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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문간공 류공권(柳公權) 묘지명

 

 


                           문간공 류공권 묘지명  

 


 

          
  
               [政堂文學叅知政事判尙書禮部事文簡柳公 公權墓誌 ]

 

  공의 휘(諱)는 공권(公權)이요,자(字)는 정평(正平)이요,성(姓)은 류씨(柳氏)니 시녕인(始寧人)이다. 증조(曾祖)는 휘(諱) 노일(盧一)이니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행산원(行散員)이요,조(祖)는 휘(諱) 보춘(寶春)이니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이요, 고(考)는 휘(諱) 총(寵)이니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이요, 비(妣)는 쌍성현대군이씨(雙城縣大君李氏)이다.   공(公)이 어려서부터 독서(讀書)를 좋아하고 타기(他技)를 일삼지 아니하더니 문장(文章)을 저작(著作)함에 명백(明白)하고 순직(純直)한 군자(君子)였다.   1155년 정원(貞元) 삼년(三年) 의종(毅宗) 을해(乙亥)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명년에 태학(太學)에 들어가서 연고(年考)와 월서(月書)에 매양 우등에 오르고 1160년 경진(庚辰)에 이르러 상국김공영부(相國金公永夫) 문하(門下)에 을과(乙科)로 등제(登第)하고 신사(辛巳)에 전례(前例)에 의하여 청주목서기(淸州牧書記)로 나가서 마음을 깨끗이 하고 공직에 봉사하니 관리와 백성이 다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삼년을 지나 내직으로 들어와 익양부록사(翼陽府錄事)가 되어 그 진퇴와 거동이 법도가 있으니 왕이 이로써 공이 충정(忠正)하고 다른 마음이 없이 충성(忠誠)을 다하는 대신의 절조가 있음을 알고 명군과 현신의 만나게됨이 실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1170년 경인(庚寅)에 이르러 금상(今上), 명종(明宗)이 왕위(王位)에 오르사 대용(大用)하고자 생각하시고 곧 공을 명소(命召)하여 내환(內宦)을 시키고 인하여 사문박사겸직사관(四門博士兼直史舘)을 제수하고 드디어 군기대부주부(軍器大府注簿)를 임명(任命)하였다.   을미년(乙未年)에 중문지후(中門祗候)을 배명(拜命)하고 이로부터 해마다 승진하여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상의봉어(尙衣奉御)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공병량부(工兵兩部) 낭중(郞中)을 역임하고 임인년에 국학직강(國學直講)을 겸하니 제생(諸生)이 다 본을 받고 이른바 학행은 가히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라 하였다. 명년(明年)에 장작소감(將作少監) 태자사경(太子司經)에 승진되고 또 태자중윤(太子中尹)에 전임하여 사관수찬관(史舘修撰官)이 되고 또 명년에 군기감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에 승진되었다.   공이 정담(鄭覃)의 옛일을 고찰하여 바름을 지키는 덕이 있었기 때문에 태자가 매양 볼 적에 특별히 예우하였다. 병오년에 북조(北朝)에 사신으로 가서 일을 주선함이 법도에 맞고 예에 어긋남이 없으니 북조(北朝) 사람들이 인하여 공경하였다. 왕이 그 군명(君命)을 욕되지 않게 한 것을 가상(嘉尙)히 여겨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개수(改授)하고 따라서 예빈경(禮賓卿) 추밀원(樞密院) 우부승선(右副承宣)을 제수(除授)하였다. 공이 경인년에 왕의 지우(知遇)를 받은 후로 임금 곁에서 떠나지 않고 높고 화려한 벼슬을 다 지내고 승선(承宣)의 요직에 이르렀으니 왕의 대우가 친근함이 심복 같고 다른 신하보다 월등하였다. 기유년에 남성시(南省試)를 관장하여 얻은 바가 모두 일시의 명사이므로 학자들이 미담으로 삼았다. 