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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백천공 류함 (柳涵)선생 묘갈명


                     백천공(涵)묘갈명
(百泉公(涵)墓碣銘)

   공의 휘(諱) 는 함(涵)이요, 자(字)는 자정(子淨)이요,성은 류씨(柳氏)니 문화(文化)에 계출하다. 시조 휘 차달(車達)은 고려(高麗) 때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공신 대승(大丞)이요,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휘 원현(元顯)이 계시어 검한성사(檢漢城事)요, 검한성사의 아들 휘 선(善)은 양근군사(楊根郡事)인데 태종대왕(太宗大王)의 갑계안(甲契案)에 참(叅)하니 공의 오대이상(五代以上)이요, 고조(高祖)는 휘 효진(孝眞)이니 파주목사(坡州牧使)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증조(曾祖)는 휘 옹(澭)이니 인천부사(仁川府使)요, 조(祖)는 휘 수언(秀漹)이니 양덕현감(陽德縣監)인데 아들이 없어 삼종제(三從弟) 부사 문옥(文沃)의 자(子) 덕용(德容)으로 위후(爲后)하니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병조참의(兵曹叅議)에 오르고 효(孝)로 정려(旌閭)하고 호(號)는 열역재(悦易齋)인데 만년에 화순(和順)에 거주하다가 몰함에 향인이 언동(彦洞)에 사우(祠宇)를 세워 향사하니 바로 공의 부친이요, 모친은 안동김씨(安東金氏)니 현감(縣監) 이(洢)의 따님이요, 중종조(中宗朝) 원종공신(原從功臣) 목사(牧使) 공망(公望)의 손(孫)이라.   선조(宣祖) 병자(丙子일오칠륙(一五七六)) 정월삼일(에 관동정사(舘洞精舍)에서 공(公)을 출생하니 공은 천성(天性)이 엄중(嚴重)하고 학식이 굉박(宏博)하여 동정(動靜)이 절도(節度)가 있고 희노(喜怒)를 나타내지 않았으며, 구질(九耋)의 양친(兩親)을 봉양(奉養)하되 지(志)와 체(體)의 양(養)을 구비하며 과거공부(科擧工夫)를 힘쓰지 않고 성리학(性理學)에 전심(專心)하여 이지봉수광(李芝峯晬光)과 정우복경세(鄭愚伏經世)와 허하곡봉(許荷谷葑)으로 더불어 도의로 교우하여 이기문답(理氣問答)과 사서설(四書說)이 있다. 임진란(壬辰亂)을 당하여 백형 홍(泓)이 백의(白衣)로 종사(從事)하여 평양(平壤)에서 순절(殉節)하니 향사(享祠)하고 계매(季妹) 최서생(崔瑞生)의 처가 사포(沙浦)에서 투사(投死)하니 정문(旌門)을 건립(建立)하다. 공(公)의 나이 겨우 약관(弱冠)에 참의공(叅議公)을 모시고 서암산중(瑞岩山中)에 우거(寓居)하여 천상(泉上)에 죽와(竹窩)를 건축(建築)하여 노년(老年)을 마칠 계획을 하고 호(號)를 백천재(百泉齋)라 하다. 정묘로변에 의병을 모집하고, 병자란을 당하여 족종 손 자의(諮議) 즙(楫)과 참봉(叅奉) 조수성(曺守誠)과 감역(監役) 조(曺) 엽(熀)과 처사(處士) 최명해(崔鳴海)로 더불어 창의(倡義)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리니 일순간(一旬間)에 의병이 수천인(數千人)이요, 양곡이 수백석에 이르러서 밤을 새워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다다를새 청주(清州)에 이르니 당시 이흥발(李興浡)이 적(賊)의 세력을 탐지하다가 