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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승지공(인철)행장 (承旨公(寅哲)行狀) 354

승지공(인철)행장

承旨公(寅哲)行狀

 

  공(公)의 휘는 인철(寅哲)이요, 자(字)는 인서(仁瑞)요, 호(號)는 금당(錦塘)이다. 류씨(柳氏)는 문화인(文化人)으로 고려(高麗) 삼한(三韓) 벽상공신(壁上功臣) 휘 차달(車達)을 시조(始祖)로 하여 이로부터 벼슬이 대대로 이어지고 학문이 서로 전하였으니 참지정사(叅知政事) 시(諡) 문간공(文簡公) 휘 공권(公權)은 도덕(道德)과 문장으로 세상에 들리었고, 태학사(太學士) 시(諡) 문정공(文正公) 휘 경(璥)은 권간(權奸)을 제거하여 정사를 왕실에 회복하였고, 첨의참리(僉議叅理) 시(諡) 정신공(貞愼公) 휘 승(陞)은 효행이 뛰어나 국사에 나타났고, 찬성사(贊成事) 시녕군(始寧君) 시(諡) 장경공(章敬公) 휘 돈(墩)은 강직(剛直)으로 정령(政令)을 쇄신하였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좌의정(左議政) 휘 만수(曼殊)는 개국훈(開國勳)에 책록되고, 좌참찬(左叅贊) 휘 수(洙)는 정난(靖難)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문성군(文城君)에 책록(策錄)되 (998) 고 시호(諡號)는 안양공(安襄公)이며, 수대를 전하여 휘 호인(好仁)은 예빈경(禮賓卿)에 이르니 이는 공의 팔세(八世) 이상이다. 고조(高祖)는 휘 천우(天佑)요, 증조(曾祖)는 휘해균(海均)이니 성품(性稟)이 순실강직함으로 사우(士友)의 추중하는바 되었고 조고(祖考)는 휘 흥추(興鄒)요, 선고(先考)는 휘 건영(建永)이니 효행이 뛰어나 사림에서 정장(呈狀)하여 포전(褒典)을 청하였으며, 비(妣)는 부안림씨(扶安林氏)니 사인 희진(希震)의 따님으로 공조전서(工曹典書) 난수(蘭秀)의 후손인데 철종(哲宗) 5년 1854 갑인(甲寅) 2월9일에 공을 출생하였다.   공은 용모가 뛰어나고 재주가 영특하여 오세(五歲)에 파산(杷山) 홍공인섭(洪公寅燮)에게서 공부하였는데 과정의 독촉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힘써 글재주가 날로 진취하더니 나이 약관(弱冠)에 고산(鼓山) 임문경공(任文敬公)을 배알(拜謁)하니 문경공(文敬公)이 한번 보시고 원대한 인물로 인정하셨다. 가훈으로 과거 공부를 닦아 육체(六軆)에 능통하여 세상에 들리더니 1890 경인(庚寅)에 별시(别試) 문과에 발탁되어 선온(宣醞)을 사례하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하던 날 선부인(先夫人)께서 이미 돌아가셔 뵈옵지 못함으로 현연히 눈물을 흘리었다. 1891 신묘(辛卯)에 천거로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더니 얼마 후 기주관(記注官)으로 옮기었다. 1897 정유(丁酉)에 부친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제에 지나치고 기일을 만나면 애통하기를 초상 때 같이 하였다.   1900 경자(庚子) 8월에 비서원랑(秘書院郞)에 임명되고 이어 옥당(玉堂)에 선입되어 시독(侍讀)을 배명하였다. 홍릉(洪陵) 기신대제(忌辰大祭)에 대축(大祝)으로 육품(六品)에 승진하였는데 종묘(宗廟) 동향대제(冬享大祭)에 제관(祭官) 중에 실례하는 이가 있음으로 주상이 진노(震怒)하시어 물으시기를 『대축(大祝) 류모(柳某)가 어떻게 거행하였는가?』하시었다. 승지가 아뢰기를 『대축(大祝)은 예절을 알고 공경을 다하여 잘 하였습니다.』 하니 상께서 이르되 『류모(柳某)는 본디 단아(端雅)한 사람이라.』 하시고 진노(震怒)를 풀었으니 천포(天褒)가 이토록 보통에 뛰어났었다. 