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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문정공 류경(柳璥 ) 사적


                  문정공류경사적 
             
文正公柳璥事蹟

 고려사(高麗史)에 고종(高宗) 1258무오(戊午)에 최의(崔竩)를 죽이고 정사(政事)를 왕실에 회복하니 위사공신(衛社功臣)의 호(號)를 하사하고 벽상에 초상(肖像)을 그려 걸었다.

1259기미(己未)에 고종(高宗)이 공의 집에 와 계시다가 얼마안 되어 승하하시었다.

원종(元宗) 원년 1260경신(庚申)에 추밀원사(樞密院事)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위문경(魏文卿) 등을 선발하고, 삼년에 지공거(知貢擧)로서 조득주(趙得珠) 등을 선발하고, 9년에 지문하시랑(知門下侍郞) 지공거로서 진사 윤승관(尹承琯) 등을 선발하고, 4년 계해(癸亥)에 글을 올려 이부시랑 김구(金坵) 를 천거하고, 12년 신미(辛未)에 평장사(平章事)로서 애도(哀島)로 귀양 가시었다.

충렬왕(忠烈王) 128915년 기축(己丑) 12월 초이일 밤에 우뢰가 크게 치고 빗물이 흑수(黑水) 같더니 공이 돌아가셨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고종(高宗)께서 유주(儒州)를 위사공신(衛社功臣) 류(柳) 경(璥)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현(文化縣)으로 승격시키어 현령(縣令)을 두었다.

사관전(史官傳)에 이르기를 류경(柳璥)이 오래 정방(政房)에 있으면서 유천우(俞千遇)로 더불어 최항(崔沆)과 친하더니 몽고(蒙古)의 군사가 침입함을 당하여 항이 삼척산성(三陟山城)으로 옮기고자 하거늘 군민들이 싫어하여 경에게 은병(銀瓶) 삼십량을 주고 옮기지 말 것을 요청하였으나 경이 거절하고 받지 않으므로 이에 천우에게 주니 천우가 받고 최항에게 말하여 옮기지 않게 되었다. 경이 항에게 이르기를 삼척(三陟)으로 옮기는 것은 실로 이해가 관계되므로 군인(郡人)이 옮김을 싫어하여 일직이 나에게 은폐(銀幣)를 주거늘 내가 감히 받지 않았는데 지금 옮기지 아니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항이 천우가 나를 팔았다 하고 뇌물 받은 죄를 조사하여 해도(海島)로 유배시키니 이 연유로 천우와 틈이 생겼다. 항의 아들 의가 여러 대를 권세를 잡고 횡포하더니, 때에 또 흉년이 계속 들어 굶어 죽는자가 많이 생겼으나 의가 창고를 풀어 백성을 구제하지 않으므로 이로 인하여 크게 인심을 잃은지라. 경이 드디어 김준 등과 더불어 최의를 죽이고자 모의하였다.
어느 날 준(俊)등이 경에게 가서 의논하니 경이 감히 드러내어 말을 못하고 집사람을 시켜 행자(杏子) 한 그릇을 내오니 준이 절하며 이르되 이미 알았다 하니 대개 행자(杏字)의 음(音)이 행자(幸字)와 같은 때문이다. 이날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왕실에 회복시키니 왕이 경에게 이르되 「그대들이 과인(寡人)을 위하여 비상한 공을 세웠다」 하고 몰래 눈물을 흘리고 즉시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을 임명하더니 얼마 안 되어 지주사(知奏事)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으로 승진하였다. 경이 근래에 지주사가 된 이는 거의 다 권세있는 신하이며, 또 총록(寵祿)이 많음을 두려워하여 힘써 사양하고 오직 상장군(上將軍)으로서 우부승선(右副承宣)에 재임 중 추성위사공신(推誠衛社功臣)의 호(號)를 하사(下賜) 받았다. 경이 이미 최의를 죽이고 왕께 아뢰어 정방을 편전(便殿) 옆에 두어 전주(銓注 =관리선발를 장악하여 무릇 국가의 중요한 정무를 다 재결(裁決)하는 관청)하게 하였다.