포위되었거늘 공이 병사(兵士)에게 맹서(盟誓)하고 분력(奮力)하여 적괴(賊魁)를 목베고 병기(兵器)를 뺏았으니 적(賊)이 퇴각(退却)하거늘 곧 병졸(兵卒)을 이끌고 오십리(五十里)를 진격하였는데 구화(媾和)가 이루어짐을 듣고 북향통곡(北向痛哭)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돌아와 환산정(環山亭)을 구축하여 소요(逍遥)하고 음영(吟咏)하여 풍천(風泉)의 사(思)를 부치니 시(詩)에 이르기를 「엽상(葉上)에 춘추(春秋)는 갑자(甲子)를 망각(忘却)하고 심중(心中)에 일월(日月)은 황명(皇明)을 보전(保全)했도다」 하니 가히 공의 지기(志氣)를 말함이라.   공이 몰함에 후세 사람들이 그 묘에 대명처사(大明處士)라 쓰고 언동사(彦洞祠)에 배향(配享)하다. 시(詩)와 문(文)을 수습(收拾)하니 불에 탄 나머지 약간 편이 있으니 도산재(陶山齋)에 차박(次䪨)한 사시운(四時韻)과 일회(一悔) 삼외(三畏) 육권(六勸) 십계(十戒) 등(等) 시(詩)를 음미(吟味)하면 공(公)의 도(道)를 즐기고 천명(天命)을 알았음을 가히 상상(想像)할 수 있겠다. 숭정후삼십사년(崇禎後三十四年), 현종(顯宗) 신축(辛丑 一六六一))정월십팔일에 졸하니 향년이 팔십륙이라. 흑토치(黑土峙)에 처음에 장사하였다가 갑자에 구수동(九水洞) 묘향(卯向)의 언덕에 이장하여 공인(恭人) 창녕조씨(昌寧曺氏)와 부(祔)하다. 조씨(曺氏)는 도사(都事) 정곡(鼎谷) 대중(大中)의 따님이요, 병조판서(兵曹判書) 흡(恰)의 오세손(五世孫)이니 공(公)보다 이십칠년(二十七年) 먼저 인조갑술(仁祖甲戌一六三四))에 몰하니 연이 오십사세였다.   오남삼녀(五男三女)를 길렀으니 남은 지성(之性)과 지기(之起)와 지서(之瑞)와 지화(之和)와 지혜(之惠)요, 여(女)는 정(鄭) 직(稷)과 이(李) 파(坡)와 정광(鄭光) 형(亨)에게 출가하다. 극명(克明)과 원명(元明)과 동명(東明)은 지성(之性)의 소생(所生)이요, 유명(惟明)과 중명(重明)과 송대규(宋大奎)의 부인과 박수(朴洙)의 부인은 지기(之起)의 소생이요, 필명(必明)과 준명(峻明)과 진명(震明)과 창명(昌明)과 철명(哲明)과 양지익(梁之瀷)의 부인과 양석하(梁碩夏)의 부인과 윤지명(尹之鳴)의 부인은 지서(之瑞)의 소생이요, 태명(泰明)과 하명(夏明)과 재명(載明)과 박삼호(朴三豪)의 부인과 김운상(金運商)의 부인과 허(許) 서(緒)의 부인과 김성구(金誠九)의 부인(夫人)은 지화(之和)의 소생이요, 춘명(春明)과 우명(遇明)과 한명(漢明)과 이명규(李明奎)의 부인과 주익창(朱益昌)의 부인은 지혜(之惠)의 소생이요, 증현(曾玄)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   묘에 비가 있더니 오래되어 풍마우습(風磨雨濕)하여 알아 볼 수 없게 되니 공의 여러 후손들이 다시 비를 세울 것을 모의(謀議)하고 팔세손 락호씨(樂浩氏)와 진사(進士) 봉호씨(鳳浩氏)가 와서 명(銘)을 청하니 불녕(不佞)이 사양(辭讓)하다가 부득이 마음을 가다듬어 명(銘)을 지어 이르노니   충효(忠孝)와 절의(節義)를 겸한 자가 참으로 드물거늘.,   공(公)이 능히 가풍(家風)을 계승(繼承)하여 포위(布韋)로 혁혁(赫赫)했다.   이륜(彝倫)을 돈상(敦尙)하되 성품(性品)을 솔(率)함이 면려(勉勵)함이 없으니,   처사(處士)의 기풍이 산 같이 높고 물 같이 길도다.   (정향문(丁享文)에 왈(曰) 혁세재덕(奕世載德)으로 충효전가(忠孝傳家)하고 존주의려(尊周義旅)는 천추사광(千秋事光)이라 )