1901 신축(辛丑)에 정원(政院)의 사기(史記)를 수정(修正)하는 역사를 명하심에 여섯달만에 일을 마쳐 사책을 올리니 보시고 상께서 잘 하였다고 칭찬하시고 포상을 더 중히 하셨다. 만수성절(萬壽聖節) 내진연(內進宴)에 시를 지어 올리니 종친(宗親)과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입시(入侍)하여 문안후(問安後)에 아뢰기를 『비서랑(秘書郞) 신(臣) 류모(柳某)는 여사(旅仕)한지 지금 이미 2년 남짓 되었습니다. 이 흉년을 당하여 사정이 긴박함이 있다 하오니 의원면관(依願免官)하여 사분(私分)을 편안케 함이 어떠하올지 감히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여 이르시되 『마땅히 환가(還家)할 날이 있을 것이다.』 하시고 윤허하지 않으셨다. 다섯번 옥당(玉堂)에 전직(轉職)하고 아홉번 비서랑(秘書郞)에 벼슬을 옮겼는데 일심봉공(一心奉公)하여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999)   1902 임인(壬寅) 3월에 특별히 무주(茂朱) 적상산성(赤裳山城)의 사고(史庫) 폭쇄(曝曬)(일광욕(日光浴))의 명을 받고 종정원주사(宗正院主事)를 겸임(兼任)하였으니 작동(昨冬)에 마땅히 환가할 날이 있으리라 하신 하교가 진실로 이런 성의(聖意)이셨다. 산성(山城)에 도착하여 즉일(卽日)로 서주(書奏)하기를 『신(臣)이 선원각(璿源閣)에 나아가 석실(石室)의 비장(秘藏)을 봉심(奉審)한즉 양각(兩閣)이 위에서 새고 아래로 젖어서 누헌(樓軒)이 썩어 상하고 판목(板木)이 퇴락(頽落)하였으며, 유둔(油屯)이 부패하여 손이 닿는 대로 찢어지고 궤자(櫃子)가 파쇄(破碎)하여 과연 이동하기 어려우니 다만 스스로 황송하온바 어찌 하오리까?』 하니 비답(批答)에 이르되 『양각(兩閣)이 이러함은 반드시 이미 오래되었을 것인데 전에 갔던 사관(史官)이 어찌 일언이 없었던가? 본군 군수(郡守)로 하여금 모든 역사를 감동토록 하여 수리(修理)하고 환안(還安)한 후에 올라 오도록하라.』하시고 전문(錢文) 십만량(十萬兩)을 내리셨다. 열달만에야 역사를 마치고 환안(還安)한 후에 돌아와 복명하기를 역사를 마치고 역비금(役費金) 사만량(四萬兩)이 남아 본관(本官)에게 맡겨두었다고 사실을 아뢰니 주상께서 희색(喜色)이 있으시고, 가상히 여기셨다. 심상공(沈相公) 순택(舜澤)과 조상공(趙相公) 병세가 공의 충근(忠勤) 정렴(正廉)함을 듣고 서로 더불어 청백리(淸白吏)라고 칭탄하였다. 11월에 비서랑(秘書郞)에 임명되고 주상께서 등극하신지 40년을 경하하는 외진연(外進宴)에 시를 지어 바쳤다. 1903 계묘(癸卯)에 황태자(皇太子) 탄신(誕辰)으로 축하를 받을 때에 선전관(宣箋官)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여 비서원승(秘書院丞) 겸(兼) 장례원장례(掌禮院掌禮)를 배명하고 황명(皇命)을 출납하는데 힘껏 충성을 다 하였다.   세도 날로 변(變)하고 환정(宦情)이 더욱 박(薄)하여지니 마침내 도맥산(道脉山) 아래로 돌아와 자취를 감추고 자수하면서 날마다 중씨(仲氏) 계씨로 더불어 훈지(塤篪)를 질창(迭唱)하며 잠락(湛樂)이 순지하였다. 수간(數間)의 정자(亭子)를 새로 지어 일간정(一艮亭)이라 이름 하였으니 일간(一艮)의 뜻은 오직 도맥산(道脉山)에 있었으니 혹 고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을 맞이하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지어 회포(懷抱)를 풀며 여년을 보내었다. 1910 경술(庚戌) 가을에 조정에 있는 옛 친구들이 가자(加資) 직함(職啣)을 쓰기를 권고하니 공이 사례(謝禮)하며 이르되 『지금 같은 세상에 통정(通政)도 이미 극히 천한데 가선(嘉善)이 무엇이 영귀함이 있겠는가?』 