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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차문에 대한 류문의 입장-류주환-

 

車門에 대한 柳門의 立場

                                                                                    채하 류주환 박사

       『 世有許多文獻 而不檢證於其眞僞虛實則 寧不如無者也 』

세상에 많은 문헌이 있으나 그 진위와 허실이 검증되지 않았다면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이는 옛 성현께서 탄식하신 말씀을 의역한 것인데, 후세 학자들도 공감하는 견해이고 우리 역시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부터 수년간, 류 차 양문 간에 선계 문제로 상호 시시비비 많은 필전(筆戰)을 가졌던 바, 차문에서는 우리 류문에서 제기한『차원부설원기』에 의한 원파록 조작에 대한 해명은 모두 얼버무리고, 동선이성(同先異姓)이라는 해괴한 논조로 근세 양문 간에 뻔히 아는 상황만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한편 예전대로 환원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류문과 차문과의 관계에 대해서 한두 가지 쉬운 예를 들어 이르겠습니다. 첫째, 부부간에 자녀를 낳아 기르다가 성격상, 혹 경제적, 혹 어떤 이유로 이혼한 부부 간에 후에 자식을 위해서든 또는 여하한 사정으로 재결합하는 경우도 있고, 둘째, 어려서 고아원에서 만나 서로 형제로 알고 지낸 고아 사이에 후에 친부가 나타나 동기간이 아님을 확인하고 헤어질 경우도 있습니다. 상식으로 전자의 경우는 이해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계속 형제의 의를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돌이켜 보건대, 근세에 들어 왜곡된「원파록」의 사실을 모르고, 의심 없이 지내던 오늘날 류ㆍ차 양문의 입장이 후자의 경우와 똑 같습니다.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은 터에 2011년 3월19일 입수한 2010년판 『車門宗報』를 살펴보고 그 가운데 실린 몇 가지 사항을 간추려 쪽수 차례로 간략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55쪽,『차원부설원기가 나오기 전 고려 초기 서희의 야사와 정지상의 서경잡기와 김방경의 초당일기 등에 선계에 대한 단편적인 것만 전해 내려왔다.』운운에 대하여, 현재까지 국가공인 고전 서지목록에 서희와 김방경의 저서는 없고, 다만 정지상의 저서로『정사간집』이 있을 뿐인 바, 앞서 이른 서적이 분명 존재한다면 그 복사본이라도 제시하기를 요구한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63쪽,『대승공 류차달의 행적이 고려사에 나타나지 않는다.』운운에 대하여, 고려사 열전, 공의 6세손 문간공 류공권 편에「공의 6세조 대승 차달은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되었다.」고 등재되어 있고, 그 밖에 동국여지승람 황해도 문화현의 인물편에「류차달은 태조가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융통 공급함으로써 그 공훈으로 대승의 관직과 삼한공신의 훈호를 받았다.」라고 소연히 등재되어 있습니다. 문헌을 보았는지요? 못 보았는지요?

64쪽, 류문의 모 임원이 쓴『車譜序疑』(「차씨 족보 서문에 대한 의문」)이란 글을 보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약재상공 류상운(約齋相公 柳尙運)을 모독하는 불경스런 주장이다.』라고 힐책한 데 대하여, 우리 대종회에서는 조선왕조실록 및 약재상공의 묘갈명과 연보 등을 두루 살펴 사실을 쓰고, 또 그 유고 「약재집(約齋集)」에 차씨의 귀중한 족보서문이 실려 있지 않음을 들어 의혹을 제기하였습니다. 짐작건대 차문에서 그 훌륭한 명망을 흠앙하여 약재상공이 서거한 직후에 날조하였는지? 그렇지 않았다면 약재집에 빠질 이유가 없는 바, 납득할만한 해명을 못하는 차문에서 그 모독 불경을 오히려 사과할 것을 정중히 권합니다.

65쪽,『양문이 불화를 계속하게 되면 부산 기장 차능과 광주 광산 대동사 세향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차류대종회에서 1970년대 들어 차능을 봉축하여 향사를 주관하고, 2000년대 들어 대동사 사우 중수를 계기로 그 숭모회 및 보존회를 결성하여 향사에 적극 협조하였으나, 2007년 차류대종회가 해체된 후로는 양쪽 모두 그 지역에서 근근이 향사를 받들고 있습니다.

옛말에〈可祀者祀之非其鬼而祭之諂〉〈가히 제사를 지낼 분에 제사를 받드는 것이지, 제사 지낼 신령이 아닌데도 제사를 받드는 것은 아첨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차ㆍ류 양문의 관계가 종결되어 차류대종회가 해체된 이상 우리 대종회에서는 앞으로 시조 대승공의 향사를 주관하여 받들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68쪽,『1390년 운암 차원부가 차류보판을 해주 신광사에 보관한 후에 월파옹을 포함한 차문 70여인이 송원 마원에서 추살 당하고 차류보판도 소실 당하였다.』운운한 데 대하여, 그 말대로 차류 양문의 족보를 함께 발간했다면 류씨들은 전혀 모르게 차원부 혼자 간행했다는 말입니까?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또 차문 70여인이 추살 당했다 하는데, 차씨 족보에 당시 생존자를 모두 헤아려 보아도 70여인이 되지 않는데 70여인 추살 운운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면 정사는 물론 어느 야사에라도 나타날 것인데 전혀 없으니 이 또한 차원부설원기의 날조의 극치라 여겨집니다.