김준(金俊)의 아우 승준(承俊)이 자기의 공이 높은데 품계가 낮다고 마음속으로 항상 불만을 품거늘 경이 듣고 승준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공으로 하루에 아홉번 승진하여도 옳으나 그러나 국가에서 계제(階第)를 좇아 제수(除授)하는 상전(常典)이 있거늘 그대가 대정(隊正)으로서 네 등급을 넘어 중랑장(中郞將)에 제수되었으니 가히 초천(超遷)이라 이르지 않을 수 없다.」하니 승준이 더욱 감정을 품었다. 김준이 매양 입궐할 때면 반드시 경을 직려(直廬)에서 배알(拜謁)하되 승준은 홀로 그렇지 않거늘 경이 김준(金俊)으로 더불어 희롱하여 말하되 「승준랑장(承俊郞將)이 어떤 모양으로 있는가」 하였다.

경(璥)이 좋은 집을 많이 장만하고 권세가 날로 성하여 문 앞이 불장(巿場) 같았다. 승준과 임연(林衍)등 여러 공신들이 시기하여 김준에게 참소하고 왕에게 슬며시 헐뜯으니, 왕이 그 권세를 빼앗고자 경의 승선의 직을 파면하고 첨서추밀원사(僉書樞密院事)를 제수하는 한편 경과 친근한 장군 우득규(禹得圭) 양화(梁和)와 지유(指諭) 김득룡(金得龍)과 낭장(郞將) 경원록(慶元祿)을 옥에 가두니 경이 김준에게 일러 말하되 「경이 비로소 공으로 더불어 동심(同心) 거의(擧義)하여 정권을 왕실에 회복하여 친함이 골육과 같으니 참소를 잘하는 자라도 능히 이간하지 못 할 터 인데 어찌 오늘날 배반함이 이 같을 줄 알았겠는가?」 하니 김준이 부끄러이 여겨 사과하고, 승준과 임연 등은 말을 하지 않고 물러가서 드디어 우득규(得圭)와 양화(和) 김득룡(得龍)을 죽이고 경원록(元祿)을 원도(遠島)에 유배하였다.

1262년 원종(元宗) 삼년에 하명하여 도형(圖形)을 벽상(壁上)에 걸게 하고 명년(明年)에 태부(太傅) 참지정사(叅知政事)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제수하였더니 바로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同中書)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승진하고 동시에 임연과 김준도 위사공신(衛社功臣) 호(號)를 받았다.

경이 대사성 김구, 예부시랑(禮部侍郞) 주열(朱悅),장군(將軍) 김정(金珽)으로 더불어 본래 친밀하여 자주 왕래하더니, 하루는 경이 구에게 일러 말하되 「전일에 내가 처복을 입어 오래 국사를 보지 못하고 사직을 보위함이 있다는 말만 들었더니, 이제 보니 그 사람들이 모두 소인(小人)이로다」 하고 또 고사(古史)를 의논 중에 당시 환시(宦寺)의 폐단을 언급(言及)하므로 환관(宦官) 김경(金鏡)이 듣고 감정을 품고 왕에게 호소하니 왕이 이르되 「이 사람이 저번에 최의를 죽이고 권세를 잡으려다가 준등의 배척한 바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어제 곡연(曲宴)에도 재상들이 다 즐거워하되 홀로 경이 기뻐하지 않기로 내가 친히 잔을 권하되 마침내 즐거워하지 않으니 이로써 그 이심(二心)을 품은 줄 알았다」하고, 구)를 불러 심히 꾸짖으며 이르되 「네가 류경과 사귀어 경서와 사기)를 빙자하며 국사)를 의논하기를 좋아하니 사전(史傳)에 실린 것을 어찌 다 신빙할 것이냐 내가 죄를 주고자하나 너는 사명(辭命)을 맡았기로 특별히 용서하니 삼가서 다시 그러지 말라」하고 경을 흑산도에 유배하는 한편 그 집을 몰수하고 경의 아들 행수 승(陞)과 김정(金珽)과 주열(朱悅)을 모두 해도에 유배시켰다.

경이 본래 부자여서 일찌기 집을 이사하는데 재물을 운반하는 차마(車馬)가 십일을 연이었다. 최의를 죽이고 자못 권세가 있어서 부유하기가 전보다 갑절이 되어 그 때에 삼한거부(三韓巨富)라 일컫더니 가산(家産)을 몰수할 때에 이르러 진보(珍寶)와 기완(器玩)과 곡백(糓帛)이 가히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경이 구속되어 알몸(赤身)이었으나 한 물건도 주지 않으니 가인(家人)이 붉은 비단 보자기에 옷만 받고 보자기는 돌려주며 이르되 「여자(女子)로서 의식(衣食)을 지탱할 수 없을 터이니 이것을 팔아 생활(生活)하라」 하였다.

