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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문화류씨의 선계 (先系)고찰 <류주환 글>

문화류씨 선계(先系) 고찰

- 채하 류주환 (彩霞 柳朱桓, 대승공 36세손)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신소재공학부 교수


요약

    지금까지 문화류씨 시조 대승공 류차달의 선계에 대해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에서 비롯되었다는 황제 연원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황제 연원설의 핵심은 문화류씨와 연안차씨가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는 류-차 동원설이다. 이 황제 연원설은 임진왜란 전에 등장한 후 지난 400여년동안 사실로서 믿어져 왔는데, 내용 상 크게 세 가지 계보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차원부설원기”에서 나온 계보이며 둘째는 류지원의 글에서 나온 류용수의 계보이며 셋째는 차헌기가 전한 왕배조의 강남보이다. 이들은 그 핵심이 류-차 동원설인데, 차씨가 내려오다가 류씨로 성을 바꾸었고 대승공에 이르러 그 맏아들이 다시 차씨가 되고 둘째 아들은 류씨로 내려왔다는 내용이다.
    세 계보 중 강남보가 가장 완벽하며, 현재의 문화류씨 계보는 강남보를 답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강남보는 19세기의 조작임이 확실히 증명되어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다. 그리고 류용수의 계보는 강남보와 같이 그 세상에 드러난 과정이 모호하여 신빙성이 떨어지고, 차원부설원기는 문헌비평을 통해서 고찰하면 최소한 후대에 변경된 문헌임을 증명할 수 있다. 다만 세 계보의 핵심인 류-차 동원설에 대한 고려시대의 문헌들이 설원기에 언급되고 있어 주목되는데 설원기가 쓰일 당시에도 그 존재가 불투명했음이 드러나며 그 내용을 알 도리가 없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전무하다.
    한편 이들 계보들을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하면 최소한 정사(正史)와 어긋나지 말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또한 대승공의 사적을 살펴보면 현존하는 여러 고려시대 금석문과 사료들을 통해서도 그 역사적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측면이 있는 판국에 대승공 사후 5-600년 이후에 세상에 나타난 출처가 모호한 문헌들이 명확히 대승공 선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 명백히 후대의 조작이라 생각된다.
    여기서는 가능한 한 많은 기본 사료들을 제시하고 엄밀하게 그것들에 입각해서 황제 연원설을 비판하고 대승공과 그 선계에 대해 고찰하여 보았다. 그리고 연안차씨들이 대승공 관련하여 주장하는 바들을 반박하였다.
    이러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인 역사적인 관점에서 얻어진 종합적인 결론은 황제 연원설과 류-차 동원설의 확실한 부정이다. 곧 대승공 류차달의 선계는 논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사료가 존재하지 않으며 대승공의 아들은 류효금 한 사람 뿐이며 차효전은 문화류씨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목차

    0. 서론
    I. 문화류씨 상계에 대한 설들
        1. 황제 연원설
        2. 대승공 시조론
    II. 문헌의 검토
        1. 류공권 묘지명   2. 류보발 묘지명   3. 권부 처 류씨 묘지명   4. 류돈 묘지명   5. 흥률사갑자중수양상소기서   6. 조선왕조실록, 류량의 졸기   7. 영락보 서문   8. 고려사   9. 차원부설원기   10. 충장공림묘지문   11. 신증동국여지승람   12. 대승공차달묘갈문   13. 문화류씨 세보 “가정보”   14. 대동운부군옥   15. 묵방사 완복문   16. 류지원의 글   17. 차식의 신도비명   18. 씨족원류   19. 묘갈개수문   20. 차헌기의 기록   21. 신도비명   22. 기타
    III. 원파록 검토와 황제 연원설 비판
        1. 원파록 내용 종합
        2. 기사보(류처후)의 토론
        3. 현재의 원파록 기자의 추가 토론
        4. 지금까지 나온 계보들에 대한 종합 검토
        5. 원파록 비판
            (1) 총론   (2) 강남보 위조설   (3) “차원부설원기”와 “대동운부군옥” 등의 문헌 관련
    IV. 역사에서 본 문화류씨 선계 문제
        1. 대승공의 존재 - 개국공신; ‘차달’이라는 이름
        2. 대승공 이야기의 변천
        3. 대승공
        4. 대승공의 선계
        5. 대승공의 후계
    V. 연안차씨들의 주장과 반박
    VI. 결론


0. 서론

성(姓)이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핏줄이란 여성을 생각하면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는 그래서 성이란 무형의 어떤 가치를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불충분하지만 과거와의 연결고리이며 천의 드러나는 씨실이다. 여성들이 드러나지 않게 날실로 짜서 이루어내는 천이 바로 세상이다. 성(姓)의 불완전성은 지금으로서는 극복하기에 쉽지 않아 보이지만 결국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바뀌어 갈 가능성도 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존재하기 때문에 성(姓)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姓)이 인간을 지배할 수는 없는 일이며, 그 어떤 혈연과 관계의 개념도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데 있어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 혹은 진실은 참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누군가가 당시에 살아서 글을 남겼고 그 글이 그 사람이 쓴 진본임이 밝혀진다면, 이 경우에도 역시 그 기술(記述)에 왜곡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되겠지만, 그래도 나은 편이다. 어떤 권위를 갖고 쓰인 역사서나 문서들도, 이 경우 역시 왜곡의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정사(正史)에 기록될 만한 사건들은 그 숫자에 있어서 제한이 있었고 그 기록들 역시 그 상세함에 있어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사는 정사라 해도 그 사료(史料)와 재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집안의 역사는 정사의 기록에 도움을 받는 것이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가승(家乘: 직계조상에 대한 간단한 기록), 족보, 비문(碑文), 집안에 내려오는 자료들과 여기저기 문헌들에 들어있는 내용들을 간추려서 역사로 삼는다. 그런데 이런 기록들은 대부분 당시에 쓰인 경우보다 한참 후대에 내려와서 쓰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옛날 기록이라는 것들은 대개 손으로 직접 쓴 것들이 많아서 이본(異本)들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목판이나 활자로 찍어낸 문헌들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과거에 집안의 내력이나 족보나 집안의 기록들을 부풀리거나 조작하는 일도 많이 자행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려시대 전만 해도 성씨가 별로 없었다가 지금은 모두 성씨가 있고, 조선 초기에 양반이 전국민의 몇 %에 지나지 않았다가 조선 말기에 대부분이 양반에 속했다. 성씨의 변경을 포함한 신분의 변경이 조선시대 말기까지 심하게 이루어져 왔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옛 문헌들을 살필 때는 여러 사항들을 감안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면 문화류씨는 가문사(家門史)가 비교적 잘 유지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고려사의 열전에도 나오는 역사적 인물인 류공권(1132-1196; 대승공 7세손)과 그의 손자인, 무신정권에서 왕권을 회복시킨 류경(1211-1289)에 이르러 대단한 문벌(門閥)을 이루어 이것이 조선시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진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찍이, 지금은 서문만 남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인정받고 있는 영락보(永樂譜, 1423년 세종 5년)와 그 다음의 문화류씨 족보인, 사계(斯界)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가정보(嘉靖譜, 1562년 명종 17년; 10권 2204 페이지)가 만들어져 가문의 역사가 정립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여러 성씨들의 가계의 기록들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본격적인 체재를 갖춘 족보로서의 효시는 영락보라고 인정받고 있다.)

여기서는 우선 문화류씨 상계에 대해 대립되는 두 설을 요약하고, 상계에 대해 기술되어 있는 내려온 문헌들을 시대에 따라 살펴본 다음, 그 각각의 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결론을 내어 보았다. 이하에서 문화류씨의 시조 류차달을 대승공으로 호칭했다.


I. 문화류씨 상계에 대한 설들

문화류씨 상계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 다음 두 설로 모아진다. 여기서 우선 다음 논의를 위해 간단하게 그 내용을 알아본다.

1. 황제 연원설(黃帝 淵源說)

현재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황제 연원설이다. 곧 문화류씨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에서 시작되었으며, 그의 성씨인 희(姬)씨에서부터 사([女以])씨-왕(王)씨-차(車)씨를 거쳐 류씨가 되었으며, 대승공이 두 아들이 있어 그 첫째 아들이 연안차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400여년전 임진왜란을 전후해 문화류씨들에게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한 설이며, 따라서 태생적 한계가 큰 주장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유학적인 사고방식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강화되면서 믿음의 수준으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문화류씨 뿐만 아니라 연안차씨와 개성왕씨의 선계에 대한 주장이 포함되어 있어 그들에게도 받아들여져 왔으며, 또한 조선시대 후반에 사문서뿐만 아니라 관에서 제작한 문헌들에도 사실로서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2. 대승공 시조론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대승공에 관한 기술(記述)에 대해서도 그 역사적 진실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더구나 대승공의 아들로 알려진 효금(孝金)과 그 아래 몇 분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대승공의 실재를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도 확실히 존재한다. 이런 사실들은 현재 역사적으로 그 실체를 희미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윗대의 선조가 대승공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황제 연원설은 실질적 시조를 황제로 설정하는 것인데, 그에 반해서 대승공 시조론은 문화류씨의 가문사의 기록이 대승공에서만 시작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보다 엄밀한 문헌비평적 방법론에 입각한 묘사를 준다. 그리고 대승공 이상의 선조에 대한 사항은 추정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만들며, 또한 연안차씨의 시조 차효전이 대승공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비록 기록에 남지 않았다 해도 시조의 조상은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그에 대해 정황적인 논의들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실제 계보를 이을 수 있는 경우로만 국한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II. 문헌의 검토

현재 문화류씨 족보에는 원파보(元派譜)가 실려 있는데, 류처후(柳處厚; 대승공 21세손)가 편찬한 기사보(己巳譜, 1689년, 숙종 15년)에 처음 등장한 원파보에 19세기 전반에 등장한 강남보(江南譜, 1812년)라는 것이 합해져서 형성된 것이다. 기사보의 원파보는 다시 차원부설원기의 내용과 류용수의 계보가 합해져 있다. 여기서 이들을 포함하여 대승공과 그 선계를 다루고 있거나 관련이 있는 문헌과 사료들을 가능한 한 연대순으로 살펴본다.

