빈(瀉)의 손자(孫子), 1414년(테종 14) 사마시를 거쳐 1454 년(단종 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참판(參判)을 지냈다.

류 이(柳 顚) :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류철근(柳哲根) : 조선 때 부사정(副司正)을 역임하였다.

류승조(柳崇禮) : 1452년(문종 2) ~ 1512년(중종 7) 자(字)는 종효(宗孝), 호(號)는 진일재(眞 一齋), 시호(諡號)는 문목(文穗), 지성(之盛)의 아들. 세조 때 진사(進士)가 되고, 1489 년(성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사유(師儒) 에 선임(選 任)되었다. 검열(檢關)을 거쳐 봉교(奉교) 정언(正言)을 역임, 1501년(연산군 7) 부교 리(副校理)로서 공안 상정청(貢案 詳定廳)의 낭청(郎廳)이 되고, 그 후 장령(掌令)으로 연산군의 실정(實情)을 극간하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원주(原州)로 유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판결사(判決事)에 특진되었다. 이해 공조 참의(工曹 參議)가 되어 경연 참찬관(經筵 參贊官)을 겸임, 뒤에 대사성(大司成) ․ 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 등을 지냈다.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려고 한 최초의 학자로써 18년간 성균관(成均館)에 재직 하는 동안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했다. 경사(經史)에도 통달하여 조광조(趙光祖) 등의 대학자를 양성 했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 되었다.

류흥조(柳興禮) : 조선 때 선무랑(宣務)을 지냈다.

류 헌(柳 軒) : 1462년(세조 8) ~ 1506년(중종 1) 자(字)는 백여(伯輿), 호(號)는 낙봉(駱 峯), 첨지중추부사(僉知中權府事) 계장(季樟)의 아들. 1486년(성종17) 사마시(司馬試) 에 합격하고 148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00년(연산군 6) 집의 (執義)가 되고 3사(三司)의 벼슬을 역임했다.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를 거쳐, 1504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이해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임사홍(任 士洪) ․ 류자광(柳子光)의 음모와, 이극균(李克均)이 죄 없이 사형당한 사실을 상소했다 가 제주도(濟州適)에 유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방환(放還)되어 돌아오다가 왜구(僑寇)에게 살해되었다.

류세린(柳世麟) : 1490년(성종 21) ~ ?. 자(字)는 사인(士仁), 호(號)는 활탄(活灘) 팔우당(八 友堂), 헌(軒)의 아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卵士禍) 때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으로 조광조(趙光祖) 등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를 했다.

152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 지평(持平) 장령(掌令) ․ 필선(弼善) ․ 부제학(副提學) 승지(承旨) 대사헌(大司憲) 등을 거쳐 1537년(중종 32) 동 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김안로(金安老)의 일파라 하여 삭직(削職) 당 했다.

류세화(柳世華) : 자(字)는 백실(伯實), 호(號)는 효우당(效友堂).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류세무(柳世茂) : 자(字)는 자실(子實), 호(號)는 학유당(學諭堂). 조선에서 부사(府使)를 지냈 다.

류영길(柳永吉) : 1538년(중종 33) ~ 1601년(선조 34). 자(字)는 덕순(德純), 호(號)는 월봉 (月蓬), 참봉(參奉) 의(儀)의 아들, 영의정(領議政) 영경(永慶)의 형. 1559년(명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 ․ 병조좌랑(兵曹佐郎) ․ 부수찬(副修撰) ․ 헌납 (獻納) ․ 전적(典籍) ․ 병조 정랑(兵曹正郎) 등을 거쳐 1565년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 가 되었으나 앞서 이 양(李 樑)에게 아부했었다는 탄핵을 받아 이듬해 파직되었다.

1589년(선조 22)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1592년 승문원제조(承文院製造),

1593년 도총관(部摠管) ․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 이듬해 진휼사(賑恤使)가 되 었으나, 동인(東人)의 언관(言官)들 에게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T酉再亂)이 일어나자 호군(護軍) ․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활약, 1599년 병조참판(兵 曹參判) ․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 ․ 경기도 관찰사(京畿道 觀察使)를 역임, 1600년 예조 참판(禮曹 參判)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시문(誇文)에 능했다.

류영근(柳永謹) : 1550년(명종 5) ~ ? 자(字)는 근지(謹之), 호(號)는 죽비(竹扉), 죽경(竹?), 정(珽)의 아들. 이 항(李 恒)의 문인. 1582년(선조 15)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현감(縣 監)을 지내다가 1601년(선조 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호조 정랑 (戶曹正郎) ․ 부교리(副校理) 및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 등을 거쳐 사간(司 諫)에 이르렀다.