                              百泉柳公 _{涵}_ 墓碣銘

公諱涵字子淨姓柳氏系出文化始祖諱車達高麗統合三韓功臣大丞入我 朝有諱元顯檢漢城事是生諱善楊根郡事叅 太宗大王甲契案是爲公五代以上也高祖諱孝眞坡州牧使 錄佐翼原從功臣曾祖諱澭仁川府使祖諱秀漹陽德縣監無育以三從弟府使文沃子德容爲后以壽躋僉中樞兵曹叅議以孝旌閭號悦易齋晚居和順歿鄕人立祠彦洞以祀之寔公皇考也妣安東金氏縣監洢女 中宗朝原從功臣牧使公望孫也以 萬曆丙子正月三日生于舘洞精舍公天性嚴重學識宏博動靜有節喜怒不形養九耋嚴親志體備至不事擧業專心性理與李芝峰晬光鄭愚伏經世許荷谷篈爲道義交有理氣問答四書說當龍蛇之變伯兄泓以白衣從事殉節平壤而祠季妹崔瑞生妻投死沙浦而 (1554) 旌公年才弱冠奉叅議公寓居瑞嚴山中結竹窩於泉上爲終老計號百泉齋丁卯虜變募義値丙子亂與族從孫諮議楫曁叅奉曺守誠監役曺熀處士崔鳴海倡義馳檄列郡一旬間兵至數千人糧近數百石星夜赴南漢至清州時李興浡覘賊被圍公誓士奮力斬賊酋奪兵器賊乃退卽趣兵進五十里聞和事成北向痛哭罷義旅而還搆環山亭逍遙吟咏以寓風泉之思有詩曰葉上春秋忘甲子心中日月保皇明是可以蔽公之志矣及歿後人題其墓曰大明處士配于彦洞祠時文收拾燹後有若干編見次陶山齋四時詩韻及一悔三畏六勸十戒詩可想公樂道知命矣 崇禎後三十四年辛丑正月十八日卒享年八十六初葬黑土峙甲子遷厝于九水洞向卯之原恭人昌寧曺氏祔焉曺氏都事鼎谷大中女兵曹判書恰五世孫先公二十七年甲戌歿年五十四男五人女三人男曰之性之起之瑞之和之惠女適鄭稷李坡鄭光亨之性三男曰克明元明東明之起三男二女男曰惟明重明女適宋大奎朴洙之瑞五男三女男曰必明峻明震明昌明哲明女適梁之瀷梁碩夏尹之鳴之和三男四女男曰泰明夏明載明女適朴三豪金運商許緒金誠九之惠三男二女男曰春明遇明漢明女適李明奎朱益昌曾玄以下多不盡錄墓有碑記年久磨泐不可稽公諸孫更謀竪碣八世孫樂浩進士鳳浩甫來請銘不佞辭不獲謹爲之銘曰 忠孝節義兼之者希公能承家有赫布韋敦尙天經率性匪蘉處士之風山高水長 丁享文曰奕世載德忠孝傳家尊周義旅事光千秋 判書李嘉愚製                        通訓大夫行長興都護府使兼長興鎭兵馬僉節制使李鶴來謹撰    공(公)의 휘(諱)는 함(涵)이요, 자(字)는 자정(子淨)이요, 성(姓)은 류씨(柳氏)니 문화(文化)에 계출(系出)하다. 시조(始祖) 휘(諱) 차달(車達)은 고려(高麗) 때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공신(功臣) 대승(大丞)이요,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휘(諱) 원현(元顯)이 계시어 검한성사(檢漢城事)요, 검한성사(檢漢城事)의 아들 휘(諱) 선(善)은 양근군사(楊根郡事)인데 태종대왕(太宗大王)의 갑계안(甲契案)에 참(叅)하니 공(公)의 오대이상(五代以上)이요, 고조(高祖)는 휘(諱) 효진(孝眞)이니 파주목사(坡州牧使)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증조(曾祖)는 휘(諱) 옹(澭)이니 인천부사(仁川府使)요, 조(祖)는 휘(諱) 수언(秀漹)이니 양덕현감(陽德縣監)인데 아들이 없어 삼종제(三從弟) 부사(府使) 문옥(文沃)의 자(子) 덕용(德容)으로 후계를 삼으니(爲后)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병조참의(兵曹叅議)에 오르고 효(孝)로 정려(旌閭)하고 호(號)는 열역재(悦易齋)인데 만년(晚年)에 화순(和順)에 거주(居住)하다가 몰(歿)함에 향인(鄕人)이 (1555) 언동(彦洞)에 사우(祠宇)를 세워 향사(享祀)하니 바로 공(公)의 부친(父親)이요, 모친(母親)은 안동김씨(安東金氏)니 현감(縣監) 이(洢)의 따님이요, 중종조(中宗朝) 원종공신(原從功臣) 목사(牧使) 공망(公望)의 손(孫)이라.   