1. 류공권(柳公權) 묘지명

* 년대: 명종 26년, 1196년
* 소재: 국립중앙박물관
* 류공권: 1132-1196. 고려시대의 문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름.
* 지은이: 미상.
* 발췌: 공은 이름은 공권(公權)이고, 자는 정평(正平)이며, 성은 류씨(柳氏)로, 시령(始寧) 사람이다. 증조 노일(盧―)은 검교대장군 행산원(檢校大將軍 行散員)이고, 조부 보춘(寶春)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이며, 아버지 총(寵)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이며, 어머니는 쌍□현대군 이씨(雙□縣大君 李氏)이다.
    公諱公權字正平姓柳氏始寧人也 曾祖諱盧―檢校大將軍行散員
    祖父諱寶春檢校少府少監 考諱寵檢校少府少監 비曰雙□(*1)縣大君李氏
    *1. 족보에 城으로 나옴. 비 = [女比]

2. 류보발(柳甫發) 묘지명

* 년대: 충혜왕 1년, 1340년
* 출처: “가정집(稼亭集) 11”
* 류보발: 1304-1340. 대승공 12세손.
* 지은이: 이곡(李穀, 1298-1351). 호 가정(稼亭). 이제현의 문인.
* 발췌: 유주류씨(儒州柳氏)로 (고려)개국의 위업을 도와 준 이가 있는데 그 후 복록이 이어지고 덕이 펴져서 대대로 어질고 훌륭한 사람이 나왔다. ...
    명(銘)하여 이른다. 류씨(柳氏)의 흥성은 나라와 함께 하였으니 그 근원은 아득하고 복은 흘러 끊어지지 않도다.
    儒州柳氏有佐命開國(*1)者其後延慶食德代生賢哲 ...
    銘曰柳氏之興與國竝焉源其遠矣流慶綿綿
    *1. 開國이 "가정보"에는 閥闕(여기서는 ‘공적’의 뜻)로 나와 있음.

3. 권부(權溥) 처 류씨(柳氏) 묘지명

* 년대: 충목왕 1년, 1344년
* 소재: 국립중앙박물관
* 권부: 1262(원종 3)∼1346(충목왕 2).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 류씨부인: 류승(柳陞, 1248-1298. 고려의 문신. 대승공 10세손)의 딸.
* 지은이: 이제현(李齊賢, 1287-1367). 고려시대의 문신.학자. 권부와 류씨부인의 사위.
* 발췌: 시령류씨(始寧柳氏)는 국초(國初)로부터 이름난 성(姓)이다. 대승(大丞) 차달(車達)이 태조(太祖)를 도와 공을 세웠다.
    始寧柳氏自國初爲著姓有大丞車達佐 太祖有功

4. 류돈(柳墩) 묘지명

* 년대: 충정왕 1년(1349)
* 소재: 대전 문화류씨대종회(탁본소장)
* 류돈: 1273-1349. 대승공 11세손. 벼슬이 도첨의찬성사 예문관대제학(都僉議贊成事 藝文館大提學)에 이름.
* 지은이: 안진(安震). ?∼1360(공민왕 9). 고려 말의 문신.
* 발췌: 공의 이름은 돈(墩)이고, 자는 백구(伯丘)이며, 성은 류씨(柳氏)인데, 첫 이름은 인화(仁和)이다. 문화현(文化縣) 사람이다. 그 선조인 차달(車達)은 태조(太祖) 대의 공신이다. 아직 벼슬하지 않았을 때, 그 현(縣)을 지나가는데 큰 호랑이가 으르렁대며 길 한가운데에 엎드려 있었다. 소리를 들어보니 병이 들었음을 알고,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어 목구멍 안에 걸려 있는 것을 뽑아내었는데 바로 은비녀였다. 호랑이는 껑충 뛰어 오르며 사라졌다. 그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신이 와서 말하였다. "나는 구월산(九月山)의 주인이오. 어제 저녁부터 목이 아파 고생하였는데 다행히 공의 도움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9대에 평장사(平章事)가 나게 하여 주겠소."
    公諱墩 字伯丘 姓柳氏 初名仁和 文化縣人也 其先車達 太祖功臣
    微時過本縣 巨虎 咆哮 當路而 伏聞聲而知病 擘其口抽喉中橫刺乃銀釵也
    虎躍而去 其夜夢有神曰我主九月山昨구喉病幸賴公活其報在九代平章事乎
    *구 = 만날 구; 構에서 木부가 아니라 책받침 부

5. 흥률사갑자중수양상소기서(興栗寺甲子重修梁上所記書)

* 년대: 1356년(공민왕 5년)?
* 설명: 신비로운 표현들로 이루어진 글이다. 믿을 수 있는 글인지 판단이 요구된다. 글의 제목은 “흥률사를 갑자년에 중수하다가 대들보 위에서 발견한 기문(記文)의 글”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갑자년은 1564년(명종 19년)인데, 그 글 속에는 1356년(공민왕 5년) 4월에 쓰인 글이라고 밝혀져 있다. 흥률사는 구월산에 있는 절이다.
* 줄거리: 흥률사의 기원에 대한 언급을 한 후에 그 동네의 한 촌락이 있어 56호가 거주하고 있는데 그곳은 신비한 동네라는 묘사가 이어진다. 그런데 그곳에 한 신인(神人)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홀연히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왕장군(왕건을 의미)이 군량이 떨어졌다고 알렸다. 신인은 하루 밤에 수레 천 대의 군량을 꾸렸는데 그 수송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때 흥률사의 부처가 신군(神軍) 천여명을 내어 잠깐 사이에 운송하였다. 그리하여 전공을 크게 세워 삼한을 통합하였다. 그리하여 사명(賜名: 이름을 내려줌)하여 류차달이라 하였다(因其錫名柳車達). 따라서 이 절의 영험이 아니었다면 왕장군이 삼한 통합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생략했지만 신인의 묘사가 아주 훌륭하다. 여기서 왕건이 '류차달(柳車達)'이라는 이름을 내려준 것으로 되어 있고, 왕건은 주로 왕장군이라 불리고 있다.

6. 조선왕조실록, 류량(柳亮)의 졸기(卒記)

* 년대: 태종 16년, 1416년
* 발췌: 문성부원군 류량(柳亮)이 졸(卒)하였다. 류량의 자(字)는 명중(明仲)이요, 문화(文化) 사람이다. 밀직사(密直使) 류계조(柳繼祖)의 아들로서 그 선대에 류차달(柳車達)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高麗太祖)에게 공이 있었으므로, (삼한(三韓)을) 통합할 때 ‘삼한 공신(三韓功臣)’이라 사호(賜號)했다. 자손이 대대로 달관(達官: 높은 벼슬이나 관직)이 되었다.
    文城府院君柳亮卒 亮字明仲 文化人也 密直使繼祖之子
    其先有車達者有功於麗祖統合之時 賜號三韓功臣 子孫世爲達官

조선조의 기록이다. 류량(柳亮, 1354-1416)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동안 우의정에 이른 분이다. 여기서 사호란 왕이 명칭을 내려주는 것을 말한다. 실록을 살펴보면 호(號: 본명이나 자(字) 이외로 쓰는 이름)뿐만 아니라 사당의 이름, 공신의 칭호, 지명 등의 사호의 예가 있다.

7. 영락보 서문

* 연대: 1423년
* 편찬자: 류영(柳穎, ?-1430), 조선 전기의 문신. 대사헌, 관찰사, 예조참판 역임.
* 설명: 영락보는 현재 서문만 전하는데, 최초의 족보로 인정받고 있다. 서문에는 부족하지만 류효금의 사적이 암시되어 있고 대승공에 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 발췌: 어떤 사람은 "문화류씨의 후손이 번창한 것은 좌윤공(효금을 말함)이 호랑이를 살려준 것에 대한 음덕(陰德: 남이 모르게 행한 덕)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 우리 류씨는 고려의 초에 일어나 ... 대승공이 재산을 기울여 임금을 도우심...이 그 시작이며 ...
    或曰文化柳氏後嗣之蕃左尹公救虎活命陰德使然也 ...
    我柳氏起於高麗之初 ... 厥初大丞之傾財補主 ...

영락보의 서문은 전체가 대승공의 아들 류효금(柳孝金)의 사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그의 얘기가 전해져 왔음이 암시된다.

8. 고려사

* 년대: 1451년 완성.
* 저자: 김종서, 정인지 등
* 설명: 1421년 1차 완성하였고, 중간에 편찬자들이 임의로 쓴 부분도 있는 "고려사전문"(全文)으로 발간되기도 했으나 세종은 김종서, 정인지 등에게 명령을 내려 내용을 충실하게 하면서 잘못을 고치도록 했고, 문종 1년(1451년) 완성했다. 열전에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어서 비판이 거셀 것을 우려하여 보관하고 있다가 1454년 10월에 비로소 널리 반포되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세우려는 측면에서 기술된 부분들도 있지만 역사성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고 객관성과 주체성도 지키고 있다. 개별 인물에 대한 평가는 이전부터 있던 자료들을 이용하여 비교적 공정하게 쓰고 있다.
* 발췌: 류공권의 자는 정평(正平)이며 유주(儒州) 사람이다. 그의 6대조는 대승(大丞) 차달(車達)인데 태조를 보좌하여 공신으로 되었다.
    柳公權字正平儒州人 六世祖大丞車達佐太祖爲功臣

고려사의 열전(列傳)에 나오는 기록이다. 류공권(柳公權, 1132-1196)은 고려 명종 때 활약한 분으로서 관점에 따라서는 문화류씨의 실질적 시조라 해도 될 분이다. 류공권은 종2품의 벼슬까지 이르렀는데, 그의 손자 류경(柳璥, 1211-1289)은 고종 45년인 1258년 무신정권을 이어가던 최의를 제거하고 왕권을 회복시켜 나라를 좌지우지한 대단한 인물이었고, 이듬 해 나라에서는 유주(儒州: 황해도 구월산 남쪽의 옛 지명)를 그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로 바꾸고 현으로 승격시켜 보답을 표시했다. 류경 역시 고려사 열전에 나오는데, 조부 류공권에 그 선조가 밝혀져 있어 "정당문학(정부의 최고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종2품 벼슬 이름) 공권의 손자"(政堂文學公權之孫)라고만 나온다.