75쪽, 호랑이 설화를 무려 30쪽에 달하도록 장황하게 쓰고 도표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그에 대하여 전국 여러 성씨를 통틀어 이야기를 모으면 어찌 그 뿐이겠습니까? 일고의 가치가 없는 횡설수설에 불과합니다.

85쪽,『문화류씨 조상인 중대광 대승 문탁공 차달』운운한 데 대하여, 중대광은 1품, 대승은 3품으로서 고려 때 지방 토호 등에게 준 향직의 품계입니다. 한 사람의 직계가 1품이면 1품, 3품이면 3품이지 1품, 3품을 병기할 수 있습니까? 문탁공이란 어휘의 시호는 금시초문이고, 우리 시조 류차달은 다만 대승일 뿐 시호를 받지도 않았고 전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차문에서 임금을 사칭, 대승공의 관직을 높여 시호를 내린 격으로서 외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후손으로서 선대의 관직을 사실대로 기록해야지, 높이거나 올리는 것은 법도를 모르는 천박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111쪽,『몇몇 사가들이 설원기를 위작이라는 주장이 약간 있다.』운운한 데 대하여, 설원기를 위작이라 주장한 분들은 모두 당대에 학문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사학에 조예가 깊은 대표적인 실학자들로서 곧 영조 때 담와 홍계희(淡窩 洪啓禧), 몽예 남극관(夢囈 南克寬), 이재 황윤석(頤齋 黃胤錫), 성호 이 익(星湖李 瀷), 지호 이 선(芝湖 李 選) 등 석학들이었고, 현세의 학자로는 이수건(李樹健), 김난옥 및 우리 종중의 류주환(柳朱桓) 교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예전 석학들은 물론 현세 학자들 또한 차씨와 무슨 철천지원수이기에 괜히 남의 선대의 기록을 위작이니 날조니 공개적으로 비판하겠습니까? 그 분들을 힐책하기에 앞서 공사, 진위, 시비를 가려 후학들에게 바르게 가르치고 전하려는 학자들의 우수한 정신과 정직한 기개를 우리 모두 높이 평가하고 존경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종회에서는「차원부설원기」를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설원기의 허구성, 그에 의한 원파록의 날조 등, 하나에서 백까지 수긍하려고 해도 수긍할 수 없는 조작의 실태가 환히 드러나는데 귀문에서는 이러니 저러니 추측 운운하며 얼버무리고 있는 바, 참으로 삼척동자 아니고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112쪽, 정조 10년(1786) 9월7일,「일성록」에 의하면, 차원부의 시호를 청하는 상언에 대하여『수백 년 동안 거행하지 못했던 일을 지금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운운하였습니다. 그런데 2004년도에 간행한 연안차씨대동보 문헌편을 펴 보니, 세조 2년(1456) 5월 차원부에게 문절공의 시호가 내린 냥 교지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세조 때 이미 시호를 받고서 330년이 지난 후 정조 때 시호를 또 청하다니? 자가당착도 유분수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문화류씨 대종회에서는 지난 2004년부터 역대 족보 및 많은 공ㆍ사가 문헌을 수집, 수년에 걸쳐 정밀탐구하고 앞서 거론한 학자들의 유고 및 연구논문들을 참고하여 대종회의 결의로《원파록삭제변》을 부쳐 드디어 2008년 5월 대동보(23권 1질)를 간행, 세상에 배포하였습니다. 우리 문화류씨는 예전과 다름없이 역사적으로 확연한 대승공 류차달을 시조로 받들어 명문의 전통을 지켜나갈 뿐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끝으로 드릴 말씀은 옛날에 문장과 박식이 많았지만 공가문헌을 접하기가 실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반대로 학문은 예전만 못하지만 모든 문헌이 전부 공개되어 누구나 구하여 보기가 쉬워짐으로써 거짓이 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논어에『過則勿憚改』곧 허물이 있거든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는 뜻으로, 자신을 다스림에 용맹치 못하면 악한 마음이 날로 자라나기 때문에 허물이 있으면 속히 고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차문에 거듭 이르는 바, 사실이 뻔히 왜곡된 것을 알면서도 선대의 일이라 고집하며 괜한 억설을 일삼아 세월을 보내는 것은〈조상을 욕되게 하고 후손을 기만하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 하루빨리 용단을 내려 세간의 냉소를 면하고 후손들의 의혹을 해소하여 떳떳한 종중의 역사를 확립하는 것이 현세대의 지혜로운 정도의 선택이라 고언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서기 2011년 3월 31일,

                                               文化柳氏大宗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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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록변무"란 어떤 글인가

  제목 "차록변무(車錄辨誣)"에서 '차록(車錄)'은 "차원부설원록"을 뜻한다. 이것은 "차원부설원기"(설원기)라는 명칭으로 대표되는데, 여러 다른 이름들로 불린다. "차록변무"란 '설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밝힌다'는 뜻이다. 이 글은 조선의 유학자인 하진현(河晉賢 1776-1846) 선생의 글이다. 그의 호가 용와(容窩)인데, 하륜의 방손(傍孫)이며, "용와선생문집(容窩先生文集)"(이하 용와집)을 남겼다. "차록변무"는 용와집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은 "차록변무"의 원문과 하만흥씨의 번역 및 주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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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原文)