하고 끝내 듣지 않았다. 대개 공은 나갈 줄 알고 물러날 줄 알며 나가나 물러나나 또한 영욕을 근심하고 이의를 분별함이 밝았다. 제우(儕友)간에 은혜와 신의가 두루 원만하여 일찌기 남릉(柟陵) 승지(承旨) 심공구택(沈公九澤)과 정계(情契)가 신독(信篤)하였는데 심공(沈公)이 자기 아들 상협(相莢)을 글을 가르쳐 달라고 공에게 부탁하였다. 이에 은의를 두루 베풀어 가르치고 원근(遠近)에서 와서 배우는 자들을 각기 그 재량에 따라 독실히 가르치니 (1000) 성취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심공(沈公)으로 더불어 금강산(金剛山)을 유람(遊覽)하고 동유록(東遊錄) 일권(一卷)을 편성(編成)하고 유고(遺稿) 몇권이 있어 집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1926 병인(丙寅) 가을에 풍병(風病)이 갑자기 생겨 14년이나 오래 끌더니 병환이 위독하심에 이르러「착한 일은 작아도 행하고 악한 일은 작아도 하지 말라.」는 구절을 세번 반복하여 이르시되 『이는 소렬황제(昭烈皇帝)가 후주(後主)를 경계함이니 너희들은 일찌기 이 글을 읽었느냐 읽지 않았느냐?』하셨다. 공께서 평일에 선과 악을 밝게 분별하여 자손에게 유계(遺戒)하심을 가히 보겠도다. 순종(純宗) 후(後) 1937 정축(丁丑) 10일월30일에 고종(考終)하시니 수가 84세로, 익년(翌年) 3월에 연기군(燕岐郡) 서면(西面) 용암리(龍岩里) 위양곡(渭陽谷) 유좌원(酉坐原)에 안장(安葬)하였다.   배위(配位)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용의(用義)의 따님으로 송재(松齋) 충의 후손인데 어질고 또한 덕이 있어 구고(舅姑)를 효성으로 봉양하고 부군의 뜻을 승순(承順)하니 향리에서 다 여사라 일컬었으며 묘는 합부하였다. 이남일녀를 낳으셨으니 성렬(星烈)과 경렬(景烈)이요, 여(女)는 파평(坡平) 윤상영(尹相穎)에게 출가하였다. 성렬의 남(男)은 지학(志學) 지만(志萬) 지찬(志纘)이요, 여(女)는 창녕(昌寧) 성락현(成樂顯) 진주(晋州) 강형선(姜亨善)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며, 경렬의 남(男)은 지승(志承) 지형(志衡) 지웅(志雄)이요, 여(女)는 장수(長水) 황필연(黃弼淵)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어려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공은 충효를 천성으로 타고나 들어와서는 어버이를 섬김에 지체를 갖추어 봉양하고 나가서는 임금을 섬김에 충의를 함께 다하였다. 한번 천양이 번복한 후로부터는 원통함을 먹음고 황황(惶惶)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도무지 살 뜻이 없는 것 같았다.   때로 혹 높은 산에 오르면 북망(北望) 통곡하며 몸둘 바를 알지 못하였으니 공은 가히 충심으로 한결같이 임금을 사모했다고 이르겠도다. 그러나 마침내 삼품의 관직으로 마치고 세상에 뜻을 크게 펴지 못하셨으니 시세인가? 운명인가? 만일 시세(時勢)라면 나라에서 가히 공을 쓰지 않았을 것이요, 만약 운명이라면 하늘이 가히 공을 내지 않았을 터인데 어찌 쓰면서 널리 베풀도록 지위를 주지 않았는가? 공은 민망한 바 없었으나 공을 아는 자는 어찌 차석(嗟惜)하지 않으리요?   공의 재종제(再從弟) 인설(寅卨)이 공의 사행을 기록하여 나의 종질(宗姪) 상협(相莢)과 함께 와서 나에게 행장을 부탁하니 내가 혼모하여 여러번 사양하다가 그 형을 위하여 영원히 전하고자 하는 성의와 스승을 위하여 천양하는 뜻에 감동하고 또 나와 한 조정에 있었던 감회가 있어 대강을 우와 같이 찬차하노라. (1001)