9. 차원부설원기

* 년대: 1456년 (실제는 미정)
* 저자: 박팽년 등 (실제는 미정)
* 내용: 이 책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차원부설원기 비평”을 참조할 것. 여기서는 류-차 관련만 기술한다. 설원기에는 연안차씨의 상세한 내력이 밝혀져 있다. 본문에서는 그 시조인 차효전이 류차달의 맏아들이며 공적을 세워 대광지백(大匡之伯)이 되고 1000호의 식읍을 받았고, 그 후손들 역시 문벌을 이루어왔다고 말하고 있다. 류씨와 차씨가 같은 뿌리라는 소위 ‘류-차 동원’(同源)의 내용을 포함한 족보가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있었는데 하륜이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주석에는 차씨 성을 하사한 이유, 차효전이 참언에 연루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류씨와 차씨의 큰 계통 혹은 신라 본계(本系) 등이 서희(徐熙)의 "가사(家史)" 혹은 서희의 "찬집여사(撰集餘史)"["찬집여사"가 제목인지 혹은 "여사"가 제목인지 분명치 않음], 정지상(鄭知常)의 "서경야사(西京野史)" 혹은 "서경잡기(西京雜記)"[이상 두 사람의 작품은 제목이 혼동되어 나옴], 김방경(金方慶)의 "초당일기(草堂日記)", 그리고 김사형(金士衡), 김균(金[묶을 균]) 등이 편찬하여 정종에게 보고한 계보에 나온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이예장(1406-1456)의 응제시와 주석에서는 다음 내용이 주어져 있다.
   - 신라 미추왕(味鄒王, ?-284, 신라 제13대 왕, 재위 262-284) 때의 '승상'인 차제능(車濟能)에서 시작해서 차승색(車承穡)과 차공숙(車恭淑)까지, 모두 해서 18명의 차씨 계보가 제시되어 있다. 이들 18명 중 14명이 '승상'이었다.
   - 승색과 공숙은 신라 헌덕왕(憲德王, ?-826, 신라 제41대 왕, 재위 809-826; 본명 김언승金彦昇) 때 그에게 살해당한 전왕(前王)의 원수를 갚고자 하다가 탄로 나서 도망쳐서 이름을 각각 류백(柳栢)과 류숙(柳淑)으로 바꾸었다.
   - '車達'의 호(號)가 주어졌으며, 그 아들에게 조상의 위대함을 이어가도록 별도로 성씨를 하사했다.
   - 류차달의 처음 이름은 해(海)였다. "공숙-진부-무선-보림-해"로 이어졌다.
   - 이예장은 자신을 차상도(차원부의 손자)의 처 김씨의 이성(異姓) 5촌 조카라고 밝혔다.

설원기의 내용은 16세기 말부터 당시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에 실리는 등,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식의 신도비명(1619년)에도 나왔는데, 여기서는 이들도 살펴볼 가치가 있어 아래에 따로 다루었다.

10. 충장공림묘지문(忠莊公臨墓誌文)

* 연대: 1525년
* 류림: 14세기 후반 인물. 증(贈) 병조판서.
* 지은이: 류경조(柳敬祖). 16세기 전반 인물. 당시 영월군수. 류림의 증손자.
* 발췌: 공의 이름은 림(臨)이고 ... 대승 류차달의 후손이라.
    公諱臨 ... 大丞柳車達之後也

11. 신증동국여지승람

* 년대: 1530년 완성.
* 내용: 황해도 문화현의 항목의 ‘인물’란에 여러 류씨가 소개 되어 있는데 그 처음 두 사람이 대승공과 그 아들 류효금이다. “고려” 인물에 들어 있다.
    류차달: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할 때 차달은 수레를 많이 내어 곡식을 실어 날라 공을 세워 대승의 벼슬과 삼한공신의 호칭을 받았다.
    太祖征南時車達多出車乘以通粮道以功拜爲大丞號三韓功臣
    류효금: 차달의 아들이다. 일찍이 구월산에 유(遊)하다가 길에서 큰 호랑이를 만났는데 입을 벌리며 눈물을 흘렸다. 입 속에 흰 물건이 끼어있어 효금이 말하기를 “네가 나를 해치지 않으면 그것을 꺼내주겠다”고 하니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행동을 하였다. 그래서 꺼내니 은비녀였다. 밤에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말하였다. “나는 산신령인데, 어제 성당리(지명)에서 부녀자 한 명을 잡아먹었는데 물건이 목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공이 나를 구해주었다. 공의 자손은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될 것이다.” 효금은 벼슬이 좌윤에 이르렀다.

12. 대승공차달묘갈문(大丞公車達墓碣文)

* 년대: 1543년
* 지은이: 홍춘경(洪春卿). 1497(연산군 3)-1548(명종 3). 당시 황해도 관찰사. 대승공의 외(外)후손.
* 발췌: 공의 이름은 차달이요 성은 류씨라, 가세(家勢)가 큰 부자러니 고려 태조가 남정(南征)할 때 수레를 많이 내놓아 군사의 위엄을 떨치게 하니 그 공으로 대승(大丞)이란 벼슬을 하고 돌아가시니 문화 구월산에 장사 지냈다. 대승공이 효금(孝金)을 낳으니 벼슬이 좌윤(左尹)에 이르고 좌윤이 금환(金奐)을 낳으니 벼슬이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公諱車達姓柳氏 家鉅富高 麗太祖南征時 多出車乘以脹軍威 以功拜大丞 卒葬文化
    大丞生孝金官至左尹左尹生金奐官至大將軍
    * 묘갈: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석.

13. 문화류씨 세보(世譜) "가정보"(嘉靖譜)

* 년대: 1562년 (명종 17년)
* 편찬자: 류희잠(柳希潛), 대승공 20세손.
* 설명: 가정보는 10권 2204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문화류씨 최고의 족보이며, 족보사(史)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서자의 기록을 하지 않아 적서의 편견이 없고, 내외손(內外孫)을 차별 없이 동격(同格)으로 취급하고, 류씨들도 성과 이름을 다 썼으며, 4만 2천명이 등재되어 있는 가운데 오히려 류씨들은 3% 정도 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은 만성보(萬姓譜) 성격의 족보이며 그 기록의 정확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정보는,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족보이나 지금은 서문만 전하고 있는, 1423년(세종 5년)에 편찬된 "영락보(永樂譜)" 다음에 만들어진 문화류씨의 두 번째 족보이다. 그런데 그 서문이 바로 가정보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 가정보는 영락보의 모체가 되었음이 확실하다. 가정보 속에는 또한 영락보의 편찬자 류영(柳穎; 知禮曹事)이 지은 경기체가 “구월산별곡”이 들어 있는데, 물론 한글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자들도 모두 한글로 토가 달려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대승공을 포함한 윗대의 선조들에 대한 기록은 영락보의 것을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실제 1423년 이전의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앞에 실린 내용들의 대부분이 여기 실려 있다. 그 종합으로서 다음과 같은 대승공에 대한 묘사가 맨 처음에 나온다.
* 전문:
    시조 삼한공신 대승공 류차달
    공은 삼국시대에 유주에 살았고 아주 큰 부자였다.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할 때 공이 많은 수레를 내어 곡식을 운반하였다. 태조는 공에게 대승의 벼슬을 내렸고 삼한공신이라는 호칭을 내려주었다. 아들을 두었으니 좌윤(관직명) 효금이다.
    始祖三韓翊贊功臣大丞柳車達 시조삼한익찬공신대승류차달
    公三國時居儒州甚豪富 공삼국시거유주심호부
    高麗太祖征南公多出車乘以通粮道 고려태조정남공다출거승이통량도
    太祖拜公爲大丞號三韓功臣 태조배공위대승호삼한공신
    生子左尹孝金 생자좌윤효금

14.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 년대: 1589년
* 편찬자: 권문해(權文海, 1534-1591),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선조 때 사간(司諫) 벼슬을 함.
* 설명: 일종의 백과사전인 이 책은 많은 책들을 바탕으로 지어졌는데 그 목록 안에 “차원부설원기”가 들어 있다. 차원부가 하륜, 정도전 등의 모함을 받아 일가족이 화를 입었다는 내용과 태종이 문하시중의 벼슬을 내리고 시호를 문절(文節)로 했다고 나온다.
* 내용: 문화류씨 선계 문제 관련으로 “류차달” 항목에는 “문화현 사람으로 왕 태조가 남정할 때 (류)차달은 수레를 많이 내어 곡식을 운반하여 대승의 벼슬을 내렸다.”고 되어 있고 그 바로 아래에 “그 아들 효금”의 항목에 구월산에서 호랑이를 만나 구해주고 축복받은 얘기가 적혀 있다.
    차승색의 항목 등에 설원기의 내용을 대략 반복하고 있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로 나온다.
    - 혁거세 때에 차몽일(車蒙一)이 있었는데 차씨가 변하여 류씨가 되고 고려초에 대승 류차달의 아들 효금*에 이르러 옛 성을 회복하여 차(車)를 성으로 삼았다. (*원문에 ‘孝金’이라고 나옴.)
    - 차승색과 차공숙이 변한 이름은 각각 류색(柳穡)과 류숙(柳叔)이라 함. (설원기와 다른 표기.)
    - 정지상이 지은 “보음록”(報陰錄)을 보면 ‘고려태조 왕건은 바로 왕수긍의 13세손인 왕몽의 제3자 식시(式時)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문화류씨 원파보는 ‘차몽일’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차무일’(無一)이라고 나온다.

15. 묵방사 완복문(墨坊寺 完復文)

* 년대: 1585년
* 저자: 류희림(柳希霖, 1520(중종 15)∼1601(선조 34))
* 내용: 묵방사는 대승공 묘소 앞에 있는 건물로서, 원래 절이었는데 재실(齋室: 제사를 지내는 집)로 쓰고 있다고 한다. 1585년에 류희림이 황해도 관찰사로 가서 그곳을 찾아보고 묵방사를 중수(重修: 다시 고침)하자는 주제의 글인 "묵방사 완복문(完復文)"을 썼다.
    그런데 거기에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근처에, 구월산에 흥률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곳에서 14세기 중엽에 어떤 중이 지은 글이 나왔다는 것이다. 류희림은 그 속에 이해할 수 없는 내용도 있다고 말하면서, 그렇다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글에서는 류희림은 흥률사의 글에서 신비적인 요소를 제외한 기본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는데, 곧 대승공이 신라 말에 전쟁에서 수레를 출동시켜 양식을 조달하여 삼한통일에 공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고 쓰여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그런 문서가 증거가 없어 아쉽다고 말하며 그런 내용이 들어있는 확실한 문서들이 내려왔다면 얼마나 좋을까 탄식하고 있다.
    류희림의 글에는 흥률사에서 나온 글이 무엇인지 설명이 나와 있지 않지만, 그 글의 제목은 바로 앞에서 다룬 "흥률사갑자중수양상소기서"이다.