                                      車錄辨誣

車錄有世亂立功之說 謹按東閣雜記 雲巖留宿大內三日 而闕門之變作 若如錄中之言 翦除兩藩 退斥三峰 謇謇爲太宗謀忠 密勿啓沃 則闕門之變 何從而作 而設有是變 定社之日 有功必賞 有罪必刑 則雲巖之獨不策勳 而竟受顯戮 何哉 其所云云節節 可知誕妄也

 車錄有陰邪酒之說 今按國乘及野史 餞席覆杯 汚瀎御衣 規畵寢室 奠安宗社 正廟親製諭文中 潭潭杯酤扶我羲御者是也 當時集賢諸士 獨何見聞不到 指以爲陰邪酒 而肆然筆之於書耶

 車錄有擅殺兩藩太宗不知之說 按乘史 則公以湖伯 覆杯餞席 翌曉發行 留待事成於衿川之地 及變出 太宗躬執 凱仗力扶元儲 斬充之擧 誅管之事 蓋出於爲宗社不得已之地 而若其密勿之策 旋轉之機 皆出於公 故勘定大禍 擧爲首揆 諭文中 猶魚有水伯仲伊呂者是也 兩藩卽太祖之愛子 太宗之親弟 則夫誰敢私自擅殺 而雖時君世主 斷不當日一容貸也 豈以太宗之聖 不報同氣之深讐 而反作定社之元勳耶

 車錄有十年爲僧之說 按墓誌 則公十四歲中太學試 十九歲登廷試第 歷敭淸華 以崇儒術斥左敎爲已任 卞春亭文曰 擧世佞佛 公獨麾之 尹淸香銘曰 觝排異端 倡鳴道學 魚大諫疏曰 經學大臣河崙 革寺利削田民 以爲小正之始 蓋我朝之崇儒斥佛 自公而權輿 則托跡禪門 決無考據也

 車錄有忌嫡滅口之說 按邑誌 姜河兩姓 晉之著閥也 公自侍郞公以下九世 登第世掌文任 諭文中 晉陽之望奕世簪組者是也 考晉陽君 娶姜尙書承祐之女 姜氏自通亭公 前後宰輔相繼 鼎甲一時 則豈其娶妻 必車門之孼屬乎 設有是事 何傷於外外之家 而赤其族而火其譜乎 原頫之子 被竄而得生 則豈有不殺其子 而先赤其族乎 車氏之譜 至今尙傳 則投火之說 同歸於鑿空也

 車錄有盡殺一門自上不知之說 按稗說 則太宗履阼之後 原頫受刑 以其有讒間之罪 而一門奸連 擧多竄斃

 今其言曰 河相 因其私怨 不由君命 而以馬尾穿舌 縱鐵騎推殺七十餘人於兩原之間 信有是事 則實非細故 而衆口莫防 百目難掩也 以太宗之明 階前萬里 無遠不燭 而況此兩原 在輦轂咫尺之地乎 謂之自上不知 都不成說也

 車錄有李孟畛誣公之疏 按 李公牧隱先生之孫也 嘗出入於公之門 親炙甚密 若見得公 不是處 如錄中之言 則必不請賢祖之墓銘 以爲記德之信筆 而又豈肯與之通家 以其妹妻公之子耶

 車錄有尹子雲河生腹釰之說 按 尹公卽淸香堂淮之孫也 淸香受業公門 淵源明的 祭公之詞曰 才爲王佐 學冠儒宗 恩義俱全 比邸山而增重 涓埃莫報 曾豺獺之不如 銘公之文曰 灑落胸中 霽月光風 德崇業廣 宜國黃耉 若如錄中之言 有腹釰之詩 則乃家之悖孫也 豈有文憲公之賢 而操他人之戈 入其祖之室乎

 車錄有六臣奉敎撰 按丹溪河先生文集跋曰 雪冤記事 不但其文字荒陋 斷不出於先生 而攷其年月 乃在景泰丙子五月 竊想其時 熱血苦衷 噴薄弸蕩 與神爲謀 與天相抗 則此等閒漫文字 萬萬不留心明矣 後之托名贗作者 多見其欲巧而破綻爾 遂爲刪去 今觀車錄 則奉敎之撰 在於五月之晦 謀復之禍 出於六月之初 則日之相間不過三四也 端廟擯處別宮 此何等時 而一原頫冤不冤 何關於宗社之存亡 而有此張皇著述耶 噫 古之人看文字而知其荒陋 攷年月而辨其贗托 而今之人 專昧本朝之乘史 不察當日之事實 而隨唱隨和 因謬成謬 自陷於非理之罔 寧不惜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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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차록(車錄)[1]의 거짓을 밝힘

                                                  방후손(旁後孫) 하진현(河晉賢)[2] 삼가 짓다.

 『차록(車錄)』에는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 공을 세웠다'는 주장이 있다.

『동각잡기(東閣雜記)』[3]를 찬찬히 살펴보니, "운암(雲巖)이 대궐 안에서 사흘을 머물러 묵었는데 궐문에서 변란[4]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만약 차록 속에 있는 말과 같이, 양번(兩藩)[5]을 제거하고 삼봉(三峯)[6]을 물리치고 곧은 말로 태종(太宗)을 위하여 충성스러운 사람들과 의논하고 자세하게 태조(太祖)에게 충간하였더라면 궐문의 변란이 어떻게 일어났겠는가?