승(陞)이 먼저 떠나 김강원(金剛院)에 이르러 기다리고 있는데 경이 이르러 이별할 적에 손을 잡고 울며 말하되 「부자(父子)의 은혜가 다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다시 서로 볼 것이라.」 하고 떠나거늘, 사람들이 「경의 낭패는 부(富)가 부른 것이라」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임연이 경)을 석방하여 돌아올 적에 서울에 당도하지 못하여 다시 다른 섬으로 유배되었다.

삼별초(三別抄)의 난리에 경이 강화에 있다가 가족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개경으로 돌아오던 중 적도)에게 사로잡혔다. 이에 경이 처자는 작은 배에 태우고 재물과 보물은 큰 배에 싣고 적도(賊徒)로 더불어 함께 있다가 상당히 오랜 후에 경이 거짓 구토를 하고 열병(熱病)에 걸린 체하며 서늘한 작은 배로 옮기기를 청하니 적(賊)들이 허락하는지라. 경이 닻줄을 끊고 도망하니 적(賊)들이 쫓아오다가 미치지 못하였다.

왕(王)이 경이 도적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모주(謀主)가 될까 두려워하던 차, 경이 도보로 와서 왕을 보이니 왕이 크게 기뻐하고 두터이 칭찬하며 다시 평장사(平章事)를 제수(除授)하였다.

이에 앞서 경이 평장사(平章事)로서 파면되고 원부(元傅)가 이어 찬성(贊成)을 거쳐 판군부(判軍簿), 수국사(修國史)가 되었다. 이에 이르러 경이 판판도(判版圖)로서 상위(相位)를 회복하여 부(傅)의 밑에 있는지라, 부(傅)가 이르되 「나는 류공(柳公)에게 문생(門生)과 갈은데 어찌 감히 상위(上位)에 있으리오.」 하니, 경이 이르되 판군부(判軍簿)는 이재(二宰)요, 판판도(判版圖)는 삼재(三宰)로서 그 내력이 오래 되었다.」 하며 서로 사양하기를 오래하였다. 왕이 이 일을 허공(許珙)에게 물으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경의 말은 옛 제도요, 부(傅)의 말은 사은(私恩)이니 후진(後進)이 선진(先進)에게 사양함은 예(禮)입니다. 만약 경에게 감수국사(監修國史)를 더하여 부(傅)의 상위(上位)에 있게 함은 또한 사람들의 바람입니다」 하니, 왕(王)이 허락하였다.

충렬왕(忠烈王) 이년(二年) 1276년 12월 밤에 어떤 사람이 익명으로 투서하여 정화궁주(貞和宮主)가 공주)를 저주했다고 무고하고 또 제안공(齊安公) 숙(淑)과 김방경(金方慶) 등 四十三인이 역모했다 하니, 마침내 정화궁주(貞和宮主)와 숙(淑)과 방경(方慶) 등을 하옥하거늘 경이 울며 역간(力諫)하니 공주(公主)가 감동하여 깨닫고 다 석방하였다.

사년 무인(戊寅)1278에 왕이 원나라에 가 있을 때 공주가 재상을 불러 택일하여 궁실을 지으려 하거늘, 오윤부(伍允孚)가 말하되 「금년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임금님에게 불리하니 신은 감히 택일을 못 하겠나이다.」하였다. 공주가 노하여 파직시키고 볼기를 치려하거늘, 경이 말하되 「신이 조성도감(造成都監)을 맡은바 일을 어찌 속성하여 공주의 뜻을 순종하지 않으리오. 마는 이제 일관(日官)의 말이 차라리 두골(頭骨)을 쪼갤지언정 감히 택일을 못 하겠다 하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성심)으로 임금을 사랑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대죄하오니 재상으로서 임금께 불리한 말을 듣고 차마 하겠습니까? 청컨대 재목과 기와를 미리 준비하였다가 전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려 시작하는 것도 늦지 않으리라」 하니 공주가 묵연(黙然)이 중지)하였다.