류영경(柳永慶) : 1550년(명종 5) ~ 1608년(선조 41) 자(字)는 선여(善餘), 호(號)는 춘호(春 湖), 참봉(參奉) 의(儀)의 아들. 1572년(서조 5)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丙科) 로 급제, 정언(正言) 등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사간 (司諫)으로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많은 토병(土兵)을 모집하고 호조 참의(戶曹 參讚)에 올랐다. 1594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내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지중추부사(知中權府事), 이듬해 병조 참판(兵曹參判)이 되고, 그동안 동인(東人)에 속 해 있다가 동인이 남인(南人), 북인(北人)으로 분열되자 북인에 가담하고 1599년 대사 헌(大司憲)에서 한때 파직되었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1602년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서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했고,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雇聖功臣) 2등으로 전양부 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좌의정(左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북인이 대북(大北) ․ 소북(小北)으로 분당될 때 소북파의 영수(領袖)로서 다시 같은 소북인 남 이공(南以恭)과 불화하여 자기 동조자들을 이끌고 탁소북(濁小北)으로 분파, 선조 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광해군에 대신하여 세자로 옹립하여 했으나 1608년 선조가 죽 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鄧仁弘) ․ 이이첨(李爾疇) 등 대북(大北)일파의 탄핵을 받고 경흥(慶興)에 유배, 이어 사사(賂死)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후 관직이 복구 되었다.

류복기(柳復起) : 1555년(명종 10) ~ 1617년(광해군 9) 자(字)는 성서(聖瑞), 호(號)는 기봉 (岐峯), 부제학(副提學) 윤덕(潤德)의 손자. 외숙 김성일(金誠一)의 문인 정 구(郵 逑)와 학문으로 교유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김 해(金 垓) ․ 윤용길(尹龍吉)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경주(慶州) 싸움에서 김 해가 죽자, 동지들과 팔공산(八空山)에 모 여 항전을 맹세했고, 전화(戰禍)로 굶주려 방랑하는 백성들을 진휼(賑․恤)했다. 뒤에 등 용되어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이르렀다. 안동(安東)의 기양 리사(岐陽里社)에 제향(祭 享)되었다.

류 성(柳 惺) : 1572년(선조 5) ~ 1616년(광해군 8) 자(字)는 자경(子敬), 참판(參判) 영길 (永吉)의 아들 1599년(선조 32) 진사(進士)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 제, 주서(注書) ․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을 거쳐 헌남(獻納)을 지내다가 1608년(선조 41) 소북(小北)으로서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大北)이 집권하자 삼수(三水)에 유배,

1616년 사사(賜死)되고, 뒤에 부관참시(副官斬屍)당했다. 1623년(인조 1) 신원(伸寃)되 었다.

류 항(柳 恒) : 1574년(선조 7) ~ 1647년(인조 25) 자(字)는 여상(汝商), 호(號)는 구봉(九 峯), 예조 참판(禮曹參判) 영길(永吉)의 아들. 1601년(선조 3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606년(선조 39) 판관(判官)으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예 조좌랑(禮曹佐郎) ․ 정언(正言)을 지낸 뒤, 1612년(광해군 4) 류영경(柳永慶)에게 추형 (追刑)이 가해질 때 그의 일파였다는 죄로 삼수(三水)에 안치(安置)되었다. 1623년 인 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장령(掌令)에 등용, 1625년 단천군수(端川郡守)가 되고, 1638년 (인조 16)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지냈다. 1646년 추관(推官)으로 안익신(安益信)의 옥 사(獄事)를 잘 처리하여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올랐다가 이듬해 치사(致仕)했 다. 시(誇)에 뛰어났다.