  설령 변란이 있었더라도 사직이 안정되었을 때, 공적이 있었다면 상을 받았을 것이고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운암만 유독 공훈이 기록되지 않고 마침내 법에 따라 죽임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차록에 기록된 것들은 절절이 허무맹랑한 거짓말들이다.

  차록』에 '음험하고 사악하게 술을 부었다'라는 주장[7]이 있다. 지금 국사(國史)와 야사(野史)를 살펴보니, 전별하는 자리에서 술잔을 엎어 어의(御衣)를 더럽혀서 침실로 가게 함으로써 종사(宗社)를 안정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정조(正祖) 몸소 지은 「유문(諭文)」[8] 중에, "잔 가득 계명주(鷄鳴酒) 부어[潭潭杯酤], 우리 왕실에서 나라 다스리는 것을 도왔네.[扶我羲馭]"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 집현전의 모든 학사들만 유독 이것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이 없어서, '음험하고 사악하게 술잔을 쏟았다'라고 꼬집고 마침내 차록에 기록하였겠는가?

  『차록』에 "양번(兩藩)을 멋대로 살육하였으나 태종(太宗)은 그 사실을 몰랐다."는 주장이 있다.

  국사(國史)를 살펴보니, 공은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그 전별연에서 술잔을 엎지른 다음 날 새벽에 길을 떠나서 금천(衿川) 땅[9]에서 머물면서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란이 일어났을 때, 태종이 몸소 나서서 군사력에 의지하여 승리를 거두고 동궁[10]을 세웠는데, 제거하고 보충하는 일과 주살하여 다스렸던 일은 대개 종사(宗社)를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비밀스러운 계책과 주선하는 책략은 모두 공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큰 재변(災變)을 헤아려 안정시키는데, 공을 등용하여 재상(宰相)으로 삼았던 것이다. 「유문(諭文)」에서 "고기가 물에서 노는 듯하니[猶魚有水],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뒤지지 않네.[伯仲伊呂]"라고 하였던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양번(兩藩)은 태조(太祖)가 아꼈던 아들들이고, 태종(太宗)의 친근한 아우들이니, 대저 누가 감히 혼자서 멋대로 이들을 죽일 수 있었겠고, 비록 당시의 군주(君主)가 이런 짓을 했더라고 결단코 하루도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태종과 같은 밝은 덕으로 동기(同氣)의 깊은 원한을 갚지 않고, 도리어 종사를 안정시킨 최고의 공적을 세운 사람으로 인정했겠는가?

  차록』에 "십 년간 승려 생활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묘지(墓誌)를 살펴보니, 공은 14세에 태학(太學)의 시험에 합격하였고, 19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맑고 화려한 관직을 두루 지내면서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다.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11] 의 글[12]에서 "온 세상이 부처를 섬기나(擧世佞佛), 공은 홀로 이를 물리치셨네.(公獨麾之)"라고 하였고, 청향(淸香) 윤회(尹淮)[13]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에 " 이단을 배격하고 도학(道學)을 밝히셨네."라고 하였으며, 대간(大諫) 어변갑(魚變甲)[14]의 『벽불소(闢佛疏)』에서 "경학대신(經學大臣) 하륜이 사찰을 혁파하고 사전(寺田)과 노비를 삭감하여 소정(小正)의 실마리를 열었다."라고 하였다. 대개 조선이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절간에 몸을 맡겼다'라는 것은 결코 근거가 없는 말이다.

  『차록』에 "적통(嫡統)을 증오하고 입막음을 하려고 원부(原頫) 일족을 몰살시켰다."라는 주장이 있다. 『읍지(邑誌)』를 살펴보면 '강(姜) ․ 하(河) 두 성씨는 진양(晉陽)의 벌족이라고 하였다. 공은 시랑공(侍郞公) 이하로 9세손인데,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은 한 시대의 문임(文任)[15]을 장악하였다. 「유문(諭文)」중에서 "진양(晉陽)의 명망(名望)이 있는 집안[晉陽之望], 빛나는 고관(高官)들이 대를 이었네.[奕世簪組]"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공의 아버지 진양군(晉陽君)은 상서(尙書) 강승우(姜承祐)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강씨(姜氏)는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姜淮伯)[16]에서부터 재상들이 앞뒤로 이어져서 한 시대의 뛰어나고 성대한 집안이 되었는데, 어찌 차문(車門)의 서얼(庶孼)에게 장가들었겠는가? 설령 이런 일이 있었더라도, 차문(車門)은 외가(外家)의 외가 집안[17]인데 무슨 상관이 있어서 그 족속을 모두 죽이고 그 족보를 불태웠겠는가? 원부(原頫)의 아들이 유배를 가서 살아남았다면, 어찌 그 아들을 죽이지 않고 먼저 그 족속을 모두 죽였겠는가?

  차씨의 족보가 아직 전해지고 있는데, 그 족보를 불태워 없앴다는 주장은 결국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닌가?

  『차록』에 "한 집안 사람을 모두 죽였는데 위에서 모르게 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패설(稗說)을 살펴보니, "태종이 등극한 뒤에 원부(原頫)가 형벌을 받았는데 이간질을 한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집안 전체가 간사한 무리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대부분 유배가고 죽임을 당하였다."라고 되어 있었다.