이해에 글을 올려 퇴직(退職)을 원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중찬(僉議中贊)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장군(上將軍)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이로부터 무릇 내연(內宴)이 있으면 왕(王)이 반드시 명(命)하여 불렀다.

팔년 임오(壬午1282) 에 승려 홍원(洪垣)이 사감으로써 경과 상장군 한희유(韓希愈)와 장군 양공적(梁公勣)과 임비(林庇) 등이 다른 음모가 있다고 무고하였다. 마침내 순마소(巡馬所)에 가두어 국문하였는데 경은 노병(老病)으로 체포하지 않고 해도(海島)에 유배(流配)하였다. 동왕(同王) 십오년(十五年) 기축(己丑1289)에 졸)하니 향년(享年) 칠십구(七十九)세로 문정공(文正公)으로 시호(諡號)가 내리었다.

공은 체모(軆貌)가 비단(肥短)하여 사람들이 바라봄에 엄연(儼然)하였으며, 천품이 명민(明敏)하고 도량이 크고 깊어 능히 큰일을 결단하였으며, 사람을 접대함(接人)을 잘하고 언소(言笑)에 관흡(款洽)하였으며 조감(藻鑑)이 있어 원부(元傅)와 허공(許珙)은 다 그의 천거(薦擧)이었다.

일찌기 사관(史舘)을 영도(領導)하여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高宗), 사조실록(四朝實錄)을 찬수(撰修)하고 한번 국자감시을 관장하고, 세 번 예위(禮闈)(대과회시(大科會試))를 맡아보았으며, 문장(文章)을 의논함에 체제(軆制)를 먼저 보고 공졸(工拙)을 뒤에 보니 얻은 사람이 다 이름 있는 선비들로서 이존비(李尊庇) 안향(安珦)·안전(安戩)·이혼(李混)은 다 공의 문생이었다. 유천우와 같이 시관을 맡아 보았는데 천우(千遇)가 스스로 정문(程文) 쓰는 것을 좋아하여 조금만 하자가 있어도 반드시 빈척(擯斥)하였으나, 공은 더불어 비교하지 않더니 방(榜)이 나감에 미처 다 장옥(場屋)에서 늙은 사람들로서 그러나 높은 벼슬에 이른 사람은 적었다.

공이 처음 시관이 되었을 때 좌주(座主)인 평장사 임경숙(任景肅)이 띄고 있던 오서홍정(烏犀紅鞓)을 풀어주며 이르되 「공의 문하에 공과 같은 이가 있으면 가히 전하시오」 하였다. 이존비(李尊庇)가 시관을 맡기에 이르러 전하고자 하였는데 이미 임연의 난리에 잃어버리었다. 시장(巿場)에 가서 구입하니 곧 그 띠인지라, 사림들이 기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文正公_{柳璥}_事蹟