16. 류지원의 글

* 년대: 광해조(1609-1623)
* 내용: 류처후가 쓴 기사보의 원파록에는 류지원의 글이 나온다. 거기에는 ‘류용수의 계보’가 입수된 경위와 함께 설명되어 있다. 글의 중간에 그 저술 시기에 관한 단서가 몇 개 나오며, 이들을 종합하면 광해조(1609-1623)에 쓰인 글로 나타난다. 그 시대적 배경은 임진왜란인데, 대승공 20세손(충경공파)으로 나오는 류지원(柳智源)이라는 사람이 의병을 모집하러 다니다가 결성현(結城縣,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의 일부)에서 류용수(柳龍壽)라는 사람을 만났다. 류용수는 중국 출신으로 난을 피해 그곳으로 피해 있었는데 대승공의 후손이라고 했다. 류용수는 류지원에게 대승공의 내력을 이야기해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류씨의 시작은 황제(黃帝)이다.
   - 그 후손 하후씨(夏后氏)의 13세손이 왕조명(王祖明)이다.
   - 왕조명은 유루(劉累; 인명)와 함께 용(龍)을 키우다 실수하여 피신하여 조선 평양의 북쪽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정착하였다.
   - 왕조명의 후손이 왕수긍(王受兢)이다. 왕수긍은 기자(箕子)의 스승이 되었다.
   - 왕수긍의 33세손이 왕몽(王蒙)이다. 당시에 "一土山草者家王"이라는 참언이 돌았는데 (一土=王의 파자, 草家=蒙의 파자; 이것은 "왕몽" 혹은 그 집안사람이 왕이 된다는 뜻임) 이로써 목숨의 위협을 느껴 피신했다가 세 번 성을 갈아 차씨가 되고(王-田-申-車) 이름은 무일(無一)로 바꾸어 차무일이 되었다. 한편 왕몽의 셋째아들이 왕식(王式)인데, 왕식의 후손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라서 참언은 적중했다.
   - 왕몽의 일곱째아들 왕림(王琳)은 차신을(車神乙)이다.
   - 차신을의 31세손이 류색(柳穡)이다. 당시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이 왕위에 오르자 복수를 하려다 탄로나 유주(儒州)로 도망쳐서 이름을 바꾼 결과였다. 할머니의 성 양(楊)씨를 본떠 柳씨가 된 것이었다.
   - 류색의 5세손이 류차달이다. 태조 왕건을 도와 크게 가문을 일으켰다. 장자(長子)는 연안차씨, 차자(次子)는 문화류씨로 봉하였다.

여기서, '듣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류씨가 아니면 알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며, 류지원은 류용수의 글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世系)를 과장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류용수라는 사람이 류씨이고, 글로 기록된 것이며, 계묘(癸卯)년(1603년, 선조 36년) 류덕신(柳德新: 광해군의 장인이었던 류자신의 아우)도 그런 얘기를 동료였던 권문해(權文海)라는 사람에게 들었음을 들어 수용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권문해는 위에 나온 “대동운부군옥”의 저자이며, 그 책에 왕수긍과 왕몽의 관계, 차몽일의 존재, 차승색의 행적, 대승공에서 류효금과 차효전이 갈라짐 등의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틀은 이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17. 차식(車軾)의 신도비명

* 년대: 1619년
* 작자: 류몽인
* 내용: 차식(1517-1575; 호 이齋[이?=턱 이])은 문과에 급제하여 당시 한미했던 차문(車門)을 비로소 일으킨 사람이다. 아들에 유명한 문장가인 차천로(車天輅, 1556-1615)가 있다. 차식의 신도비는 류몽인(柳夢寅, 1559-1623)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차천로의 작품집인 오산집(五山集, 1791년 간행)의 부록에 차식의 글 모음 뒤에 "부신도비명(附神道碑銘)"(신도비명을 부록으로 덧붙여 놓았다는 뜻)이란 제목으로 붙어 있고, 후손이 유고를 모아 간행한 류몽인의 "어우집"(1832년)에도 나온다.

류몽인은 고흥류씨인데, 문화류씨가 아니어선지 모르겠지만 차씨와 류씨의 관계에 대한 평가는 없으며, 류차달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류효전이 고려 태조에게 공을 세워 차씨 성을 하사받았다고만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은 신도비명인만큼 차식과 그 선조 및 후손들에 대한 내용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들어있다.

   - 신라 미추왕 때 승상 차제능(車濟能)이 있었는데, 정지상이 지은 "서경야사"에는 '차제능은 유루(劉累)의 후예'라고 나온다.
   - 기자(箕子)가 조선에 올 때 차제능의 선조도 데리고 왔다.
   - 차제능 17세손 승상 차승색(車承穡)과 18세손 사공(司空) 차공숙(車恭叔)에 이르렀는데 이들 18대 중 승상에 오른 사람이 14명이었다.
   - 애장왕을 살해하고 헌덕왕이 들어서자 차승색 부자는 그 복수를 갚으려다 탄로되어 유주로 피신했고, 할머니 楊씨를 본떠서 柳씨로 변성하고, 차승색은 류환(柳桓), 차공숙은 류숙(柳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류숙에서 5세 지나 류효전에 이르러 고려 태조의 남정(南征)을 도와 수레를 내어 양식(糧食)을 조달하여 큰 공을 세워 옛날 성을 복원하여 차씨가 되고, 그로 인하여 연안이 본관이 되고 식읍 천 호에 대광백(大匡伯)을 봉했다.
   - 차효전의 자손 열거, 차원부로 이어짐. 설원기의 내용이 요약됨. 문종 때 박팽년에게 설원기를 짓게 했음. [*현재의 설원기는 세조 때 왕명으로 지었다고 나옴.]
   - 차식의 내력.
   - 차식의 후손.
   - 이 글(신도비명)을 쓰는 류몽인의 겸손의 말.
   - 명(銘: 운문으로 찬양한 글).

류몽인은 그의 작품집인 "어우야담"에서 차식에 대해 몇 번 언급하고 있고 나이도 서로 비슷해서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류몽인은 광해군 때 북인(北人)에 가담했으나 폐모론(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주장)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실록에는 1618년 직에서 해임된 것으로 나오며, 그 후 은거(隱居)했다. 이로 인해 1623년의 인조반정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같은 해에 광해군의 복위를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아들과 함께 사형당하고 말았다. 차식의 신도비명은 1619년 기미(己未)년에 쓰였다고 나오며, 당시 역신(逆臣)의 글이라 하여 실제 비석에 새기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18. 씨족원류(氏族源流)

* 년대: 1652년
* 편찬자: 조종운(趙從耘, 1607-1683)
* 설명: "씨족원류"는 통합족보인데, 학식이 뛰어난 집안에서 태어난 조중운은 실전(失傳: 전하여 오던 사실을 잃어버림)한 자신의 선대의 세계(世系)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다가 다른 성씨들의 계보에까지 깊이 매달리게 되어 그 결과로 탄생된 책이라 한다. 여기에는 17세기 중반까지의 조선의 중요한 성씨들이 망라되어 있는데 약 540개의 성관(姓貫: 성과 관향)이 수록되어 있다.
    자녀는 대개 출생순에 따라 수록되어 있고, 본성과 외파를 거의 차별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다른 유사한 통합보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통합보의 결정체였으며, 사람들이 자신들의 족보의 기록의 정확성을 이 책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많은, 객관성이 높은 족보이다. "씨족원류"의 문화류씨 "류차달"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태조 통합삼한 벽상 개국공신 중대광 대승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할 때 공이 많은 수레를 내어 곡식을 운반하여 공을 세워 대승의 벼슬을 내렸다. 묘는 문화면 묵방리에 있다.
    麗祖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重大匡大丞 려조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중대광대승
    麗祖征南公多出車乘以通粮道以功拜大丞 려조남정공다출거승이통량도이공배대승
    墓在文化面墨坊里 묘재문화면묵방리

'벽상'이란 말은 벽 위에 화상을 그려 넣었다는 뜻이고 고려시대 초기의 관제는 혼란스럽지만 대략 '중대광'은 고려 시대의 1품에 속했고 ‘대승’은 3품에 속했다. 여기서 보면 여러 급의 품계가 혼동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 말고는 가정보 등의 묘사와 동일하다. 일견 후손들이 흔히 범하던 조상들의 벼슬을 올려주는 인플레가 일어나 있는 듯이 보이지만 여기서도 결국 대승이라는 벼슬로 귀착되는 것을 보면 일관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씨족원류"에서는 대승공의 아들로서 류효금만을 들고 있다. 효금의 항목에는 ‘좌윤’의 벼슬이 붙어 있으며, 호랑이를 구해주어 축복을 받은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그 글의 끝이 호랑이의 말로서 "‘...공의 자손이 반드시 대대로 경상(높은 벼슬아치)가 되리라’ 하고 말했다."(公之子孫必世爲卿相云)는 구절이다. 한편 '좌윤'이라는 벼슬 이름 아래 "세전공(世傳公)"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전'은 '대대로 전한다'는 뜻인데, 바로 그 호랑이의 말에서 유래한 "대대로 복록(福祿)을 후세에게 전한 분"을 뜻하는 칭호로 판단된다. 족보에서는 나오지 않고 여기서만 나타나는 흥미로운 칭호이다.

“씨족원류”는 이하 8페이지를 문화류씨에 할애하고 있다. 그럼 이 "씨족원류"에서는 연안차씨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까. 웬일인지 그곳을 보면 단 5명만 나온다. 차식(車軾)과 그 아들들 4명이 그들이다. 그 기록도 극히 간단해서 차식에게 평해군수라는 직함만이, 그리고 세 번째 아들 운로(雲輅)에게 언제 알성시(謁聖試: 일종의 비정규적인 과거시험)에서 장원했다는 말 등이 적혀 있을 뿐이다.