선조(宣祖) 1576병자(一五七六(丙子) 정월삼일(正月三日)에 관동정사(舘洞精舍)에서 공을 출생(出生)하니 공(公)은 천성(天性)이 엄중(嚴重)하고 학식(學識)이 굉박(宏博)하여 동정(動靜)이 절도(節度)가 있고 희노(喜怒)를 나타내지 않았으며, 구십(九耋;구질)의 엄친(嚴親)을 봉양(奉養)하되 지(志)와 체(體)의 양(養)을 구비하며 과거공부(科擧工夫)를 힘쓰지 않고 성리학(性理學)에 전심(專心)하여 이지봉수광(李芝峯晬光)과 정우복경세(鄭愚伏經世)와 허하곡봉(許荷谷葑)으로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우(交友)하여 이기문답(理氣問答)과 사서설(四書說)이 있다. 임진란(壬辰亂)을 당(當)하여 백형(伯兄) 홍(泓)이 백의(白衣)로 종사(從事)하여 평양(平壤)에서 순절(殉節)하니 향사(享祠)하고 계매(季妹) 최서생(崔瑞生)의 처(妻)가 사포(沙浦)에서 투사(投死)하니 정문(旌門)을 건립하다. 공의 나이 겨우 약관에 참의공(叅議公)을 모시고 서암산중(瑞岩山中)에 우거(寓居)하여 천상(泉上)에 죽와(竹窩)를 건축(建築)하여 노년(老年)을 마칠 계획을 하고 호(號)를 백천재(百泉齋)라 하다. 정묘로변(丁卯虜變)에 의병(義兵)을 모집하고, 병자란(丙子亂)을 당하여 족종손(族從孫) 자의(諮議) 즙(楫)과 참봉(叅奉) 조수성(曺守誠)과 감역(監役) 조(曺) 엽(熀)과 처사(處士) 최명해(崔鳴海)로 더불어 창의(倡義)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리니 일순간(一旬間)에 의병(義兵)이 수천인(數千人)이요, 양곡(糧穀)이 수백석(數百石)에 이르러서 밤을 새워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다다를 새 청주(清州)에 이르니 당시 이흥발(李興浡)이 적(賊)의 세력(勢力)을 탐지(探知)하다가 포위(包圍)되었거늘 공(公)이 병사(兵士)에게 맹서(盟誓)하고 분력(奮力)하여 적괴(賊魁)를 목베고 병기(兵器)를 뺏았으니 적(賊)이 퇴각(退却)하거늘 곧 병졸(兵卒)을 이끌고 오십리(五十里)를 진격(進擊)하였는데 구화(媾和)가 이루어짐을 듣고 북향통곡(北向痛哭)하며 의병(義兵)을 해산(解散)하고 돌아와 환산정(環山亭)을 구축(搆築)하여 소요(逍遥)하고 음영(吟咏)하여 풍천(風泉)의 사(思)를 부치니 시(詩)에 이르기를 「엽상(葉上)에 춘추(春秋)는 갑자(甲子)를 망각(忘却)하고 심중(心中)에 일월(日月)은 황명(皇明)을 보전(保全)했도다」 하니 가히 공(公)의 지기(志氣)를 말함이라.   공(公)이 몰(歿)함에 후세 사람들이 그 묘에 대명처사(大明處士)라 쓰고 언동사(彦洞祠)에 배향하다. 시(詩)와 문(文)을 수습하니 불에 탄 나머지 약간 편이 있으니 도산재(陶山齋)에 차박( 次䪨)한 사시운(四時韻)과 일회(一悔) 삼외(三畏) 육권(六勸) 십계(十戒) 등(等) 시(詩)를 음미(吟味)하면 공(公)의 도(道)를 즐기고 천명(天命)을 알았음을 가히 상상(想像)할 수 있겠다. 