통정대부규장각원임직각시강원시독관청송침주택찬

 

承旨柳公寅哲行狀

 

公諱寅哲字仁瑞號錦塘柳氏文化人高麗三韓壁上功臣諱車達爲肇祖自是圭組世襲詩禮相傳而若叅知政事諡文簡諱公權道德文章聞於世太學士諡文正諱璥誅除權奸復政王室僉議叅理諡貞愼諱陞孝行卓犖著于國乘贊成始寧君諡章敬諱墩以剛直刷新政令入 本朝左議政諱曼殊錄開國勳左叅贊諱洙錄靖難佐理勳文城君諡安襄屢傳至諱好仁禮賓侍郞寔公八世以上高祖諱天佑曾祖諱海均性慤爲士友所推重祖諱興鄒考諱建永孝行卓異士林呈狀請褒妣扶安林氏士人希震之女工曹典書蘭秀后以 哲宗甲寅二月九日生公容儀岐嶷才慧穎敏五歲受學于杷山洪公寅燮不待督課而自勵文藝日就年弱冠拜鼓山任文敬公文敬一見稱許遠大以家訓修公車業六體贍富聞於世庚寅擢别試文科宣醞謝 恩榮歸之日先夫人未及見泫然流涕辛卯薦爲槐院權知副正字遷記注官丁酉丁外憂毀瘠踰制遇忌日哀如始喪庚子八月任秘書院郞選入玉堂拜侍讀 洪陵忌辰大祭以大祝陞六品 宗廟冬享大祭祭官有失禮者 上震怒下詢曰大祝柳某何以擧行承旨奏曰大祝知禮致敬善爲之 上曰柳某素是端雅人也乃解之天褒至此逈出尋常辛丑命政院史記修正之役至六朔竣功史冊奉進乙覽 上稱善褒賞益重 萬壽聖節內進宴賡進詩宗親文武百官入侍問安後仍奏曰秘書郞臣柳某旅仕今旣二週歲餘當此歉荒私情有悶迫依願免官以安私分何如敢奏 下敎曰當有還家之日不允五轉玉堂九遷秘書郞一心奉公夙夜靡懈壬寅三月特蒙茂朱赤裳山城史庫曝曬之 命兼任宗正院主事昨冬當有還家日之敎良以此 聖意也馳到山城卽日書奏曰臣詣璿源閣石室秘藏奉審則兩閣上漏下濕樓軒朽傷板木退落油屯腐敗觸手以裂櫃子破碎果難移動只自惶悚何以爲之 批曰兩閣如此者必已久前去史官何以無一言乎使該郡守監董諸役修理還安後上來劃下錢文十萬兩至十朔竣役還安後復 命訖仍奏役費金四萬兩餘在任寘本官事 上有喜色嘉尙焉沈相公舜澤趙相公秉世聞公忠勤正廉相與稱歎以淸白吏十一月任秘書 (997) 院郞 御極四十年稱慶外進宴賡進詩癸卯 皇太子誕辰受賀時以宣箋官陞通政拜秘書院丞兼掌禮院掌禮出納皇命竭力盡忠世道日變宦情益薄乃還道脉山下屛迹自守日與仲季塤篪迭唱湛樂純至新建數間一艮亭一艮之意惟在於道山或邀雅趣人酣觴賦詩以爲遣懷庚戌秋在朝舊僚勸書以加資公謝曰如今世通政已極賤矣嘉善有何榮貴乎終不聽盖公知進知退進退亦憂榮辱辨利義明矣儕友恩信周洽嘗於柟陵承旨沈公九澤情契信篤託允相莢受益恩義徧深遠近來學者各因其材而篤焉多有成就者從與沈公遊金剛編成東遊錄一卷有遺稿若干卷藏于家丙寅秋風祟闖發彌留十四年之久至病革三復勿以善小而不爲勿以惡小而爲之之句曰此昭烈之戒後主也汝曹嘗讀此否公平日善惡明辨以爲子孫遺戒可見也 純宗後丁丑十一月三十日考終壽八十四翌年三月葬于燕岐郡西面龍岩里渭陽谷酉坐原配淸州韓氏用義女松齋忠后賢且有德孝奉舅姑承順君子鄕里咸稱女士也墓祔生二男一女曰星烈景烈女坡平尹相穎星烈男志學志萬志纘女昌寧成樂顯晋州姜亨善景烈男志承志衡志雄女長水黃弼淵餘幼不盡錄嗚呼公忠孝根天入以事親志體備養出以事君忠義俱盡一自天壤翻覆忍痛含寃惶惶焉如有從而不及頓無生意而時或登臨則北望痛哭不知措身之所而公可謂丹心一葵也然竟以三品終焉不得大展於世時耶命歟如曰時則國可以不用公若曰命則天可而不生公奈之何用而不博施以不位耶公無所悶抑知公者豈不嗟惜也哉公再從弟寅卨錄公事行與鄙宗姪相莢屬余爲之狀余以昏耗屢辭感其爲兄不朽之誠爲師闡揚之 意且余有同朝之感撰次梗槩如右