명년에 판대부사(判大府事) 우승선(右承宣)을 더하고 또 명년에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을 더하여 태자찬선대부(太子贊善大夫)를 겸하고 임자년에 한림학사 동지공거를 가계(加階)하였다. 이에 앞서 과장에서 선비들이 의례히 몰래 서로 엿보아 급제함으로 현우(賢愚)를 분별하기 어려웠다. 공이 그 사실을 알고 과장을 열때에는 법규를 한결같이 시행하여 과장이 엄숙 공정함으로 합격자가 다 영특하고 준수한지라, 당시 사람들이 현사가 문하(門下)에 있다 말하였다. 명년에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지주사(知奏事) 지리부사(知吏部事)에 전임되었다.   공이 납언(納言)이 되어 칠년 동안에 고문을 대)함에 안으로 숨기는 것이 없고 헌체(獻替)를 당해서는 움직임에 곧은 기운이 있어 조정의 기강과 국가의 체통에 도움이 많이 있었으니, 비록 중산보(仲山甫)가 왕명을 출납할지라도 더할 수 없었다. 갑인년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태자빈객(太子賓客)을 겸임하더니 다음해에 이르러 홀연히 풍질(風疾)에 걸려 요양(療養)하여도 곧 낫지 않았다. 족한 것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하지 않다고 옛적부터 이른 말이거든 하물며 병이 점점 더함이랴 하고 드디어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왕이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되 「고전에 구인을 맡기어 정치를 같이하라 하였고, 사람은 오직 노숙한 이를 구하라 하였으니 과인이 어찌 문득 허락하리요」 하고 고집하여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이에 다시 간곡히 애걸하니 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과인은 구인과 더불어 정치를 같이 할 생각이어늘 이제 경이 이같이 하니 짝을 잃은 새와 같도다. 그러나 경이 다행히 나이가 늙지 않았으니 다시 공경자리에 둘 것인바 과인이 보내는 약으로 병이 낫기를 원하니 오직 나의 청을 순종하라」 하시었다.   공(公)이 이에 오로지 약으로 요양(療養)하다가 문득 하루는 한 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사람이 오래 살기를 부러워함은 장차 편안함을 위함인데 이제 병이 이같으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묵묵히 평온한 마음을 가지므로 비록 친척이라도 능히 알지 못하였다. 병이 또 심함에 왕(王)이 이에 조서를 내려 정당문학(政堂文學) 참지정사(叅知政事) 판례부사(判禮部事)를 제수하였다.   다음해 1196년병진 추 칠월십구일에 사제(私第)에서 졸하니 향년(享年) 六十五세였다. 슬프다, 달리는 말이 힘껏 뛰다가 중도에서 발이 미끄러졌고 높은 기러기가 가벼이 날아 구름까지 이르렀다가 날개가 떨어짐과 같도다. 무릇 사대부로서 애통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왕이 또한 들으시고 슬퍼하며 시호를 문간공(文簡公)으로 하사하시었다. 동년 八月十三日 庚申日에 송림군(松林郡) 서산(西山) 남쪽 기슭에 안장하였다.   부인(夫人)은 대부주부(大府注簿) 손각(孫珏)의 따님으로 회도군군(懷道郡君)에 봉하였다. 이남일녀(二男一女)를 낳으시니 장남(長男)은 지금내시호부랑중(內侍戶部郞中)으로 태자내직랑(太子內直郞)을 겸(兼)하고, 차남(次男)은 지금 내시정용섭별장(內侍精勇攝别將)이요, 따님은 천수자(天水子)에게 출가(出嫁)하였는데 지금 공부랑중(工部郞中) 지제고(知制誥)이다. 그 명(銘)에 이르노니,   문장(文章)은 족히 도(道)를 관통하고 사업은 족히 세상을 구제했도다.   벼슬은 재상 지위에 올랐고 덕의는 원로로 일컬었도다.    임금은 옛일을 생각하여 후일에 포상이 후하였도다.       
공(公)께서 사람의 도리를 다했으니 또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일대(一代)의 으뜸가는 스승으로 만인의 선망이 되었도다.   태산이 이미 무너졌으니 백성들은 어디를 우러러 볼까?   백세(百世)의 오랜 세월 지나도 송백(松栢)은 푸르고 푸르리라,  이곳은 오직 공의 묘소이니 혹시라도 손상치 말지어다.