류복립(柳復立) : ? ~ 1593년(선조 26) 자(字)는 군서(君瑞). 호(號)는 묵계(墨溪), 부제학(副 提學) 윤덕(潤德)의 손자. 음보(蔭補)로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가 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외숙인 경상도 관찰사 김성일(金誠一) 휘하에서 진주성(晋州城)을 공 격해 온 적을 격퇴, 이듬해 4월 김성일이 병사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 복수장(復警將) 고종후(高從厚) ․ 마절도사(兵馬節度使) 황 진(黃 進) 등과 함께 성을 방어하다가 성이 함락당할 때 김천일 등과 함께 자결했다. 충신정문(淸臣旅門)이 세워 지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류 질(柳 秩) : 1575년(선조 8) ~ 1636년(인조 14). 자(字)는 자상(子常), 군기시 부정(軍器寺 副正) 영성(永成)의 아들 1606년(선조 3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21년(광해군 13) 성균관(成均館) 유생으로도 동료들과 함께 폐모론(廢母論) 주창자의 처형을 상소하였 고. 1623년(인조 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내외직을 거쳐 1636년 철원 부사(鐵原府使)가 되었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병(請兵)에게 살해되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류정량(柳廷亮) : 1591년(선조 24) ~ 1663년(현종 4) 자(字)는 자룡(子龍), 호(號)는 소한당 (素閒堂), 시호(諡號)는 효정(孝猜), 영의정(領證政) 영경(永慶)의 손자. 1604년(선조

37) 선조(宣祖)의 딸 정휘옹주(貞徵翁主)와 결혼하고 전창위(全昌尉)에 봉해졌으며, 16 12년(광해군4) 류영경 일가가 멸족(滅族)될 때 고부(古阜)에 유배, 1619년 장차 역모 (逆謀)가 있으리라는 소문이 호남지방에 유포되자 기장(機張)에 이배(移配)되었다. 162 3년 인조 반정(仁祖反正)으로 복관(復官)되어 전창군(全昌君)에 진봉(進封), 1628년 숭 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1646년(인조 24) 사은사(謝恩使)로, 1651년(효종 2) 진향 사(進香使)로, 1655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글씨 에 뛰어났다.

류경창(柳慶昌) : 1593년(선조 26) ~ 1662년(현종 3) 자(字)는 선백(善伯), 호(號)는 성탄(聲 灘) ․ 미천(薇川), 즙(楫)의 아들. 1618년(광해군 10)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28년 (인조 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홍문관 부정자(弘文館副正字)에 뽑 히고, 수찬(修撰) ․ 교리(校理) ․ 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1644년 사서(司書), 이듬해 헌납(獻納) ․ 이조 좌랑(吏曹佐郎), 1647년 이조정랑(吏曹正郎) ․ 집의(執義)를 거쳐

1649년(인조 27) 사간(司諫)에 승진, 다음해 승지(承旨), 1652년 강원도 관찰사를 지 내고 이듬해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재직중 남장(男裝)의 죄로 파직되었다. 1656년 용 서되어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복직, 1662년(현종 3) 동지부사(冬至府使)로서 청나라 에 다녀와 이해 대사헌(大司憲) ․ 대사성(大司成) 등을 지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錄選)되었다.

류준창(柳俊昌) : 1601년(선조 34) ~ 1670년(현종 11) 자(字)는 대이(大而), 철원 부사(鐵原 府使) 질(秩)의 아들. 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30년 별시문과(別試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 장령(掌令) ․ 필선(弼善) 등을 역임, 1661년(현종 2) 판교(判校)에 승진하고, 1668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류 심(柳 淰) : 1608년(선조 41)~1667년(현종 8) 자(字)는 징보(澄甫), 호(號)는 도계(道溪), 전창위(全昌尉) 정량(廷亮)의 아들 1613년(광해군 5) 6세 때 계축옥사(癸丑獄事)로 가 산이 적몰(籍沒)되고, 유배당한 아버지를 따라가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 로 풀려나왔다. 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 고, 시직(侍直)으로서 163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 院)에 등용 되고, 사관(史觀)으로 뽑힌 뒤 참판(參判)에 이르러 전창위를 습봉했다. 글 씨는 송설체(松雪體)에 능했다.

류응원(柳應元) : 자(字)는 극기(克己), 호(號)는 우송(友松). 조선조(朝鮮朝)에 기사관(記事官) 을 지냈다.

류화로(柳華老) : 자(字)는 은수(殷望), 호(號)는 춘포(春圃).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류정휘(柳挻輝) : 자(字)는 중겸(仲謙)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류 면(柳 冕) : 자(字)는 주경(周卿). 1662년(현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 제하여 정언(正言)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류 만(柳 曼) : 1663년(인조 11)~1708년(숙종 34) 자(字)늘 장경(長卿), 생원(生員) 효창(孝 昌)의 아들. 만년에 생원(生員)이 되고, 1684년(숙종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 (甲科)로 급제, 전적(典籍) ․ 예조 좌랑(禮曹佐郎) 울산 부사(蔚山府使) 등을 지냈다.

