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포럼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아이디 패스워드    
 
   
 
     
 

          
View Article  
  작성자  편집인
  파 일 1  js069.jpg (223.7 KB) Download : 9
  제    목  아들의 벼슬때문에 아버지이름을 바꾼 사연

이미지:조선왕조실록 세종 32권,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4월 13일(병자) 2번째기사




아들의 벼슬때문에 아버지 이름을 바꾸다

                                                                류주환, 2011. 3. 21.   

  아들이 어떤 벼슬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그 아버지의 이름이 바뀌었다? 실제 일어난 일이다. 임금이나 조상의 이름은 신성하게 여겨서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고, 같은 글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음이 같은 글자까지도 사람들의 이름에 넣지 않았다. 이런 풍습을 기휘(忌諱)라 한다. '기휘'는 '거리끼어 피함'의 뜻이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도 않았다.
따라서 부모나 조상의 이름을 말해야 할 때는 "O자, O자"라고 나누어서 말하거나 이름자를 풀어서 말했고(eg. 相奎 = 나무목변에 눈목자, 큰대에 홀규(圭)자), 호칭해야 할 때는 가급적 벼슬이나 호, 시호 등을 사용하곤 했다. 이름을 경외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한(神)인 야훼는 유대인들의 표기에 모음 표기가 없어 자음으로만 표기되었고 경외하여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어 그 발음이 내려오지 않아 정확한 이름을 잃었다 한다.
현재 당시의 발음을 대략 추정하여 부르고 있으며, 우리말 번역으로는 여호와, 야훼 등으로 표기된다. 기휘 풍습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특히 활발했다. 중국의 서적(徐積)이란 사람은 아버지의 이름이 석(石)이었는데, 그래서 평생 돌다리를 밟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 글자의 사용에서도 기휘가 일어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정(政)자를 기휘하여 글에 나오는 政자를 모두 正자로 쓰는 일이었다. 政은 중국 진시황의 이름이었는데, 사대사상 혹은 중국에 의한 지배의 강도(强度)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아예 음도 피해서 正자도 쓰지 않은 예도 있다.) 지금 봐서는 대개 과도하게 명분에 치우친 감이 드는 일들이다. 기휘 때문에 일어난 사건 중 하나는 아들의 벼슬 때문에 그 아버지가 이름을 바꾼 일이다.
바로 조선시대의 청백리로 유명한 하정공 류관(柳寬, 1346-1433, 문화류씨 13세)의 일이다. 1426년(세종 8년) 4월 13일,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

우의정 벼슬에서 나이가 많아 사양하고 물러난 류관(柳觀)의 아들 계문(季聞)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관(觀)은 기휘하여 임금에게 청하여 이름을 관(寬)으로 바꾸었다." (右議政致仕柳觀, 其子季聞, 爲忠淸道觀察使. 觀以嫌名, 啓請改名寬.)

하정공이 81세 때의 일이다. 하정공은 원래 이름이 柳觀이고, 실질적으로 그 이름으로 평생 활동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름을 바꾼 것이다. 안숙공 류계문(1383-1445)은 하정공의 3자이며, 당시 44세였다. 안숙공은 이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에서 관찰사를 지냈고, 한성부사, 형조판서, 대사헌 등을 또한 역임했다. 위의 실록의 이야기는 "임하필기(林下筆記)"(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1888) 편찬)의 제18권 "기휘(忌諱)" 항목에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문간공(文簡公) 류관(柳寬)은 처음 이름이 관(觀)이었다. 그 아들 계문(季聞)이 경기 관찰사에 임명되자 관직명이 아버지의 이름을 범한다 하여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에 그 아비의 이름의 관(觀)자를 관(寬)자로 고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아비의 이름을 이미 고쳤으니 재촉하여 빨리 부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文簡公柳寬, 初名觀. 其子季聞拜京畿觀察使. 官啣犯親名, 辭不赴. 命改其父名觀字爲寬字, 敎曰, 親名己改, 催促赴任.)
실록의 기사와 임하필기의 기사를 비교해보면 안숙공(류계문)의 관찰사 지역 이름이 다르며(실록: 충청도, 임하필기: 경기도), 실록에는 문간공(류관)이 청한 것으로 되어 있고, 임하필기에는 임금이 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전자의 관찰사 지역 이름은, 실록에서도 안숙공이 관찰사가 된 것이 충청도가 최초로 나오므로 충청도 관찰사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후자의 경우는 실록과 임하필기를 모두 감안하여, 임금이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절차상 아버지에게 바꾸는 청을 올리도록 하여 허락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임하필기의 기록은 실록이나 다른 기록을 참조하여 저자(이유원)가 이야기를 각색한 것은 아닐까. 실록은 단지, 아들이 관찰사가 되었음과 아버지가 기휘하여 이름을 바꾸기를 임금에게 청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이 관찰사로 임명을 받았고, 관찰사의 觀자가 부친의 이름과 같아 기휘하여 그 벼슬을 받지 않으려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가 그것을 보고 스스로 이름을 바꾸려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식의 앞날을 위한 아버지의 사랑을 말이다. 실제, 하정공의 아들을 향한 충정(衷情)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실록에는 보인다. 위의 기휘의 일이 일어난 1426년 이후 안숙공은 이조 참의, 형조 참판, 공조 참판을 거처 1430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때 죄를 지은 어떤 관리가 죄를 벗기 위해 한 청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그것이 발각되어 안숙공은 직첩(임명서)을 회수 당했다. 이때 세종은 장 1백대를 치도록 하라는 의금부의 요청에
"계문은 공신의 아들이니 직첩만 회수하라"(季聞功臣之子, 只收職牒)고 명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32년(세종 14년), 하정공이 세종 임금에게 청을 올렸다.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류관(柳寬)이 상언하기를, '신이 나이 80이 넘었으므로 태평한 세상에서 버림을 당할 날도 멀지 않으니, 원컨대 신의 아들 계문(季聞)의 직첩을 돌려주소서.' 하니, 이조에 명하여 직첩을 돌려주게 하고 말하기를, '계문이 일을 맡아 삼가지 않았으나, 지금 그의 늙은 아버지를 위하여 직책을 돌려준다.' 하였다. (右議政致仕柳寬上言: '臣年過八十, 見棄昭代之日不遠, 願還給臣子季聞職牒.' 命吏曹還給曰: '季聞任事不恪, 今爲老父給之.')