19. 묘갈개수문(墓碣改竪文)

* 연대: 1678년
* 지은이: 류상운(柳尙運). 당시 황해도 관찰사.
* 발췌: 고려 태조가 남쪽의 백제를 정벌할 때 공(公)이 수레를 내어 통일의 공(功)을 능히 이루니 공을 벽상공훈(壁上功勳)에 책봉하고 벼슬은 대승을 내리었다.
    麗祖之南征百濟也公出車乘克成統一之功策公壁上勳位大丞

20. 차헌기의 기록

* 년대: 1812년
* 내용: 이 기록에서 왕배조의 강남보가 도입되었다. 그 입수 시기는 "崇禎紀元後四壬申秋"이라고 되어 있다. 숭정은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때의 연호(1628-1644)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조선은 청나라 연호를 쓰기를 꺼려해서 이 연호를 썼다고 한다. 곧 숭정 기원(1628년) 후 네 번째 임신년 가을이 되는데, 첫 번째 임신년은 1632년이고 거기에 3번의 임신년, 곧 180년을 더하면 1812년이 된다. 차원부설원기의 계보와 류지원의 글에 나온 류용수의 계보, 그리고 이 왕배조의 강남보가 합해져서 현재 문화류씨, 연안차씨, 그리고 강남왕씨의 원파보를 이룬다.
   이 기록에 따르면 차헌기(車憲基)라는 연안차씨 사람이 가승(家乘: 직계 조상을 중심으로 기록한 책)을 만들고 있을 때 한 노승(老僧)이 찾아와서 그것을 보더니 왕씨의 세계(世系)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 내용은 왕조명 이하의 계보였으며, 다음 내용이 들어 있었다.
   - 신라 애장왕 때의 좌승상(左丞相) 차승색이 그 아들 사공(司空: 벼슬 이름) 차공숙과 더불어 애장왕의 원수를 갚으려 하다 탄로 나서 유주로 망명하여 류씨로 변성함.
   - 차공숙의 아우 사공(司空) 차공도(恭道)는 중국 강남으로 망명하여 옛 성인 왕씨로 회복하여 그 자손이 그곳에 거주함.

그리고 그 노승은 보첩(족보책)을 얻게 된 내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 자신의 이름은 도연(道演)임.
   - 8도를 유람하다가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도사공(都沙工: 뱃사공의 우두머리)인 왕배조(王排助)라는 사람을 만남.
   - 왕배조는 그 보첩을 해남(海南)의 이진(梨津: 전라도의 지명)에 정박하고 있는 강남조선(江南棗船: 강남(중국 지명)의 대추나무 배라는 뜻인 듯) 주인에게 전해달라고 말하고 숨을 거둠.
   - 노승이 왕배조를 장사 지내고 이진으로 가보니 배는 이미 떠나버린 후였음.

이 차헌기의 기록에 따르면 보첩은 기본적으로 왕씨의 내력을 밝힌 것이며, 왕씨였다가 차씨로 변한 후 다시 왕씨가 생겼다는 내용이다. 류처후는 왕배조의 왕씨를 강남왕씨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왕배조의 강남보는 위조라는 글이 연안차씨 족보 중 하나에 실려 있다.

21. 신도비명(神道碑銘)

* 년대: 1863년 이후.
* 지은이: 남병철(南秉哲). 1817-1863. 조선 후기의 문신, 과학자. 벼슬이 판서, 대제학에 이름.
* 발췌: 공의 성은 류(柳)요 이름은 차달이니, 문화인이라. 처음 이름은 해(海)이고, 자(字)는 응통(應通)이요, 아사(鵝沙)는 그 호(號)이다. 고려 태조가 남으로 신라와 백제를 정벌할 때에 수레를 많이 내어 군사의 위엄을 떨쳐 통일을 도와 이루니 벽상2등훈(勳)에 책봉되고 벼슬은 대승이 되고, 개국공(開國公)에 봉해졌다. ... 삼가 가승(家乘)을 참고하니 멀리 헌황(軒皇) 때로부터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성을 고치어 오더니, 뒤에 차씨가 되었다가 또 류씨로 다시 고치었다. 류색(柳穡)이 신라에서 벼슬하여 벼슬이 좌상(左相)에 오르고, 5세에 대승공이 나시었다. 공의 아버지의 이름은 보림(普林)이니 월흑산장(月黑山長)이요, 조부의 이름은 무선(茂先)이니 해평산장(海平山長)이요, 증조의 이름은 진부(振阜)인데 덕을 숨겨 나타나지 아니하고(벼슬이 없고), 고조의 이름은 숙(叔)이니 벼슬이 사공(司空)이요, 사공의 아버지는 곧 좌상공(류색)이니 사람들이 예양(豫讓, 중국 전국시대의 진(晉)나라 의사(義士). 섬기던 왕이 복수를 최후까지 도모하다가 죽음)과 같은 국사(國士: 나라의 뛰어난 선비)의 풍모가 있다고 말했다. 당 헌종(憲宗, 당나라의 제11대 황제, 재위 805-820) 때에 유주에 거주하였고, 그에 따라 본관을 정했다. 대승공이 신라왕 알지(閼智)의 후손(곧 경주김씨) 균(묶을 균)의 딸과 결혼하여 2남을 낳았다. 장자는 효전이니 연안백(延安伯)이고 옛 성 차씨를 계승하고, 차자는 효금이니 벼슬이 좌윤이다. 6세에 공권(公權)이 있으니 ...
세상에 전하기를 대승공의 아들 좌윤공이 아사달산(阿斯達山)을 지날 새 호랑이의 목에 걸린 은비녀를 뽑아주니 산신령이 꿈에 나타나서 사례하길 "공의 후손이 마땅히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하였기에 류씨의 번성함이 실로 이 때문이라 한다. ...
    公姓柳諱車達文化人也 初諱海 字應通 鵝沙其號也
    當麗祖之南征羅濟 多出車乘以脹軍威贊成統一 策壁上勳官大丞封開國公 ...
    謹按家乘 遠軒皇時기俄東累改姓氏後爲車氏又改柳氏
    有諱穡仕新羅官至左相五世而生大丞公
    公之考諱普林月黑山長 祖諱茂先海平山長 曾祖諱振阜皆陰德不耀
    高祖諱叔官司空 司空之考卽左相公 世稱有豫讓國士之風
    唐憲宗之時居 儒州因爲貫焉 大丞娶新羅王閼智后孫균女
    生二男 長孝全延安伯襲舊姓車氏 次孝金官左尹六世諱公權 ...
    世傳大丞之胤左尹公遊阿斯達山爲虎拔익中之釵
    山精謝於夢曰公之後當世爲卿相柳氏之盛實由此
    * 기 = 旣 아래 旦; 이르다 / 익 = [口益] / 균 = 묶을 균

22. 기타

18세기∼현재의 기록들
현재 문화류씨나 연안차씨의 내력에 대해 대부분의 문헌들에서 황제 연원설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있다. 최소한 300년 이상을 문화류씨 족보, 연안차씨 족보, 증보문헌비고, 각종 성씨들을 다루는 서적들, 등등 허다한 문헌에서 받아들여져 왔다. 어떤 책에서 성씨의 기원이나 내력에 대한 설명을 할 때는 그 성씨의 집안의 견해, 곧 족보의 기록을 존중해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황제 연원설은 문화류씨 족보에서 1689년 기사보(己巳譜)에 소개가 된 이후로 그 다음에 1765년에 나온 족보인 을유보(乙酉譜)부터는 완전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일찍이는 17세기의 문헌들, 그리고 18세기 이후의 문헌들에서 같은 설명이 이루어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아마 가장 중요한 예 중 하나가 “문헌비고”라는 책일 것이다. 이것은 원래 1770년 홍봉한에 의해 “동국문헌비고”라는 이름의 책으로 옛날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문물제도를 총망라하여 분류 정리한 책이다. 1908년에 “증보문헌비고”로 총정리되었다. 여기에는 황제 연원설에 입각한 문화류씨와 연안차씨의 유래가 들어 있다. 이런 국가적 편찬사업에서도, 비록 그 기록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 내용을 일일이 고증하고 검증한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성씨의 유래 같은 것은 그 내용이 완전한 거짓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는 한 단순히 개개의 족보의 내용을 발췌해서 넣어놓았으리라고 추측된다. 따라서 이런 책은 무슨 성씨의 유래를 단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어떤 사항의 확대재생산이다. A라는 책에 어떤 다소 의심스러운 사실, 혹은 추측이 쓰여 있다고 하자. 이것을 B라는 책에서 이용하면서 그 의심의 부분이나 추측의 측면을 약화시킨다. 더구나 거기에 새로운 추정이나 다른 알려진 사실을 가미할 수도 있다. 그런 다음 A가 A'의 책으로 확대 개편되거나 새로운 버전 C로 변하면서 B의 내용을 받아들이며,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는 것이다. 과학논문에서조차 추정이 몇 번의 논문을 거치면서, 그게 사실이라는 증명이 되지 않은 채, 사실로 둔갑해 버리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더구나 세월이 흐르며 책들이 재간행되고 원본이 사라지는 등의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면 그 선후도 파악할 수 없게 되어, 이런 과정이 조금만 진행되면 아무리 황당한 이야기도 사실로 성립되어 버릴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사실을 추적할 때는 가능한 한 이런 일들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황제 연원설에는 류씨와 차씨뿐만 아니라 왕씨들도 관여되는데, 실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시기 혹은 출전 미정의 기록들
(1) 묵방사의 기문: 현재 전하는 원파보 혹은 대승공 사적의 말미에 "묵방사의 기문"의 기록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묵방사의 기문(墨坊寺記; 記文=기록한 문서)에 이르기를 공(대승공)의 초명(初名: 처음 이름)은 해(海), 자(字)는 응통(應通), 호(號)는 아사(鵝沙)이며, 고려 태조가 ‘차씨의 홍렬(弘烈: '위대함' 정도의 뜻)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고, 또 이르기를 ‘류씨로 행세(行世)한 지 5세가 되었은즉 역시 폐하지 못하리라’고 하고, 장자 효전으로 하여금 그 수공(首功: 으뜸되는 공)을 드러내고 윗 조상의 옛 성인 차씨를 승습(承襲: 이어받음)하고 연안을 관향으로 하게하고, 차자 효금으로 하여금 류씨를 잉위(仍爲: 그대로 계속함)하게 하였다고 한다.”
    모두 “묵방사의 기문”에 나온 내용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따라서 좀 길지만 한 문장으로 해석해 보았다. 그런데 묵방사의 기문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혹시 앞에 살펴본 “흥률사갑자중수양상소기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거기엔 전혀 저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한편 여기서 ‘류씨로 행세한 지 5세가 되었은즉’(柳氏之行世者五世則)의 부분을 어느 글에서인가는 ‘류씨가 그간 모칭(冒稱=가칭 假稱)한 것도 폐할 수 없어’(這間柳氏之冒稱)이라는 구절로 나와 있는 듯하다. 차원부설원기의 이예장의 시주(詩註)에도 “류백(柳栢=차승색)이 그 할아버지...의 처 양(楊)씨의 성을 모(冒)하여 류씨로 변하여 내려왔다.”(柳栢冒其祖...妻楊姓變柳氏以來也)라고 되어 있다. [이 부분은 연안차씨들이 주장하는 바가 있어 뒤에 따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위의 내용은 현재 대부분의 문화류씨 족보(대동보, 파보 등)에도 그대로 실려 있어 믿을 만한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조사를 해보니 원문에 "謹按車氏譜曰墨坊寺記云...."이라고 되었고, 그 글 말미에 "...云故因其說以備參考"라고 되어 있다. "살펴보니 차씨의 족보에 말하기를, ‘묵방사의 기문에 이르기를 ...’이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그 설(說)을 참고하라고 실어놓는다."는 뜻이다. 묵방사의 기록이라는 것이 후대의 문화류씨 원파록 편찬자들도 볼 수 없어 그 내용을 살펴서 자신들이 소화해서 평가하지 못하고 그냥 언급해 놓은 것이라 생각된다. 대개 기록이란 이렇게 문제가 있게 마련이다. 이상하지만 한번 참고하라, 하고 소개해 놓은 글에서 그런 경계의 말은 없어지고 원문만 제시되며 그것이 사실인 듯 주장되는 것이다. 차씨 대동보를 조사해 보았으나 위와 같은 구절만 나왔다. 그리고 차씨 족보는 최초의 것이 19세기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보면 언제 누가 어떤 근거로 어떤 내용을 썼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글에서 나온 글일 뿐인 듯하다.