  지금 차록에 "하상국(河相國)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말꼬리로 만든 노끈에 혀를 뀌어놓고 철갑을 입은 기병(騎兵)을 풀어 양원(兩原)의 사이[18]에서 70여 인을 추살하였다."라고 하였다. 진실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참으로 작은 사건이 아니므로 여러 사람의 입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고 여러 사람의 눈을 가릴 수 없었을 터이다. 태종의 총명함은 탑전(榻前)에서 만 리 밖을 밝히지 않음이 없었는데, 더구나 이 양원(兩原)은 도성(都城)에서 가까운 곳이니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를 두고 '임금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은 모두 말이 되지 않는다.

  『차록』에 "이맹진(李孟畛)[19]이 공을 모함하는 소(疏)를 올렸다."라는 말이 있다. 살펴보니, 이공(李公)은 목은(牧隱)선생의 손자로서 일찍이 공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아 매우 가깝게 지냈다. 만약 공을 알았다면 이렇게 처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록 속의 말과 같다면, 훌륭한 할아버지의 묘명(墓銘)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여 그 덕망을 기록할 만한 믿을 수 있는 문장가로 여겼겠는가? 그리고 어찌 즐겨 서로 집안과 교유하고 그의 누이를 공의 아들에게 시집보냈겠는가?

『차록』에 "윤자운(尹子雲)[20]이 '하생(河生)이 뱃속에 칼을 품었다'라고 읊은 시"가 있다. 살펴보니, 윤공(尹公)은 청향당(淸香堂) 윤회(尹淮)의 손자이다. 청향당(淸香堂)이 공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니 그 연원(淵源)이 분명하고, 공을 제사하는 글에서 "재주는 임금을 도왔고(才爲王佐), 학문은 높아 유림의 종장이었네(學冠儒宗). 은혜와 의리 모두 온전했으니(恩義俱全) 산악에 견주어도 더욱 무겁네(比邱山而增重).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했으니(涓埃莫報), 승냥이나 수달[21]만도 못하네(曾豺獺之不如)."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의 묘갈명(墓碣銘)에 "산뜻한 가슴속은(灑落胸中), 갠 달과 맑은 바람이라(霽月光風). 덕은 높고 하신 일 많아(德崇業廣), 국가의 원로이었네(宜國黃耉)."라고 하였다. 만약 차록의 말대로 '뱃속에 칼을 품었다라는 시'를 지었다면 그는 집안의 패악한 손자이다. 어찌 문헌공(文憲公, 윤자운의 시호)처럼 어진 사람이 남의 창을 들고 그 할아버지의 방을 침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차록』에는 '사육신(死六臣)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지은 글'이 있다. 「단계하선생문집발(丹溪河先生文跋)」[22]을 살펴보니, "설원(雪冤)의 기사(記事)는 그 문자가 거칠고 비루하니 결코 선생이 지은 것이 아니다. 지었다는 시기를 살펴보니 경태(景泰)[23] 병자(丙子 1456)년 5월이다. 그 시기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피 끓는 의기와 괴로운 심사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고 들끓어 귀신에게 의논하고 하늘과도 맞설 때인데, 이같이 한가하고 느긋한 문자를 조금도 마음에 둘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후세에 이름을 훔쳐서 위조한 것은 잘 만들려 하다가 되레 들통이 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마침내 이것을 빼고 싣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지금 차록을 보건대, 임금의 명을 받고 지은 것이 5월 그믐이고,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6월 초에 화를 당하였으니, 그 사이의 기간이 불과 사흘나흘이다. 단종이 별궁으로 내쫓긴 이때는 어떤 시기이며, 일개 원부(原頫)가 원통하건 원통하지 않건 사직의 존망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같이 장황하게 글을 지었겠는가?

아! 옛사람들이 글을 보고 그 거칠고 비루함을 알았고 그 시기를 살펴서 이름을 훔친 위작(僞作)임을 분별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은 우리 조선의 역사에 아주 어둡고 그 당시의 사실을 살피지 않고 주장에 따라 화응만 하니, 잘못된 것이 또 다른 잘못을 만들어 낼 뿐이고 스스로 터무니없는 속임에 걸려들 뿐이로다. 어찌 애석하지 않으랴!

                                                                                       [번역/주석: 하만흥]

[1]『차록(車錄)』: 『차원부설원록(車原頫雪冤錄)』을 가리킨다. 이 문헌이 1456년에 찬술되었다고 하였으나, 1580년 즈음에 처음 나온 뒤에 계속 개작되고 보완해온 위서(僞書)로 판명 났다. 이 책의 전편에 걸쳐 연안(延安) 차씨(車氏)의 상대(上代) 가계(家系)를 조작할 목적으로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을 서얼(庶孼)로 폄하하고, 차원부(車原頫)를 죽인 원악(元惡)으로 꾸미고 있는 악서(惡書)이다.

[2] 하진현(河晉賢 1776-1846) : 조선 후기 유학자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고 자는 사중(師仲)이며 호는 용와(容窩)이다. 당시 거유인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등과 교유했으며, 사산초당(士山草堂)을 짓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용와선생문집(容窩先生文集)』이 있다.

[3]『동각잡기(東閣雜記)』 : 조선 명종 · 선조 때의 문신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이 찬술한 야사(野史)이다.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조선 건국부터 선조 때까지의 정치 상황과 명신(名臣)들의 행적을 적고 있다.