1698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權府事)에 올랐다.

류도옥(柳道玉) : 자(字)는 홍보(弘寶). 조선 때 학유(學諭)를 지냈다.

류이승(柳以升) : 1638년(인조 16) ~ ?. 자(字)는 중진(仲進), 호(號)는 동호(東湖), 심(流)의 아들. 1657년 (효종 8) 진사(進士)가 되고,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1676년(숙종 2) 정선 군수(旌善 郡守)로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뒤에 목사(牧使) 에 이르렀다. 서예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류복명(柳復明) : 1685년(숙종 11) ~ 1760년(영조 36) 자(字)는 양휘(陽輝), 호(號)는 만촌(晩 村),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도사(都事) 성(宬)의 아들 1711년(숙종 37) 생원(生員) 이 되고, 1716년 황감제시(黃柑製試)에, 이듬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각각 장원,

1718년 정언(正言)이 되고, 문학(文學)을 거쳐 1721년(정종 1) 지평(持平)으로 세제(世 弟 영조) 책봉을 반대하는 소론(小論)의 류봉휘(柳鳳輝) ․ 조태구(趙泰考) 등을 탄핵했 다.

이어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老論)이 실각하자 파직되었다가 1724년 영조가 즉위 하자 김일경(金一鏡) 등의 처형을 상소하고 이듬해 지평에 복직, 이어 보덕(輔德), 승 지(承旨) ․ 도승지(都承旨)를 역임, 이해 동지부사(冬至府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파직, 이듬해 복직되고,

1732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1743년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謝恩府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754년 지중추부사(地中樞府事)로 기로소(春老所)에 들어갔으며 판돈령부사(判敦寧府 使)에 이르렀다.

류정원(柳正源) : 1703년(숙종 29) ~ 1761년(영조 37) 자(字)는 순백(淳伯), 호(號)는 삼산(三 山), 석귀(錫龜)의 아들 안동(安東) 출신. 1729년(영조 5) 생원(生員)이 되고, 173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지평(持平) ․ 부교리(副校理) 수찬(修撰) ․ 필 선(弼善) 등을 역임, 1761년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제자 백가(諸子百家)를 섭렵, 천문(天文) ․ 지지(地志) ․ 음양(陰陽) ․ 복서(卜筮) ․ 주수(籌數) 를 비롯하여 병률(兵律) ․ 도학(道學)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다.

류 운(柳 運) : 자(字)는 자건(子建). 조선 때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류익지(柳翼之) : 자(字)는 보이(補而) 조선에서 장령(峯令)을 지냈다.

류의양(柳義養) : 1718년(숙종 44) ~ ?. 자(字)는 계방(季方), 자장(子章), 호(號)는 후송(後 松), 승지(承旨) 태명(泰明)의 손자, 무(懋)의 아들. 1756년(영조 32) 생원(生員)이 되 고, 현감(縣監)을 지낸 후 176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1765년 정언(正言)에 이어 사서(司書) ․ 수찬(修撰) ․ 교리(校理)를 역임하고, 1775년 (영조 51) 집 의(執義)로서 백관(百官)들의 안일(安逸)함을 논핵했으며, 같은 해 영남 어사(嶺南御史)가 되었다.

1777년(정조 1) 강릉부사(江陵府使), 이듬해 대사간(大司諫), 1779년 성천부사(成川府 使)를 지내고, 1781년 예조 참의(禮曹參議)로서 예조 이정당랑(禮曺이正堂朗)이 되어 「춘관지(春官志)」와 「영희전지(永禧殿誌)」를 편찬했다. 1783년 예조 참판(禮曹參判) 으로 감동관(監董官)이 되어 덕릉(德陵), 정릉(定陵)을 개측(改築)하고 이어 승지(承旨) 가 되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수찬(修撰)에 참여했다. 이듬해 공조 참판 (工曺參判)으로서「춘방지(春坊志)」를 저술, 다시 1787년 에는 부총관(副摠管)으로 「오례의(五禮儀)」를 보집(補輯)했고, 1788년「춘관통고(春官 通考)」를 저술했다.