(2) 대승공의 사적 중에는 “동사(東史)”라는 곳에 이런 얘기가 있다고 나온다. 곧, 공이 삼한 시에 유주 땅에서 큰 부호로 살고 있었다. 신라말기에 견훤이 적도(敵徒: 적의 무리)를 모집하여 ... 후백제라고 자칭하며 남방백성을 잔학하므로 고려 태조가 정벌하려 할 때 군량이 넉넉히 공급되지 못함을 근심했다. 장수들은 모두 “남방은 옥토라서 민가에 곡식이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대승공은 ‘백성을 약탈하면서 어찌 포악한 자를 베어버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집에 쌓아놓은 곡식이 있으니 청컨대 그것으로 군사들에게 제공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천 대의 수레의 양식을 마련하고 수송하여 넉넉히 군대가 승리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논공행상을 하는 날 그 힘써 수송하였다는 뜻을 취하여 이름을 내리고 작위(爵位)를 내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사”(東史)가 “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 安鼎福, 1778년) 같은 책 제목의 약자인지 아니면 그대로 “동사”(東史, 이종휘 李鍾徽, 1803년)를 말하는 것인지 확인되지 않지만, 저 이름이 들어간 책들을 대략 조사해 보니, 필경 18세기 이후의 책이라 짐작된다.

(3) 족보에는 대승공의 배(配: 아내)가 신라왕 김알지의 후손인 김균(金[묶을 균]: 우연히 조선 초의 문신인 김균과 한자가 동일함)의 딸이라 나오는데, 그 출처를 알 수 없다.

(4) 흥미로운 것은 파평윤씨와의 관련이다. 원파보에는 파평윤씨의 시조인 윤신달(尹莘達)이 나오며, 대승공과 매제(妹弟) 혹은 매형(妹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둘이 우연히 이름이 達자로 끝난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파평윤씨 족보를 보라고 나오는 족보가 있다. 그런데 파평윤씨의 족보에는 한 술 더 떠서 왕건의 부인, 신숭겸의 부인, 그리고 윤신달의 부인이 모두 류차달의 누이들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실이 자신들 일가와 문화류씨 가정보에게서 나왔다고 쓰여 있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가정보에는 전혀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문화류씨 족보의 원파보에서 다시 그 주장을 받아서 기록해 놓고는 그 사실이 파평윤씨 족보에 나와 있다고 써 놓고 있다. 실상 족보에서는 지금까지 이런 식의 부조리한 일이 자주 일어나왔다고 생각된다.

(5) 족보 중에는 대승공의 사주팔자를 적어놓은 것이 간혹 보인다. 이에 따르면 대승공은 880년 출생이라 한다. 이것은 문화류씨 지후사공(祗候使公)파보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주팔자까지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되고, 출생년도에 대한 논의는 뒤에 하였다.


III. 원파록 검토와 황제 연원설 비판

1. 원파록 내용 종합

현재의 원파록은 1812년에 일어났다는 차헌기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어 갑자보(1864년, 류승기柳昇基 편찬) 때 혹은 그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 짐작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의 원파보는 크게 다음의 세 부분의 자료를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은 그냥 자손이라고 나오는 부분이고 이름들은 주어져 있지 않는데 원파록에서만 이렇고 원파보에는 이름들이 일부 혹은 모두 주어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 }은 필자의 코멘트이다.

(A) 류용수의 계보: 황제-...-왕조명-...-왕수긍-...-왕몽(=차무일; 셋째 아들 왕식의 한참 아래 후손이 왕건; 7째 아들이 차씨로 이어짐)-...-차승색(=류색)-...-류차달-류효전(=차효전)/류효금

(B) 이예장의 계보: 차제능-...-차승색(=류백)-차공숙(=류숙)-...-류차달-류효전(=차효전)/류씨 {*류효금의 이름은 나오지 않음.}

(C) 왕배조의 강남보: 왕조명 이하의 계보가 자세히 나옴; 왕조명-...-차승색(=류씨)-차공숙(=류씨; 공숙의 아우 차공도는 중국 강남으로 망명, 옛날 성인 왕씨를 회복함.)

여기에 잠깐 차식의 신도비명(류몽인 지음)이 언급된다. 이것와 관련하여 원파보에는 유루에 관한 언급만 들어 있지만 참고로 신도비명에 나온 계보는 다음과 같다.
(D) 류몽인의 계보: ...-유루-...-차제능-[15명의 이름]-차승색(=류환)-차공숙(=류숙)-...-류효전(=차효전) {*왕조명 대신 유루가 나옴. 대승공 뿐만 아니라 류효금은 전혀 나오지 않음.}

그리고 권문해가 잠깐 언급된다. 그의 “대동운부군옥”에도 계보에 관한 사항이 들어 있는데 원파록에는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뒤의 참고로 여기 적는다.
(E) 권문해의 계보: 왕수긍-...-왕몽(=차몽일; 왕수긍의 13세손)-...-차승색(=류색)-차공숙(=류숙)-...-류차달의 아들 류효금*에 이르러 차성 회복.

2. 기사보(류처후)의 토론

현재의 원파록에는 류처후의 글이 그대로 들어 있다. 우선 류처후의 토론을 살펴본다.

    - 차제능 이하 21대의 계보: 서희, 정지상, 김방경 세 사람의 야사(野史)에 나타났고, 설원기 중 이예장의 시주(詩註)에 기록되어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음.
    - 차보전(차제능의 아버지) 이상 차무일까지의 16세의 계보는 이름의 글자들이 다른 것이 많고, 그 기록의 출처를 알 수 없음.
    - 차무일 이상 왕수긍에 이르기까지 책마다 대수(代數)가 같지 않음.
    - 한편(류지원의 글 등)에서는 차제능이 왕조명의 후손이라고 나오며, 다른 한편(류몽인이 인용한 정지상의 야사)에서는 유루의 후손으로 나온다. 이 두 설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다.
    - 비록 류씨의 본원(本源)이 가장 오래되었으나 우리나라에는 문헌이 적어 착오가 없을 수 없음. 고려 이전의 실록은 중국으로 들어갔고, 류-차 족보를 4얼이 불태운 일도 있고 해서, 비록 김사형과 김균이 겨우 일부 기록을 남겼으나,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음.
    - 그래도 기록이 없어지지 않고 여러 책에 나와 있음.
    - 그런데 류희잠이 펴낸 가정보(1562년)에는 전혀 문화류씨 선계가 나타나 있지 않는데, 그것은 아마도 류희잠이 강남보를 보지 못한 때문일 것임. 만일 너무 옛날 일이라서 기록하지 못했다면 잘못이다. 아무리 먼 옛날 일이라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임.
    - 따라서 "믿는 것은 믿는 대로, 의심나는 것은 의심나는 대로 전하기 위해" 여기 기록함.

3. 현재의 원파록 기자의 추가 토론

무엇보다도 왕배조가 갖고 있던 강남왕씨의 계보 곧 강남보를 신뢰하고 있다. 강남보에 대한 기자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 차씨, 류씨, 강남왕씨 모두 대승공 류색(柳穡)의 후손이고 같은 근원에서 나옴.
    - 차씨들의 족보 편찬을 계기로 계보(1812년의 강남보를 의미)를 찾게 되어 천우신조임.
    - 계보의 기록들을 대조하니, 대보(大譜: 기사보에 있는 계보를 의미)에서는 왕수긍에서 왕염(王廉)까지 47세라 하고, 강남보에서는 29세라 함. ⇒ 왕수긍이 기자 때 사람인 사실 등을 감안하면 900여년전이므로 29세로 나온 강남왕씨의 계보가 타당함. 또한 강남보에서는 왕조명에서 이어져 내려온 자손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음.
    - 류몽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차식의 비명(碑銘)을 지을 때 “서경야사”의 내용을 들어 “차제능은 유루의 후손이라” 하였는데, 이대로라면 차씨와 류씨가 유루의 후손으로 될 것이다. 강남보를 보니 그런 주장이 큰 잘못임을 알 수 있었다. (기사보에서는 차제능이 왕조명의 후손인지 유루의 후손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강남보에 입각해서 유루의 후손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있다.)
    - 다시 한번 왕배조와 승려 도연에 의해 강남보가 전해진 것은 천우신조임을 강조.
    - 왕배조의 시를 소개함.

