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포럼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아이디 패스워드    
 
   
 
     
 

          
View Article  
  작성자  편집인
  제    목  문화류씨병인보서... .<.1926>


                                 병인보서(
丙寅譜

  주역(周易) 천화동인(天火同人) 괘사(卦辭)에 이르되 자기의 종중에 동지(同志)를 구하라 한 바, 공부자께서 계사(繫辭) 상(象)에 이르되 동류끼리 모이고 사물을 구분함은 동인의 도(道)라 하셨으니 생인(生人)의 도(道)는 사람으로 더불어 같이 하는데 더욱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종족이라.

지금 우리 종족을 함께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본원(本源)을 소급하고 지류(支流)를 통달하여 서차(序次)를 계승(繼承)함이 계통이 있고, 친소(親疎)가 윤기(倫紀)가 있은 연후에 이에   함께 할지니 그래서 사물을 분변(分辨)하여 유취(類聚)함이 이 족보를 만드는 도리이다.    

우리 류씨(柳氏)는 문성(文城)으로 관적(貫籍)하여 그 세계가 오래 되었다. 여조(麗朝)에 이르러 대승공(大丞公)께서 크게 현저하시고 명경석보(名卿碩輔)가 대대로 연이어 봉군(封君)이 六인이 있으니 문산(文山)·서령(瑞寧)·곤산(崑山)·문평(文平)·전성(全城)·진산(晋山)이요, 또 사세(四世)에 오공(五公)이 상계하여 국가의 성전(盛典)을 크게 울렸으니 문간공(文簡公)·문정공(文正公)·정신공(貞愼公)·장경공(章敬公)·온정공(溫靖公)이 곧 그 시호이다.

그 뒤에 자손이 더욱 크게 번성하여 파분(派分) 지별(支别)이 거의 일국에 편만(遍滿)하되 세대가 멀어짐으로써 종족의 친의(親誼)가 날로 소원하여 노상행인과 다름없이 되니 이는 우리 족보를 수찬하지 않을 수 없는 사유이다.

이러므로 영락보(永樂譜) 가정보(嘉靖譜)로부터 기사보(己巳譜) 경신보(庚申譜) 정사보(丁巳譜) 갑자보(甲子譜)에 이르기까지 무릇 六회를 발간하고, 후에 사력이 미치지 못함으로 인하여 각각 파보를 수찬하여 별도로 문호를 세우니 소종보(小宗譜)에 불과할 뿐 가히 대동보(大同譜)라고는 할 수 없다.

조종(祖宗)의 균시(均視)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을까 두려워 전후로 대동보의 역사를 여러 번 설계했으나 또한 중도에서 그만둠을 면치 못하였으니, 인현(仁峴)과 송현(松峴)의 설역(設役)은 말할 것 없거니와 고산 기익씨(基益氏)의 경자년(庚子年)의 설역은 돌아가시어 마치지 못하고, 전동 흥필씨(興弼氏)의 정미년(丁未年)의 설역은 세상이 어지러워 마침내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우리 종족의 여한(茹恨)이 오래되었다.    

계해년 一九二三 봄에 진천종인 인덕(寅德)과 명렬(明烈)이 기창(基昌)과 기은(基殷) 양씨의 서한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족보를 수찬하지   못한지가   이미 六十년이 되었으니, 어찌   서로 힘써 이에 종사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내가 이에 깊이 감동함이 있어 이르기를 옳다. 돌이켜 보건대 내 죽게 된 늙은이로서 무릇 일체 세상일를 비록 알지 못하지만 족보는 우리 가문의 일이니 가히 자폐하여 감히 힘쓰지 않으리오. 주자(朱子)가 이르시되 선조의 선행이 있는데도 알지 못하면 불명이요, 불명이면 불인이라 하시고, 정자(程子)가 이르시되 천하의 인심을 포섭하여 종족을 수합하고 풍속을 돈후하게 하려면 모름지기 보계를 밝혀야 한다고 하시었다.

족보에 관계되는바 중차대함이 이와 같으니 내가 비록 노쇠하고 병들었으나 어찌 감히 그 만분의 일이라도 협조하지 않으리오.    이로써 이 해 五월에 통문을 발송하여 팔도제종에게 두루 통고하였더니 제종이 기꺼이 향응하여 이 역사를 찬성하였다.

범례와 규칙은 일체 구제를 준용하고 그 나머지는 참작하여 둘 것과 삭제할 것을 정밀히 살피기에 힘써 무릇 四년만에 완성하니 모두 六十권이라. 이에 본원(本源)에 나온 바와 지류(支流)의 나뉜 바가 책을 펴보면 환하여 무릇 우리 종족이 멀고 가까움이 없이 한 족보에 모아 다 실렸으니 거의 대역(大易)의 同人의 도(道)를 잃지 않아서 조종(祖宗)의 균시지인(均視之仁)에 부합(符合)하였다. 또 전후로 여러 번 설계하였다가 여러 번 철폐한 역사를 이제 성취하였으니 범사의 성취함이 자연히 그 때가 있음을 알겠고 우리 종족의 일찌기 여한(茹恨)하던 바가 또한 유감이 없게 되었다.