[4] 궐문에서 변란 : 1398년에 있었던 제1차 왕자의 난을 가리킨다.

[5] 양번(兩藩) : '두 명의 왕자(王子)'라는 뜻이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제거되었던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소생인 방번(芳藩) · 세자였던 방석(芳碩)을 가리킨다.

[6] 정도전(鄭道傳 1342-1398) : 여말선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종지(宗之)이고 호는 삼봉(三峯)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제거되었다.

[7] "음험하고……주장 : 차록에는, 문충공 하륜이 신덕왕후(神德王后)의 가까운 친척인 강호(康昊), 강민(康敏)과 사이가 틀어져서 강씨의 일족을 모함하여 그 권한을 빼앗으려 하였다. 그리고 당시 연안 차씨들이 고려와 조선에 걸쳐 최고의 벌족(閥族)으로써, 정종(定宗)의 여자 권속들이 모두 차원부의 직계들이었는데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는 전별연에서 일부러 술잔을 엎어 당시 태제(太弟)였던 이방원의 옷을 더럽힘으로써 실내에서 단독으로 만날 수 있었고, 이 자리에서 이방원으로 하여금 방번(芳藩)과 세자인 방석(芳碩)을 의심하도록 만들었다는 거짓 주장을 말한다.

[8] 정조(正祖)가 지은 「유문(諭文」: 정조 23년(1799)년에 내린 하륜에게 내린 제문(祭文)을 가리킨다.

[9] 금천(衿川) : 지금 서울의 금천구이다.

[10] 동궁(東宮) : 방과(芳果)로 뒤에 정종(定宗)을 가리킨다.

[11]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1369-1430) :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거경(巨卿)이며 호는 춘정(春亭)이다. 조선 초 관인문학을 좌우했던 인물로,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춘정집(春亭集)』을 남겼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2] 글 : 『춘정집(春亭集)』11권에 실려있는 「제진산부원군호정선생문(祭晉山府原君浩亭先生文)」을 가리킨다.

[13] 윤회(尹淮 1380-1436) :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자는 청경(淸卿)이고 호는 청향당(淸香堂)이다. 조선 초기 문신으로,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참의 ․ 집현전 학사를 총괄하는 부제학 ․ 예문관제학 · 대제학과 같은 문한직(文翰職)을 역임하였다. 『청경집(淸卿集)』을 남겼다.

[14] 어변갑(魚變甲 1380-1434) :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함종(咸從)이고 자는 자선(子先)이며 호는 면곡(綿谷)이다. 식년문과에 장원한 뒤, 교서관부교리 · 성균관주부 · 좌정언 · 우헌납 을 거쳐 집현전이 발족되자 응교로서 지제교(知製敎) ·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을 겸임하다가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고성의 면곡서원(綿谷書院)에 제향되었다.

[15] 문임(文任) :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을 가리킴.

[16]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姜淮伯 1357-1402)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백보(伯父)이며 호는 통정(通亭)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좨주가 되었으며,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통정집(通亭集)』이 있다.

[17] 외가(外家)의 외가 집안 : 문충공의 외할머니의 어머니가 차씨의 첩으로 되어 있다. 곧 외할머니가 차씨의 서녀(庶女)라고 조작하고 있다.

[18] 양원(兩原)의 사이 : '양원'은 개성 근교의 송원(松原)과 마원(麻原)이라고 한다.

[19] 이맹진(李孟畛 1374-1456) :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호는 청허재(淸虛齋)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손자이다. 태보(太保)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추증되었다.

[20] 윤자운(尹子雲 1416-1478) :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자는 망지(望之)이며 호는 낙한재(樂閑齋)이다. 집현전학사 윤회(尹淮)의 손자이다. 세조는 그를 위로하고 1469년에는 우의정으로 승진시켰다. 세조 때 좌의정 ․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21] 승냥이와 수달 : 조상의 은덕에 보답할 줄 안다는 짐승이다. 승냥이는 계추(季秋)에 보은(報恩)하는 제사를 지내고, 수달은 맹춘(孟春)에 제사를 지낸다 한다.

[22] 단계하선생문집발(丹溪河先生文跋) : 홍계희(洪啓禧, 1703년~1771년)가 지었다. 그는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는 순보(純甫)이며 호는 담와(淡窩)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23] 경태(景泰) : 명(明) 경제(景帝)의 연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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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록변무"에 관한 토론

  이 "차록변무"(이하 변무)에서는 각 부분에서 먼저 "차원부설원기"(이하 설원기)의 내용을 언급하고 그에 대한 반박을 하고 있다. 그런데 설원기와 대조해 보면, 설원기의 구절들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아니고, 내용을 축약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변무에서는 다음과 같은 9가지의 사항에 대해 각각 거짓임을 논증하고 있다.

 (1) 설원기의 차원부와 왕자의 난의 관련 묘사.

(2) 하륜이 왕자의 난 전에 태종에게 비밀리에 말을 하기 위해 일부러 태종의 옷을 더럽힌 일이 있었다. 이것을 설원기는 흉악하게 표현하고 있음.

(3) 왕자의 난 때 방번과 방석이 죽임을 당했는데, 설원기에는 태종은 그 사실을 모른 채 하륜이 자행한 일로 묘사되어 있음.