여기서 원문의 '不恪'(불각)은 '삼가지 않음, 공손하지 않음(不敬)'의 뜻이다. 세종이 하정공을 공신과 충신으로서 존중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고, 또한 하정공의 아버지로서 아들을 향한 깊은 근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듬해(1433년)에 하정공은 향년 88세로 사망하였고, 안숙공은 이후 강원도관찰사, 한성부윤, 공조참판, 함경도관찰사, 형조참판, 형조판서, 개성부 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안숙공은 1445년에 개성부 유수일 때 사망하였고, '안숙'은 시호이다. 실록에는 안숙공은 위의 파면 건 말고도 그 전에 있었던 두 건의 파면 기록이 더 나온다
(*아래 참조). 업무와 관련하여 잘못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안숙공은 그에도 불구하고 계속 중용되었다.
실록에는 안숙공의 졸기(卒記)가 나오는데, 비판은 들어 있지 않다. 그 졸기에는 안숙공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갑진년에 교서(敎書)와 선온(宣醞)을 받들고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에게 훈유하러 갔는데, 맹가첩목아가 의심하여 들판에 장막을 설치하고 접대하는지라, 계문이 교서의 뜻과 하사한 술을 설명해 이르고 술잔을 수없이 주고받으면서, 말씨와 웃음이 친절하고 흐뭇하니, 맹가첩목아가 의심을 풀고 기꺼이 복종하고, 곧 처첩(妻妾)을 내어 보이고 술을 치게 하였다."
- 2011. 3. 21. 彩霞 류주환

*참고: 안숙공(류계문)은 1423년에도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判事]로서 잘못된 판결을 내려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이듬해(1424년)에 오랑캐에게 가서 선유하는 활약을 하고, 곧 우사간(右司諫)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에 안숙공이 또 탄핵을 받아 파면 당했다. 당시 안숙공은 우사간이었다.    

"우사간 류계문(柳季聞)을 파면하였다. 유계문이 문화현령(文化縣令) 왕효건(王孝乾)에게 청탁하여 관공(官貢)하는 숯의 진성(陳省)을 받아 과중하게 거둬들여 이익을 꾀하여, 그 해독이 백성에게 미쳤으므로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파면한 것이었다." (罷右司諫柳季聞. 季聞請於文化縣令王孝乾,受其官貢炭陳省,重斂謀利,害及於民,憲府劾罷之.)
    *진성: 지방(地方)에서 중앙(中央)에 올리는 각종(各種) 보고서(報告書), 또는 그 물목(物目).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안숙공에게 곧 함길도 선위사의 일을 맡기고, 이어서 좌사간으로 임명하였다. 1425년에는 예조 참의가 되고 1426년에는 위에 언급한 충청도 관찰사가 된다.

  Home: http://kenji.cnu.ac.kr/ryu/E-mail: juwhan@cnu.ac.kr

..............................................................................................................
필자의 양해로 글을 옮기다  * 편집자  류도산

* 편집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1-04-19 15:44)

 
       

Next   문화류씨의 선계 (先系)고찰 <류주환 글> 편집인
Prev   北, 산천군서 문화류씨시조 묘 발견 -류주횐글-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