족보 속에 제공의 덕업 문장과 위충(危忠) 탁절(卓節) 당언(讜言) 가모(嘉謨)를 그 대략만 뽑아 일권을 만들고 이름을 문헌록(文獻錄)이라 하여 보권의 후면에 부치었다.

아아! 제공의 후손된 이는 이 족보를 보고 척연히 흥감하여 서로 더불어 힘써 선세의 아름다운 자취를 계술할 바를 생각한다면 거의 이 보첩이 빛이 있을 것이다.

                     1926년 병인 9월12일 (柔兆攝提格重陽越三日 )           
                대승공삼십일세손통정대부비서원승겸장례원장례 인철 근서

             ( 大丞公三十一世孫通政大夫秘書院丞兼掌禮院掌禮 寅哲謹序)

                              ............................................

                               丙 寅 譜 序

在易同人之辭曰同人于宗夫子繫之以象曰類族辨物同人之道也盖生人之道在於人與人同而尤不可以不同者宗族是已今欲同吾宗族必先溯其本源達其支流得以繼序有統親疎有倫然後乃可同之然則辨以類之是譜之道也我柳之籍文城其系遠矣至麗朝大丞公大著名碩世作磊落相望封君有六曰文山曰瑞寧曰崑山曰文平曰全城曰晋山又有四世五公相繼彪炳大鳴國家之盛曰文簡文正貞愼章敬溫靖卽其諡也厥後子孫益大而熾派分支别殆遍一國而世代寖邈宗族之親者日疎而疎至於路人此吾譜之所以不可不修也是以自永樂嘉靖至己庚丁甲凡六剞劂而後因事力之不逮各修其派别立門戶不過爲小宗譜而非可曰大同之譜也恐有所違祖宗均視之義旣以前後設大同之役者屢矣亦未免有始而無卒仁峴松峴之設已矣無可論高山基益氏庚子之設身歿未畢典洞興弼氏丁未之設世亂而止竟不得就吾宗所以茹恨者久矣癸亥春鎭川宗人寅德明烈甫袖基昌基殷兩氏書而至諗于余曰吾譜之闕而未修今已一周甲矣盍相與勉力而從事於此余乃竦爾而作曰諾顧以未死餘喘凡於一切世務雖不敢與聞於其間譜吾家事也不可辭以自廢安敢不力朱子曰先祖有善不知不明不明不仁程子曰管攝天下人心收宗族厚風俗須是明譜系譜之所繫其重且大如此余雖衰疾安可不助其萬一乃於是年五月發文遍吿八方諸宗諸宗歙然響應贊成是役其凡例規則一遵舊制其他叅酌存删務盡精覈凡四閱歲而成總若干卷於是乎本源之所自出支流之所由分開卷瞭然而凡吾宗族無有疎戚近遠而彙同一譜庶不失大易同人之道而有合乎祖宗均視之仁也且前後屢設屢撤之役今焉乃就乃知凡事之成自有其日而吾宗之嘗所茹恨者從亦可以無憾矣譜中諸公之德業文章與夫危忠卓節讜言嘉謨撮其梗槩約爲一卷名曰文獻錄以付譜卷之後嗚呼使夫爲諸公後者覽是而惕然興感相與勗勵思所以繼述先美則庶有光於斯譜也歟        

                                      柔兆攝提格重陽越三日            
                大丞公三十一世孫通政大夫秘書院丞兼掌禮院掌禮寅哲謹序서                           .................. ...............................

[출처: 문화류씨세보 <정리. 편집 류영렬.

주)  유조(柔兆)는 병(丙), 섭제격(攝提格)은 인(寅) 重陽은 九月九日 ,越三日은 3일이 지낸 날, 즉 병인년 구월 12일이 된다. 골치 아프리라. 1926년9월12일. 이렇게 쓰면 알기 쉽고 얼마나 편한가.

이왕에 육갑좀 떨고 갑시다. 병신이 가진육갑 떤다고 했던가? 아닙니다. 육갑에 음양오행의 오묘한 이치가 깊게 있습니다. 알아두면 약이 됩니다.