     참고;
          본 묘지명은 제작년대 제작자등의 기록이없다.
          문간공 졸 년당시 기록으로 보기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복야공의 관직 內直郞, 여적 천수자,등 생자가록등이 족보기록과 
         일부내용이  상치함으로 종문의 신뢰를 얻지 못하여 이론이 있다. 
          1915년 류병철은 본 지석을 박물관에서 일금 5원을 주고 사서 묘소에 다시 묻었다.  
          이어 1917년 류인철은 묘지의 생자기록을 무시하고  
          족보의 기록대로 다시 장자 언침,차자 택,여윤위로 기록 새로 비석을 세웠다.   
  
          문간공묘심봉사실 및 문간공묘표를 참고      
                                                                 
                                                                       [편집자 주  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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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政堂文學叅知政事判尙書禮部事文簡柳公 公權墓誌銘

公諱公權字正平姓柳氏始寧人也曾祖諱盧一檢校大將軍行散員祖諱寶春檢校小府少監考諱寵檢校小府少監妣曰雙城縣大君李氏公自少好讀書不事他技發爲文章明白純直君子也貞元三年中成均試明年入太學年考月書每登優等至庚辰相國金公永夫門下乙科登第辛巳以例出掌淸州牧書記洗心奉職吏民皆不忍欺旣三年入爲翼陽府錄事其進退動有恒常  上以此知公忠正無他蹇蹇有大臣之節風雲之會實基於此焉至於庚寅今上踐阼思欲大用卽召公爲內宦仍授四門博士兼直史舘遂拜軍器大府注簿乙未拜閤門袛候自是以後年除歲遷歷拜殿中內給事尙衣奉御戶部員外郞工兵兩部郞中壬寅兼國學直講諸生皆有矜式所謂學行可師者也明年加將作少監太子司經又轉爲太子中尹充史舘修撰官又明年加軍器監東宮侍講學士公有鄭覃稽古守正之德故太子每見特加禮遇丙午奉使北朝周旋中矩禮無違者北人因敬焉  上嘉其不辱君命改授吏部侍郞仍拜禮賓卿樞密院右副承宣公自庚寅遭遇以來不離天院備歷高華以至喉舌之任  上之待遇親若腹心夐越他臣己酉掌南省試所得皆一時名士學者以爲美談明年加判大府事右承宣又明年加國子監大司成兼太子贊善大夫壬子加翰林學士同知貢擧先是場屋間諸生例皆相覽潛竊至於賢愚混淆公知其如是及闢禮闈一行規法試席肅正榜下悉皆英俊時人謂之桃李在門明年轉爲左散騎常侍知奏事知吏部事公爲納言七年之間對顧問則內無隱情當獻替則動有直氣朝綱國體多有補益雖仲山甫出納王命無以加也甲寅拜同知樞密院事兼太子賓客至於明年忽嬰風疾療之不卽愈以爲知足不辱知止不殆古之道也况疾之漸乎遂上章求免厥職 上詔云古典曰圖任舊人共政人惟求舊寡人豈遽從之乃堅執累不允更乞懇款又 詔曰寡人思與舊共政今卿若此如失伴之鳥然卿幸年未老延年則更置公卿之列寡人所製願得延年唯請是從公於是專以藥石爲養忽一日喟然曰人羨久生將以爲安佚今疾若茲不如化之愈也其黙黙游心虛淡雖親戚有不能識者病且革  上乃下詔拜爲政堂文學叅知政事判禮部事越丙辰秋七月十九日卒于私第享年六十五噫奔驥騁力中塗踠足髙鴻輕擧在雲墜翼凡士大夫無不哀慟 上亦聞之惻然賜諡曰文簡公卽以其年八月十三日庚申葬于松林郡西山南麓夫人大府注簿孫珏之女封懷道郡君生男子二人女子一人長男今爲入內侍試戶部郞中兼太子內直郞次男今爲內侍精勇攝别將女適天水子今爲工部郞中知制誥其銘曰 有文章足以貫道有事業足以濟時位登宰輔德爲元龜天子念舊後有褒嘉公於人道其又何加一代之宗萬夫之望泰山其頽人將安仰百世之後松栢蒼蒼是惟公之墓無或毀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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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문화류씨병인보, 高麗墓誌銘集成海東金石苑 문화류씨무자보
                                (역문, 원문정리:류영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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