(4) 설원기에는 하륜을 비방하여 십 년간 승려생활을 했다고 주장함.

(5) 설원기에 하륜이 차씨집안의 서얼이고 그 사실을 밝힌 차원부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차원부와 그 일족을 몰살시켰다고 묘사함.

(6) 설원기는 차문 일족의 몰살을 태종이 모르게 행했다고 묘사함.

(7) 설원기에는 이맹진이 하륜을 모함하는 소(疎)를 올렸다고 말하고 있음.

(8) 설원기에 윤자운이 지었다는 응제시가 나오는데, 하륜의 행위를 비난하고 있음.

(9) 설원기는 곳곳에 사육신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지었다고 명기하고 있음.

  이들은 대개 지금까지 상세하게 밝혀진 설원기의 거짓 주장들과 상통한다. 그리고 변무에서만 다룬 사항은 (7)과 (8)인데, 이것들은 그 당사자로 거론된 이맹진과 윤자운의 하륜과의 관계를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변무에서 외적인 정보로 명시되어 있는 두 군데에 관심이 끌렸다. 그 중 첫째가 (1)에 언급된 "동각잡기"이다. 변무에서는 "동각잡기"에 "운암{차원부를 지칭}이 대궐안에서 사흘을 머물러 묵었는데 궐문에서 변란{왕자의 난을 말함}이 일어났다"고 쓰여 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차원부를 설원기 외에서 다룬 글이라서 필자가 주목한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설원기에 나온 사건과 행적들을 (하륜이 태종의 옷에 술을 엎지른 것 등의 알려진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설원기가 세상에 나온 16세기 후반 이전의 다른 문헌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엾었다. "동각잡기"는 선조 때 이정형(李廷馨)이 저술한, 고려 말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의 사실(史實)을 서적(書籍) 또는 견문(見聞)에 의하여 연대순으로 수록한 문헌인데, 1605년에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필자는 "동각잡기"에서 차원부가 등장하는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이본(異本)이 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동각잡기가 "知退堂集"(지퇴당은 이정형의 호)에 들어 있어 그것도 살펴보았지만 차원부는 찾아지지 않았다. 물론 동각잡기에 차원부가 등장하는 대목이 있다면 설원기가 세상에 등장한 것이 1580년대쯤이고 동각잡기는 1605년에 나왔으므로 동각잡기가 설원기를 보고 쓴 것일 것임은 자명하다.

  둘째는 (6)에 언급된 "패설"이다. 변무는 여기에 "태종이 등극한 뒤에 {차}원부가 형벌을 받았는데, 이간질을 한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집안 전체가 간사한 무리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대부분 유배가고 죽임을 당하였다"고 쓰여 있었다고 말한다. 설원기가 위서라는 주장은 조선시대에도 나왔지만, 이렇게 설원기의 묘사와는 정반대로 '태종이 등극한 후에 차원부와 집안이 죄가 있어 벌을 받았다'는 설명은 변무에서 처음 본 것이어서 무척 흥미롭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이 "패설"이라는 것이 어떤 문헌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물론 이제현의 "역옹패설"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것은 고려 때라 시기가 맞지 않는다. 혹시 "패설"이 일반 명사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위 두 가지는 차원부의 행적이 설원기 이외의 문헌에 묘사된 것으로 보이는 경우라서 상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설원기가 나온 후에 설원기의 묘사를 그대로 옮긴 문헌들이 허다하고, 차원부의 행적과 역사적 묘사가 정사(正史)에 나오지 않거나 정사와 정반대로 되어 있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이미 판명되어 있다.

  노파심에 부언하자면, 하진현 공은 차원부의 행적과 태조-태종과의 관계가 무엇인가 있음을 상정하고 글을 썼다. 예를 들어 차원부가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죽었다는 것은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해석은 차원부가 하륜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태종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알려져 있는 차원부의 관력도, 과거급제 사실도 모두 근거가 없으며 태조-태종과의 관계나 왕자의 난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등의 행적도 완전 날조된 것이다. 설원기의 실체를 간파한 유학자도 여전히 일부분에서는 속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설원기의 교묘함에는 경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다른 여러 요소들과 함께 설원기를 지금까지 회자되게 만들었다. 앞으로 "차록변무"가 소개될 때는 이런 지적이 함께 제시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차문절공유사목판"의 문제점

1. 서론

"차문절공유사목판"(이하 차씨목판)이란 "차문절공유사"라는 문헌을 찍어낸 목판으로서 현재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목판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점에는 문제가 많아 필자는 2008년부터 지속적으로 그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차씨목판의 소개를 포함하여 그 동안 경과에 대해 간략히 요약하고, 다음으로 문제점에 대해 상세히 토론한 후, 마지막으로 맺음말을 제시한다.

  2. 차씨목판의 현황과 경과

차씨목판에 대한 공식적인 묘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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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명칭: 차문절공유사목판(車文節公遺事木板)

수량/면적: 53판

지정(등록)일: 1999.07.05

고려 말 조선 초의 충신인 차원부(1320∼1407)의 유고문집 『차문절공유사』를 정조 15년(1791)에 새긴 목판으로, 총 53매이다.

차원부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당시의 대학자인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이름을 날리던 유학자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을 비판하였으며, 그후 숙적이었던 하륜이 보낸 자객에게 가족 및 일당 80여 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시호는 ‘문절’이다.