숭정후 삼십사년(崇禎後三十四年), 1661현종(顯宗) 신축(一六六一辛丑) 정월십팔일(正月十八日)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팔십륙(八十六)이라. 흑토치(黑土峙)에 처음에 장(葬)하였다가 갑자(甲子)에 구수동(九水洞) 묘향(卯向)의 언덕에 이장(移葬)하여 공인(恭人) 창녕조씨(昌寧曺氏)와 부(祔)하다. 조씨(曺氏)는 도사(都事) 정곡(鼎谷) 대중(大中)의 따님이요, 병조판서(兵曹判書) 흡(恰)의 오세손(五世孫)이니 공(公)보다 이십칠년(二十七年) 먼저 인조갑술(仁祖甲戌)(일륙삼사(一六三四))에 몰(歿)하니 연(年)이 오십사(五十四)세였다.   오남삼녀(五男三女)를 길렀으니 남(男)은 지성(之性)과 지기(之起)와 지서(之瑞)와 지화(之和)와 지혜(之惠)요,여(女)는 정(鄭) 직(稷)과 이(李) 파(坡)와 정광(鄭光) (556) 형(亨)에게 출가(出嫁)하다. 극명(克明)과 원명(元明)과 동명(東明)은 지성(之性)의 소생(所生)이요,유명(惟明)과 중명(重明)과 송대규(宋大奎)의 부인(夫人)과 박수(朴洙)의 부인(夫人)은 지기(之起)의 소생(所生)이요,필명(必明)과 준명(峻明)과 진명(震明)과 창명(昌明)과 철명(哲明)과 양지익(梁之瀷)의 부인(夫人)과 양석하(梁碩夏)의 부인(夫人)과 윤지명(尹之鳴)의 부인(夫人)은 지서(之瑞)의 소생(所生)이요,태명(泰明)과 하명(夏明)과 재명(載明)과 박삼호(朴三豪)의 부인(夫人)과 김운상(金運商)의 부인(夫人)과 허(許) 서(緒)의 부인(夫人)과 김성구(金誠九)의 부인(夫人)은 지화(之和)의 소생(所生)이요, 춘명(春明)과 우명(遇明)과 한명(漢明)과 이명규(李明奎)의 부인(夫人)과 주익창(朱益昌)의 부인(夫人)은 지혜(之惠)의 소생(所生)이요, 증현(曾玄) 이하(以下)는 많아서 다 기록(記錄)할 수 없다.   묘(墓)에 비(碑)가 있더니 오래되어 풍마우습(風磨雨濕)하여 알아 볼 수 없게 되니 공(公)의 여러 후손들이 다시 비(碑)를 세울 것을 모의(謀議)하고 팔세손(八世孫) 락호씨(樂浩氏)와 진사(進士) 봉호씨(鳳浩氏)가 와서 명(銘)을 청(請)하니 불녕(不佞)이 사양(辭讓)하다가 부득이 마음을 가다듬어 명(銘)을 지어 이르노니
충효와 절의가 겸전한분으로 드물게도 공은 가풍을 잘 숭상하고 선비의 도를(布韋)의 영광을 있게 하였고 하늘의도를 숭상하여 천성을 맑게하여 처사의 풍도를 지킴이 산의 높음과(산고)와 물의 유유함(水長)같았다.

정향문에 이르기를 「세상을 아름답게 덕을 펴시고 충효를 가문에 전승하였고 주역을 존숭하며 의여를 일으킨 일이 천추에 빛나도다.」판서 이가우는 짓노라 하였다

 (주;포위布韋;布衣韋帶의준말;蘇軾글-..襲布韋而自薦....而布韋是纓..=갓끈=선비)

  率性匪蘉(송성비망匪蘉=*멍하지 않다.*망연하지 않하다. 성품을 다슬리어 맑게하다.)

 

 

--------------------------------------------도산 류영렬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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