결국 현재의 원파록의 기자는 여러 책과 문헌들, 곧 서희, 정지상 및 김방경의 야사(野史), 김사형과 김균의 계보, 차원부설원기, 류지원이 전한 계보, 차헌기가 전한 강남보 등을 들어 황제 연원설을 믿고 있고, 특히 강남보에 의해 모든 계보가 공백 없이 완전히 밝혀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강남보는 위조되었음이 논증되어 있다.

4. 지금까지 나온 계보들에 대한 종합 검토

위에 정리한 계보들은 차승색이 류씨로 변하고 그 후손에서 다시 차씨가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는 측면에서는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에 들어가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 이미 언급되었듯이 차제능의 선조, 곧 중국에서 동쪽으로 온 사람이 유루라고 하기도 하고 왕조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기사보 기자(이하 ‘A 기자’)는 알 수 없다고 하고, 현재의 원파록 기자(이하 ‘B 기자’)는 유루라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는 형국이다. 후자의 경우 B 기자는 ‘류몽인이 어떤 자인지 알 수 없거니와’, ‘4얼의 족보 불사른 일이 거짓인지 참인지 분별할 수 없고’ 등의 표현을 쓰고 있어 ‘차제능이 유루의 후손’이라고 쓴 것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유루이건 왕조명이건 그 주장의 근거는 모두 미약하거나 없다.
    유루로 보는 경우와 왕조명으로 보는 경우는 천양지차이다. 예를 들어 劉씨들이 유루를 그 계보의 설명에 넣고 있다. 유루로 볼 때에는 왕씨와의 관련을 상정할 수 없다. 문제는 류몽인의 글에서 ‘차제능이 유루의 후손’이라고 하는 말을 그냥 써 놓은 것이 아니라 정지상의 “서경야사”에 그렇게 나온다고 명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 류용수의 계보는 차승색 이상은 몇 사람의 이름만 주어져 기록되어 있었고 왕배조의 강남보에서는 모든 선조들의 이름이 일일이 나열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B 기자에 의하면 류용수의 계보에서는 왕수긍에서 왕렴까지가 47세로 나오며 강남보에서는 29세로 나왔다 한다. B 기자는 연대 추정을 통해 후자가 맞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계보들에 상이점이 있을 때는 그곳에 함께 기록된 내용들도 의심하여 진실 여부에 대한 검토를 해야 하는데 그런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원파보 이외의 자료인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에 나온 계보에서는 왕몽이 왕수긍의 13세손이라고 하고 있다. 강남보에 따르면 왕몽은 왕렴의 고손자인데, 류용수의 계보는 물론이고 강남보와도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 왕건에 대한 묘사는 류용수의 계보에서는 왕몽의 3자 왕식(王式)의 먼 후손(약 40세손)으로 나오며, 현재의 원파록(아마도 강남보 자체)에서는 차승색의 아들 차공도가 중국으로 피신하여 왕씨 성을 복구하여 왕공도가 되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현재의 원파보 자체가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왕공도의 증손이 왕건이라는 주장이 더해지기도 한다. 이 경우는, 왕공도가 왕몽의 7자 왕림(王琳=차신을)의 후손으로 나와서 서로 다른 두 갈래의 왕건의 유래가 충돌한다(왕식의 자손 對 왕림의 자손).
    어떤 설이건 왕건의 조상은 누구라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고려사만 한번 들춰봐도 문제점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고려사는 설원기의 그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는 최항이나 신숙주, 이석형 등도 수사관(修史官=사관,史官)에 포함되어 있으며 서문을 썼다는 신석조도 포함되어 있는 그런 책이다. 고려사에는 그 처음에 "고려세계(高麗世系)"라 하여 왕건의 선계(先系)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다. 고려사가 고려말의 사건 특히 왕통에 관해 왜곡했다는 심증이 크지만 왕건의 조상에 대해서는, 그 기록을 보면 용왕이나 용녀(龍女)가 나오는 신비스런 얘기들도 그대로 소개하고 있고 나름대로 이성적인 논리를 세워 추정하고 있는 등, 특별히 왜곡하고 있다고 볼 이유는 없다. 그런데 고려사의 왕건 선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분명히 여기 원파록의 내용과는 전혀 합치되지 않는다. 이것은 원파록의 신빙성을 상당히 떨어뜨린다.
    구체적으로, 고려사에 이제현의 글이 인용되어 있는데, “다른 얘기에는 왕건의 증조부가 어떤 중국귀인(황족을 암시)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아마 귀인 자신이 아니라 그 아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국귀인이라는 것은 어떤 중국의 황제 혹은 황족을 암시하는데 그런 사람은 중국을 떠날 수 없었기에 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이제현은 왕씨가 왕건이 시작한 것이라는 설(기장 설화)을 반박하고 있다. 어쩌면 중국귀인의 성씨가 왕씨라는 의미 같은데, 실상 당시의 당나라 황족이라면 李씨였을 것이기에 맞지 않는다. 만일 설화에서처럼 왕건이 왕씨를 시작한 것이라면 공도와의 연결은 말조차 꺼낼 수 없게 된다.
    한편으로는 원래 ‘건’이 존경어인데 (이제건, 작제건 등의 건은 모두...) 이름으로 삼은 것이라고 말한다. 실상 왕건의 조상 伊帝建, 作帝建, 龍建(融) 등의 이름은 후대 사람들이 붙인 듯한 작위적인 냄새가 나지만, 어쨌건 그게 진짜 이름이었다면 성씨를 쓰지 않은 것이 되어 당시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역시 왕건이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고려사를 편찬한 사관들은 자세한 문헌의 고찰을 한 다음 왕건의 증조부가 누구인지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 사람이 누구이건 그저 ‘원덕대왕’이라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다.
    조선 초에 고려사를 편찬한 사람들이 고려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왕건의 선계에 대해 조선 초에 그냥 쓴 것이 아니라 고려 초기에 쓰인 글들까지 모두 자세히 검토한 것이 나타나 있다. 그것을 19세기(1812년)에 나타난 글인 강남보가 대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 타당한 결론이라 생각된다. 물론 고려사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어서 무언가 일이 일어난 것은 확실하다. 그 틈을 비집고 강남보 같은 계보가 나타났는데, 고려사에서도 그냥 모르겠다고 한 것이 아니고 자세한 검토 후에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어 단순한 이름들의 나열과 한두 가지 모호한 이야기를 넘어선 확실한 다른 증거가 있지 않는 한, 그 계보가 사실일 확률보다 조작되었을 확률은 아주 크다. (실제 강남보가 위조되었음을 주장하는 글이 존재하는데 아래에 자세한 내용을 다루었다.)
    - 차승색 부자의 이름(한자)이 경우마다 다르게 주어져 있다. 차승색의 경우 류백, 류색, 류환으로 나오며, 차공숙의 경우 류숙의 한자가 淑, 叔으로 나온다.

5. 원파록 비판

(1) 총론

현재의 문화류씨 원파록은 황제 연원설에 입각한 것이다. 역사란 실제 일어난 일을 의미하기에 그 증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경우 고고학적 증거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문의 역사에 있어서는 그런 것이 있기 어렵고, 혹 있다면 비석의 글, 곧 금석문이 있을 수 있으며, 여기에 관련 사실이 적혀 있는 내부 및 외부 문헌들이 전부일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그러한 글 및 문헌들의 신뢰성이며, 또한 그것들이 얼마나 외적인 역사적 사실들과 부합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원파록의 비판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앞에 제시한 문헌들의 검토를 포함한 보다 포괄적인 논의는 뒤에 진행한다.

원파록의 성립 자체가 혼란스러운 것은 앞에서 이미 보였다. 그런데 그들을 종합하여 하나로 만들어 놓은 현재의 원파록의 사실들 자체도 많은 모순을 갖고 있다. 곧 원파록의 기사들은 거의 대부분 역사와 부합되지 않는 사항이나 증명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사항들이다.

예를 들어 여러 선계에 대한 기록의 배경 중 하나를 이루는 기자의 동래설(東來說)은 그 역사적 존재가 현재 학계에서 대개 부정되고 있다. 왕수긍의 존재나 사적 역시 의심받고 있다(민족문화대사전). 또한 차식의 신도비명이나 설원기의 이예장의 글에서는 신라시대 때 차제능으로부터 차승색까지 18대에 14명이 승상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신라에는 승상과 사공 같은 직책은 아예 없었다. 그리고 승상이 정승 같은 최고의 벼슬을 뜻하는 의미로 쓰인 명칭이라 해도, 차씨가 대대로 그런 극히 높은 직위를 대대로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는 말인데, 실제 역사에는 이런 사실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혹자는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무대라고 주장하는데, 그래도 마찬가지이다.) 또 애장왕과 헌덕왕 때의 차승색의 일 역시 역사에 나오지 않는다. 차승색이 그 ‘승상’이라는 고위직을 했다고 하기에 사건이 있었다면 필경 기록되었을 것인데, 헌덕왕 때의 사건들이 삼국사기에 비교적 소상히 나오며, 두 번의 반란 사건도 기록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원파록에서 왕건에 대한 주장도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어차피 왕씨와 연결되는 계보는 왕씨가 비중이 있기 때문에 후대에 주장되었을 것이다. 우선 유루와 왕조명에 대한 불명확성 때문에 왕씨와의 연결이 아예 부정될 수도 있다. 왕건 관련해서는 이미 앞에서 자세히 다루었지만, 요컨대 후대에 확실한 사료의 발굴이 있기 전에는 그 존재도 의심이 가고 그 내용도 알 수 없는 몇 마디 말들로서는 고려사 집필자들의 고찰과 판단을 바꿀 결론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성적으로 판단해도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다. 성씨의 발생이 고려 건국을 전후해서 급격하게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 명확한 증거가 없이 성씨를 중국의 전설상의 존재인 황제(黃帝)까지 연결시키거나 그 이야기에 용(龍) 같은 것을 등장시키는 계보는 신앙이나 설화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올바른 역사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여러 성씨의 시작 설화에는 이런 요소가 많지만 설화로서 끝나야지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들을 특수하다고 생각한다거나 어떤 역사를 바꾸려 한다면 비이성적인 행태일 것이다.