通政大夫奎章閣原任直閣侍講院侍讀官靑松沈周澤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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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360  환산정중건상랑문 (環山亭上梁文)     편집인 2012/12/23  [674]  
359  병조참의 (류효진)묘갈명(延安都護府使柳孝眞墓碣銘)     편집인 2012/12/21  [837]  
358  문화류씨황산세천기     편집인 2012/12/19  [816]  
357  문화류씨망덕세천기 (文化柳氏望德世阡記)     편집인 2012/12/18  [714]  
356  증병조참판 이의재 류홍선생 기적비     편집인 2012/12/18  [679]  
355  의병장백천류함선생창의비 비문(義兵將百泉柳涵先生倡義碑文)     편집인 2012/12/18  [875]  
354  문화류씨유래비(대전안영공원) (文化柳氏由來碑(大田安永公園) ) 362     편집인 2012/11/30  [748]  
353  선세약사(한국성씨총감) (先世略事(韓國姓氏總鑑)) 361     편집인 2012/11/30  [946]  
352  항일독립투사류지명약사 (抗日獨立鬪士(柳志明)略事) 360     편집인 2012/11/30  [608]  
351  항일독립투사(류동열)약사 (抗日獨立鬪士柳東說)略事) 359     편집인 2012/11/30  [695]  
350  항일독립투사류상렬약사 (抗日獨立鬪士(柳相烈)略事) 358     편집인 2012/11/30  [591]  
349  전라우수사공(인환)약사 (全羅右水使公(寅煥)略事) 357     편집인 2012/11/30  [703]  
348  전라병사공(인협)약사 (全羅兵使公(寅協)略事) 356     편집인 2012/11/30  [620]  
347  무산공(인휘)묘표 (茂山公(寅徽)墓表) 355     편집인 2012/11/30  [700]  
 승지공(인철)행장 (承旨公(寅哲)行狀) 354     편집인 2012/11/30  [788]  
345  마전공(봉명)약사 (麻田公(鳳鳴)略事) 353     편집인 2012/11/30  [795]  
344  삼수공(이주)묘표 (三水公(爾주)墓表) 352     편집인 2012/11/30  [765]  
343  석전공(건영)묘갈명 (石田公(健永)墓碣銘) 351     편집인 2012/11/30  [723]  
342  통상공(기상)약사 (統相公(基常)略事) 350     편집인 2012/11/30  [623]  
341  용서공(기일)묘표 (龍西公(基一)墓表) 349     편집인 2012/11/30  [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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