류진항(柳鎭恒) : 1720년(숙종 46) ~ 1801년(순조 1) 자(字)는 수성(壽聖), 종묘서 봉사(宗廟 署奉事) 종기(宗基)의 아들 종숙(從叔) 세기(世基)에게 입양(入養). 1753년(영조 29) 무 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에 등용된 뒤 금군 별장(禁軍別將) ․ 훈련원 도정(訓鍊 院都正) 등을 거쳐 1777년(정조 1)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되고 이어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회령부사(會寧府使) ․ 부총관(副摠管) 등을 역임, 1786년(정조 10)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1788년 우포 도대장(右浦盜大 將)을 거쳐 70세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지중추 부사(知中樞府 事) ․ 도총관(都摠管)을 지내고, 1799년 80세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류도원(柳道源) : 1721년(경종 1) ~ 1791년(정조 15) 자(字)는 숙문(叔文), 호(號)는 노애(蘆 涯), 참의(參議) 관현(觀鉉)의 아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 문 연구에 전심, 특히 주석학(註釋學)에 뛰어났다. 만년에 명릉 참봉(明陵 參奉)을 거 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權府事)에 올랐다.

류 의(柳 誼) : 1734년(영조 10) ~ ?. 자(字)는 의(論之), 대사간(大司諫) 선양(善養)의 아들. 1769년(영조 4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78년(정조 2) 정언(正 言) ․ 지평(持平)을 거쳐 이듬해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 1780년 강원도 암행어 사(暗行御史), 다음해 관서 암행어사(關西暗行御史)가 되고, 이해 실록청 도청낭청(實 錄廳都廳郎廳)이 되어 「경종개수실록(景宗改修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782년 병 조 참의(兵曹 參議), 1786년 대사간(大司諫), 1789년 병조참판(兵曹參判), 1791년 다 시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1797년 승지(承旨)를 거쳐 홍주 목사(洪州 牧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뒤에 대사헌에 이르렀다.

류정양(柳凞養) : 1767년(영조 43) ~ ?. 자(字)는 석로(錫老), 공조 판서(工曹判書) 당(懲)의 아들. 생원(生員)으로 1809년(순조 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사관 (史官)을 거쳐 홍문관(弘文館)에 등용, 1811년 태천 현감(泰川縣監)으로서 이듬해 홍경 래(洪景來)의 난 때 영변(率邊)으로 도망하여 파직, 곧 재 등용 되어 수찬(修撰) ․ 집의 (執義) 등을 역임, 181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18년 영변 부사(寧邊 府使)를 지냈다.

류휘문(柳徽文) : 1773년(영조 49) ~ 1827년(순조 27)자(字)는 공회(公晦), 호(號)는 호고와 (好古窩), 대사간(大司諫) 정원(正源)의 손자, 만휴(萬休)의 아들. 류장원(柳長源)의 문 인 1826년(순조 26) 관찰사(觀察使)와 암행어사(暗行御史)의 천거로 후릉 참봉(厚陵參 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고, 이듬해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이미 죽은 뒤였다.

류치명(柳致明) : 1777년(정조 1) ~ 1861년(철종 12) 자(字)는 성백(誠伯), 호(號)는 정재(定 齋), 진사(進士) 회문(晦文)의 아들. 남한조(南漢朝)의 문인. 1805년(순조 5) 별시문과 (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 ․ 정언(正言) ․ 문학(文學) 등을 거쳐 전라 도 도사(全羅適 都事)가 되었다. 1832년(순조 32) 홍문관(弘文館)에 발탁된 뒤, 승지 (承旨)를 거쳐 1847년(헌종 13) 대사간(大司諫) ․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고,

1855년(철종 6) 호군(護軍)으로서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의 추존(追尊)을 청하 는 소(疏)를 올렸다가 대사간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상원(祥原)에 유배, 이어 지도(智島)에 안치(安置)되었다가 이해 곧 석방, 1856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1857년(철종 8) 제자들이 지어 준 뇌암(雷巖)의 만우재(晩愚齋)에서 후진들을 지도했 으며, 1860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이르렀다.

류준근(柳준根) : 1860년(철종 11) ~ 1920년. 자(字)는 순경(舜卿), 호(號)는 우록(友唜), 진사 (進士) 형중(馨中)의 아들. 충남 보령(保率) 출신.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東學革命) 때 관군에 가담했고, 1905년(광무9) 을사조약(乙巳條約)에 체결되자 납세(納稅)를 거 부하고 을사 5적신을 공박하다가 투옥, 뒤에 석방되자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이 휘하 에 들어가 홍산(瀉山)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중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수감되었다. 이 때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쓰시마도에 유배되었다가 4년 후 석방. 1919년 3.1운동 때 동대문 밖 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이듬해 향리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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