按麗史高宗戊午誅崔竩復政王室賜衛社功臣號圖形壁上己未高宗移御于公之第未久薨元宗元年以樞密院事同知貢擧取魏文卿等及第三年以知貢擧取趙得珠等九年知門下侍郞知貢擧取進士尹承琯等及第四年癸亥上書薦吏部侍郞金坵十二年辛未以前平章事謫哀島忠烈王十五年己丑十一月初二日夜大雷雨雨如黑水是日公卒○輿地勝覽高宗於儒州以衛社功臣柳璥之鄕陞文化縣爲縣令○史官傳曰柳璥久在政房與俞千遇俱爲崔沆所厚蒙兵之侵沆欲徙三陟山城郡人不欲遺璥銀瓶三十請勿徙璥却不受乃遺千遇千遇受之言於沆得不徙璥謂沆曰三陟之徙實關利害郡人安土重遷嘗饋我銀幣我不敢受今而不徙何也沆以千遇賣己追所賂流海島以故千遇與璥有隙沆子竩累世用事擅威福時又連歲凶荒餓莩相枕竩不發倉賑貸由是大失人心璥遂與金俊等謀誅竩一日俊等詣璥議璥不敢顯言令家人進杏子一椀俊等拜曰已喩盖杏與幸聲相近也是日誅崔竩復政王室王謂璥曰卿等爲寡人立非常之功澘然涙下卽拜樞密院右副承宣俄遷知奏事左右衛上將軍璥以近來爲知奏事者率皆權臣又恐寵祿盛滿力辭惟以上將軍仍右副承宣賜推誠衛社功臣號璥旣誅竩奏置政房于便殿側掌銓注凡國家機務皆決焉俊弟承俊自以爲功高秩卑心常怏怏璥聞之謂承俊曰以公之功雖一日九遷可也然循資除授國家常典公以隊正越四等授中郞將不可謂不超遷也承俊益啣之俊每入闕必謁璥直廬承俊獨不爾璥與俊戱云承俊郞將何樣在璥多置甲第權勢日熾門庭如巿承俊林衍等諸功臣忌之讒于俊諷王王欲奪其權罷璥承宣除僉書樞密院事囚璥所善將軍禹得圭梁和指諭金得龍郞將慶元祿璥謂俊曰璥始與公同心擧義復政王室親如骨肉善讒者不能間豈圖今日反如是耶俊愧謝承俊林衍等不言而退遂殺得圭和得龍流元祿于遠島元宗三年命圖形壁上明年守太傅叅知政事太子太保進拜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時衍誅俊號衛社璥與大司成金坵禮部侍郞朱悅將軍金珽素友善數相過一日璥謂坵等曰頃我以妻服久不視事聞有衛社者今見其人皆群小也又論古史言及當世宦寺之弊宦官金鏡聞而啣之訴于王王曰此人向誅崔竩欲執權柄爲俊等所排志不之遂昨日曲宴宰相皆樂獨璥不悅我親酌以勸竟不樂以是知其有二心召坵切責曰汝結交柳璥憑經史好論國事史傳所載豈可盡信予欲罪之第以汝掌辭命特宥之愼勿復爾流璥于黑山島籍其家璥子行首陞及珽悅並流海島璥素富嘗徙宅輸財車馬連亘旬日而止及誅竩頗有權勢富倍於前時稱三韓巨富至籍家産珍寶器玩糓帛不可勝計璥被執赤身不䝴一物家人以紅羅襆裹一衣追與之璥取衣還襆曰女子無所衣食可鬻此以生陞先行至金剛院遲之璥至臨分携手泣曰父子之恩未盡當復相見人稱璥之敗富所招也未幾衍釋璥還未至京復流他島三別抄之亂璥在江華挈家舟還古京沒于賊璥載妻子于小舸財帛于大船與賊共處久之璥佯嘔若中熱請就凉小舸賊許之璥斷纜而去賊追不及王聞璥陷賊恐以爲謀主璥徒歩謁王王大喜厚獎復拜平章事先時璥以平章罷元傅繼爲贊成而判軍簿修國史至是璥以判版圖復相位在傅下傅曰吾於柳猶門生安敢居上璥曰判軍簿爲二宰判版圖爲三宰其來尙矣相讓久之王以問許珙對曰璥之言舊制傅之言私恩也後進讓先進禮也若加璥監修國史躋於傅上亦人望也從之忠烈王二年十二月夜有人投匿名書誣告貞和宮主詛呪公主又齊安公淑金方慶等四十三人謀不軌於是囚貞和宮主及淑方慶等璥涕泣力諫公主感悟皆釋之四年王在元公主召宰相令卜日作宮室伍允孚曰今年興土功不利人主臣不敢卜公主怒將奪官笞之璥曰臣領造成都監事豈不欲速成以順聖意今日官云寧斫頭不敢卜日此無他愛君以誠不顧其身耳臣待罪宰相聞不利於上忍爲之耶請備材瓦待大駕還作之未晚公主黙然而止是年上章乞退以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致仕自是凡有內宴王必命召八年僧洪坦以私憾吿璥及上將軍韓希愈將軍梁公勣林庇等有異謀下巡馬所鞫之璥以老病不逮流海島十五年卒年七十九諡文正公體貌肥短人望之儼然天資明敏器度雄深能斷大事善接人言笑欵洽有藻鑑元傅許珙皆其薦也嘗領史館撰神熙康高四朝實錄一掌國子監試三典禮圍論文章先體制而後工拙所得皆知名士李尊庇安珦安戩李混皆公門生與俞千遇同掌試千遇喜自用程文有微疵必欲擯之公不與較及榜出皆老於場屋者然少至達官公初掌試座主平章事任景肅解所帶烏犀紅鞓與之曰公之門下有如公者可傳之及尊庇掌試欲傳之則已失於林衍之亂買之巿卽其帶也士林傳爲異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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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2011.12.6] (역문 정리:류영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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