나라에서 판각을 명령하여 국가기관인 운각(芸閣)에서 발행한 것일 뿐만 아니라 빠진 목판이 없고 중앙인쇄처에 판각하도록 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쇄사적으로 그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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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판은 당초 여수에 있었는데 2005년에 광양시 옥룡면으로 옮겼다. 그리고 2007~2008년경에 거액의 광양시 사업비와 국비를 들여 목판 보존각(보호각)을 세운 것으로 파악된다.

보존각에는 거액의 세금이 들어간 것이 확실해 보이는데, 어찌된 일인지 지방자치단체 홈페이지에서는 관련 정보가 전혀 검색되지 않는다. 또한 인터넷의 다른 곳에서도 관련 설명도, 사진 한 장도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보존각에 대한 상세한 내역은 행정공개를 요청해 놓은 상태이다.

 광양시의회 사이트에는 2008년에 광양시 옥룡면 죽천리의 주민들이 보호각 건립을 반대하는 진정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2008. 6. 17.). 마을에 연고가 없는 이질적인 건물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그해 말의 광양시의회 회의록에는 주민과 차씨종친회 사이에 협의가 원만히 이루어졌다는 발언이 나온다(2008. 12. 4.).

  필자가 광양시청에 보존각에 대해 2010년 중반에 공식적으로 확인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수 천 만원의 예산을 들여 추가 설비를 하는 계획이 잡혀 있었다.

  한편, 2008년 후반기에 필자가 차씨목판이 담고 있는 문헌인 "차문절공유사" 곧 "차원부설원기"가 위서(僞書)요 악서(惡書)로서 우리 역사와 사회에 큰 해악을 끼쳐왔으므로, 유형문화재에서 해제해 달라는 요청을 전남도청에 제출하였다. 전남도청에서는 그에 대한 회신(2008. 12. 26.)을 통해, 필자의 요청을 기각하였다. 그 이유로 명기된 것은 다음과 같다.

  "차문절공유사목판은 조선시대 국가 기관인 운각에서 판각한 인쇄사적 가치를 평가하여 목판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으로, 지정해제 사유에는 해당되지 않음."

  필자는 당시 외국에 연구차 나가 있었기 때문에 위의 회신 공문은 몇 개월 후에나 볼 수 있었다. 그 후 대처를 여러 모로 궁리했지만, 업무로 인해 구체적인 대응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목판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파악하게 되어 다시 전남도청에 목판 관련 민원을 제기했고, 현재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차씨목판에 관련된 최근의 움직임 하나를 소개한다. 그것은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과 관련된 것이다. 최근 차문(연안차씨 문중)에서 차씨목판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려는 시도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실상을 확인해 본 결과, 정확한 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곧, 안동에 위치한 '한국국학연구원'이라는 곳에서 목판 관련 사업을 크게 진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각 지역에 퍼져 있는 목판들을 10만장을 목표로 수집하여 한 곳에 보존하고 연구.정리하여 활용하며, 궁극적으로는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시도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연구원에서 기초조사로서 목판들의 현황을 조사.연구했는데, 그때 차씨목판도 포함되었으며, 현재로서는 차씨목판이 연구원에 기증된 상태도 아니고 향후 그럴 확률도 낮아서 등재 시도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을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세계기록유산에는 훈민정음, 팔만대장경, 동의보감 등 세계사에 미친 영향력이 큰 수 건의 문헌이 등재되어 있을 뿐으로, 만일 차씨목판이 그 시도의 대상이라도 된다면 세인의 비웃음을 받을 것이며, 국가 망신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이제 위의 차씨목판에 대한 묘사에 대한 토론을 중심으로 목판의 문제점에 대해 논해 보기로 한다.

3. 차씨목판의 문제점

차씨목판의 문제점은 목판 자체에도 있지만(상세한 것은 아래에 논함), 대개 그 목판이 담고 있는 문헌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소개했지만, 가급적 이 글이 독립적(self-contained)이도록 하기 위해 먼저, 다소 길지만 다시 정리한다.

(1) 위서이며 악서인 차원부설원기

차씨목판이 담고 있는 문헌인 "차문절공유사"는 원래 "차원부설원기", "차운암설원록", "운암선생설원록" 등의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데, 이하에서는 그 대표명인 "차원부설원기" 또는 약하여 "설원기"라 칭한다. 설원기는 서문, 본문(記), 응제시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책 자체에 서문은 하위지가, 본문은 박팽년이, 그리고 응제시는 48명이 지었다고 되어 있고, 본문의 주석자로 또 여러 명이 나온다. 모두 왕명을 받들어 지었다고 곳곳마다 명기되어 있으며, 지은 날짜는 세조 2년인 1456년 5월로 되어 있다. 바로 사육신변고가 일어나기 며칠 전이다.

 내용은 차원부라는 인물이 선초(鮮初)에 억울하게 죽어 그 설원(雪冤)을 한다는 것이다. 그의 설원에는 태조에서 세조에까지 이르는 여러 왕들과 당시의 최상위층 신하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서 차원부의 가문인 차문(車門)의 시조의 내력과 그 전후의 계통이 적혀 있고, 차원부의 가계에 대해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설원기는 식자도 그 진위를 잘 파악할 수 없게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고, 왕명이라 하여 권위를 최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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