황제로부터 수 세대, 하후우로부터 약 10 세대, 왕씨로 약 60 세대, 차씨로 약 30 세대를 내려왔다는 계보는 대부분 한 줄로 이어져 있으며, 이야기를 끼워 맞추기 위해서 같은 세대에 두세 사람 정도 열거되어 있는 경우가 간혹 있을 따름이다. 예를 들어 역사적 사실에는 합치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어떤 다른 역사적인 인물의 아들로 나올 때 같은 경우이다. 물론 옛날에는 기록이 포괄적이지 않고 기록하기도 어렵고 기록 자체의 보관도 어려웠고, 현재의 족보의 개념은 나중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계보가 남아 있다면 바로 직계 조상들만 적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감안해서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시대가 떨어지는 두 사람의 이름만 가지고 어느 후손인가가 그들을 자기 조상에 적절히 끼워 넣으며 그 사이의 사람들 이름을 적당히 끼워 넣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그들 둘이 성이 서로 같다는 사실 이외에는, 서로 같은 혈통이라는 증거가 없고, 그들이 자신의 조상이라는 객관적인 증거도 없이 혈통을 창조해 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물론 언급된 많은 이름들 중에 역사적으로 실존이 확인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계보가 조작되었다면 당연히 역사적 사실에 끼워 맞추었을 것이기에 그런 사실 몇 가지 때문에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반대의 입장에서 몇 개가 맞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부정하는 것도 반드시 올바른 태도는 아니다. 가장 합리적인 태도는 그런 주장도 있음을 인정하되, 그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기 전에는 진실이라 믿지는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오래 전의 일들이라 현재 확실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경우엔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상태로 남을 확률이 높다.

(2) 강남보 위조설

류용수의 계보와 왕배조의 강남보는 모두 중국이 그 기원으로 되어 있다. 류용수의 계보를 소개한 류지원의 글에서는 중국 출신의 류용수라는 사람이 전한 내용이, 강남보를 소개한 차헌기 관련 글에서는 명확하진 않지만 중국 강남 출신으로 보이는 왕배조라는 사람이 도연이라는 노승을 통해 전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다. 우선 차헌기의 글의 경우는 전체적으로 객관성이 완전 결여되어 있어 심히 모호하다.

강남보에 대해서는 다름 아닌 연안차씨 족보 하나에 그 거짓을 논증하는 글이 실렸다. 그것은 1987년에 간행된 "연안차씨강렬공파보(剛烈公波譜)"에 수록된 "강남왕계변위록(江南王系辨僞錄)"이라는 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812년, 곡성(谷城: 지명) 차헌기가 일가들을 속여 이익을 챙길 계책(計策)을 교묘하게 꾸며 왕계(王系: 왕씨의 계통) 57세를 위조하고, 선세(先世)에 근거 없는 사적을 억지로 갖다 붙여 덕오(德五: 사람 이름인 듯; 차덕오)의 가승(家乘)에서 나왔다고 함.
    - 또 차헌기는 그 아우 차형기(車衡基)와 류진하(柳震夏), 류형순(柳馨淳)과 함께 도연과 왕배조의 얘기를 꾸며내었음. (내용은 위에 소개됨.)
    - 이런 거짓된 계보인 강남보를 150여권 제작하여 영호남 지방에 판매함.
    - 1830년, 하동(河東: 지명) 차덕륜(車德輪)이 오천(鰲川)서원의 임원으로 영호남을 다니다가 그 위조의 흉계를 알고 "僞系辨破錄“을 지음. 이 안에는 강남보의 증거가 없음을 언급하고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옛사람들은 근거가 없을 때엔 함부로 꾸미지 않았으며, 성씨가 같다고 그 이전의 사람을 조상이라 끌어대지 않았다는 말이 들어 있었음.
    - 1879년, 초계(草溪: 경남 합천의 지역)에서 전에 시종령(侍從令: 벼슬이름)을 했던 차석호(車錫祜)가 장단(長湍: 지명)의 차재철(車在轍)과 서천(舒川)의 차기보(車冀輔)와 함께 그 위조를 자세히 살펴 경상감영에 공소(控訴: 항소)하여, 예조(禮曹)의 공안(公案: 공식 문건)으로 등재됨.
    - 1907년에 수보(修譜: 족보제작)할 때 바로잡았으나 차씨와 류씨들 간에는 와전된 계통을 믿는 사람들이 있어 통탄할 노릇임.
    - 최동주(崔東洲)가 편찬한 "오백년기담"(박문서관, 1913)에 보면 차헌기가 왕배조의 작품이라고 말한 시가 실은 인조 때 유구국(琉球國)의 세자(世子)의 시라 함. 그가 제주도로 표류해왔는데, 제주목사 이기빈(李箕賓)이 가서 신문하니 말이 통하지 않아 시를 한 수 지어 바친 것이 바로 그 시라 함. [유구국은 류우쿠우이며, 일본 남쪽 북위 26도 지역에 있는 오키나와 제도의 섬을 말한다.] 이로써 차헌기 등이 외국인의 시를 몰래 쓴 것임을 알게 되었음.

제주목사 이기빈의 일은 왕조실록에 보면 광해군 때의 일이다. 이기빈은 광해2년(1610) 2월∼광해3년(1611) 9월 동안 제주에 부임해 있었고, 그 일은 1611년 3월경에 일어났다. 표류해온 배에 탄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 재화를 나누어 가졌는데, 유구국 왕자가 안색을 변하지 않고 조용히 해를 당해 모두들 안타깝게 여겼다 한다. 다른 기록에는 스무 대여섯살의 사신이라고도 나오지만 왕자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문사(文辭)가 제법 능숙하고, 이기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글이 매우 비장했다고 되어 있다. 이기빈은 이 일로 귀양을 갔다. 차헌기의 글에 왕배조의 시라고 나오는 것 역시 기개와 비장함이 느껴져서 최동주의 설명과 잘 합치된다. 이상을 보면 이 변위록에서는 강남보를 철저히 위조된 것으로 낙인찍고 있으며, 사족이 필요 없을 듯하다.

(3) “차원부설원기”와 “대동운부군옥” 등의 문헌 관련

원파록의 기자들도 원파록을 신뢰하는 근거로서 문헌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고 생각되며, 문헌은 역사의 파악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설원기 자체도 일견 문헌적 비중이 높아 보이며, 설원기의 주장에서처럼 차제능 이하 신라에서의 차씨들의 계보나 차승색(류색)에서 시작된 류씨와 차씨가 같은 뿌리라는 얘기 등이 서희(942-998), 정지상(?-1135), 김방경(1212-1300)의 고려시대 당시에도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자세히 고찰해 보면 이들 문헌은 거의 설원기에만 근거하고 있고, 설원기는 조작의 요소가 분명하여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모르는 문헌임이 밝혀진다.

류지원의 글의 경우 그 진위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비록 역사적인 인물로서 류덕신과 권문해라는 두 사람뿐이지만, 권문해의 경우는 단순하지 않다. 바로 “대동운부군옥”을 쓴 작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차원부설원기”를 공개한 최초의 글이라 여겨지며, 차원부설원기나 대동운부군옥 모두 문화류씨 계보 관련하여 여러 문헌을 언급하고 있다. 류몽인의 차식의 신도비명도 문헌을 언급하고 있으나 이들과 중복되며, 그 내용 또한 중복된다. 이러한 직접 및 간접 문헌들은 원파록에 객관성을 부여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런데 차원부설원기 자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자세히 논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문화류씨 선계에 관한 부분만을 다루었다. 다만 여기서 “차원부설원기”는 그 책에 나온 1456년에 쓰인 것이 아닌 증거가 책 안의 곳곳에서 발견되어 후대의 첨삭이 가해진 책임이 확실하다는 것만 언급한다. 한편 설원기에 나오는 계보에 대한 소개와 비판은 이미 이 글의 앞에서 이루어졌다.

설원기 본문의 본론이 시작되는 곳에서 차원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개가 주어진다: “사간원 좌정언 차원부는 문성인(文城人) 류차달의 첫째 아들 대광지백 효전의 후예이다.” 여기서 우선 고려시대의 금석문에서까지 밝히고 있는 고려태조 삼한공신 류차달은 이름만 나오고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효전이라는 인물이 모든 정사(正史)에 반해서 대광지백이라는 호칭으로 등장한다. 고려사를 집필했던 인물들도 참여하고 고려사에 누구보다 정통했을 박팽년이 본문을 썼다는 설원기의 기록으로서는 전혀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구절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차효전에게 부여된 호칭인지 관작인지 모호한 대광지백이란 단어는 성립할 수 없는 단어이다. 곧 대광은 벼슬 이름이고 백은 관작제도인데, 그 둘이 혼합되어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인 것이다. 설원기는 또 차효전이 공적을 세워 식읍 1000호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그 공적이 찬란했고 그 벼슬이 실질적이었다는 뜻이 되는데 역시 차원부설원기 전체의 문제점과 동일하게 정사에서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일 따름이다. 더구나 참언 운운하며 그에 관한 기록들이 역사에서 사라졌음을 방어막으로 치고 있는데, 오히려 이것 또한 아무런 증거가 없어 그 진위에 대해 더욱 의심이 가게 만든다.

설원기는 그 자체가 왕명을 받고 박팽년 등의 명망 있는 신하들이 제작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고 (1) 서희, (2) 정지상, (3) 김방경의 책들, 그리고 (4) 김사형과 김균이 정종에게 보고한 계보가 언급되고 있다. 우선 이들은 현존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중 (4)는 김균이 정종이 왕이 되기 조금 전에 죽어 보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과 (2)는 책 이름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도록 언급할 때마다 다르게 그 제목 혹은 호칭이 불리고 있다. 이중 정지상의 책은 류몽인의 글과 대동운부군옥에도 등장한다. 설원기에서는 “서경잡기”와 “서경야사”로, 류몽인의 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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