갑자(甲子) 이야기 알아둡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이 육십갑자(육갑)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육십갑자가 음양오행이 순환하는 주기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도 60년 즉 환갑을 맞으면 잔치를 열고 축하하는 전통이 생기기도 했다. 실로 육갑은 예전 선조들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수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 육갑을 제대로 이해하고 응용하기는 만만치 않았다. 아예 60갑자를 전부 외워버린다면 모를까 조합하여 응용하기에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병신이 육갑한다” 라는 속담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어쨌든 우리의 선조들은 이 어려운 육갑을 쉬운 숫자보다 더 선호하였다. 그래서 연호는 쓰지 않을지언정 육갑은 꼭 썼다. 어느 건물이던 상량이 올라가는데 거기에 쓰인 연대는 거의 육갑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육갑으로 연대를 썼을 때 당대에는 대략 알 수 있지만 수백 년이 지난 뒤에는 어느 해 갑자년인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이 때문에 관련 학계나 전문가들이 연대측정에 곤욕을 치르게 만든다. 우리도 좀 오래된 족보나 문헌에는 가진 육갑으로 표기해 있는 것을 가끔 본다. 그대마다 몇 년 몇 월 몇 일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전문학자 를 찾아가 물을 수도 없고...

그러나 지금도 상량문을 쓸 때에는 관행대로 거의 육갑을 쓰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불편해도 관행은 관행이다. 선조들이 광범위하게 사용했던 육갑을 복잡하다고 외면해 버리면 선조들과 문화가 단절되어 버리는 결과가 나타난다. .....

60갑자의 원형은 우리가 잘 아는 10간 12지이다. 이것을 하늘과 땅에 응하여 천간(天干) 지지(地支)라 하기도 한다. 기실 이것들의 개념은 본래 심오한 음양오행 사상에서 출발했으므로 일반이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12지는 시간에 응용되기도 하고, 특정 동물을 상징하기도 해서 태어난 해의 지지로 닭띠니, 개띠니 분류하는 것은 지금도 남아있다. 이 10간 12지가 조합된 것이 바로 60갑자이다. 골치 아프다고 외면만 할께 아니라 들여다보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10간은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 계(癸)이고, 12지는 자(子)․축(丑)․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해(亥)인데 결합방법은 처음에 10간의 첫째인 갑(甲)과 12지의 첫째인 자(子)를 붙여서 갑자(甲子)를 얻고, 다음에 그 둘째인 을과 축을 결합하여 을축(乙丑)을 얻는다. 이와 같이 순서에 따라 하나씩의 간지를 구해 나가 60개의 간지를 얻은 후, 다시 갑자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10과 12가 어울리다가 보니까 12지에서 2가 남는다. 그러면 다시 갑술(甲戌), 을해(乙亥) 하는 식으로 계속 조합되다 보면 10간이 6번 돌게 되어 60년 후 다시 갑자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10간이 6번만 돌므로 천간지지의 모든 문자가 조합될 수는 없고 천간에는 6개의 지지가 조합될 뿐이다. 그러니 천간의 갑(甲)과 지지의 축(丑)은 영원히 만날 수 없고 을(乙)과 자(子)도 마찬가지이다. 육갑도 만만하지 않은데 우리의 선조들 참으로 현학적이기도 했다. 육갑도 모자라 고갑자(古甲子)라 해서 옛 육갑을 사용하기도 했다.

갑(甲)은 알봉(閼逢), 을(乙)은 전몽(旃蒙), 병(丙)은 유조(柔兆), 정(丁)은 강어(强어(圉)), 무(戊)는 저옹(著雍), 기(己)는 도유(屠維), 경(庚)은 상장(上章), 신(辛)은 중광(重光), 임(壬)은 현익(玄䴬), 계(癸)는 소양(昭陽), 자(子)는 곤돈(困敦), 축(丑)은 적분약(赤奮若), 인(寅)은 섭제격(攝提格), 묘(卯)는 단알(單閼), 진(辰)은 집서(執徐), 사(巳)는 대황락(大荒落), 오(午)는 돈장(敦羘), 미(未)는 협흡(協洽), 신(申)은 군탄(灘), 유(酉)는 작악(作噩), 술(戌)은 엄무(閹茂), 해(亥)는 대연헌(大淵獻)이라 한다.

그러니 갑자는 알봉곤돈(閼逢困敦), 을축은 전몽적분약(削蒙赤奮若), 병인은 유조섭제격(柔兆攝提格)의 식으로 표기하는 사례가 많았다.

올해가 己卯년이니 기(己)는 도유(屠維),묘(卯)는 단알(單閼), 즉 屠維單閼인 셈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이래서 조상들은 한문 때문에 망했다는 소리를 들을 법하다. 새해 벽두부터 골치 아픈 얘기로 시작했나 보다. 토끼해를 맞아 민족의 명운이 새로 도래할 것과 우리 유문에도 상서로운 일이 많기를 기대해 본다.

                                                                             도산 류영렬 식


 
       

Next   문화류씨가정보 발 ........<1565> 편집인
Prev   문화류씨경신조서... ..<1740>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