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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증숭정대부의정부우찬성행통훈대부사헌부감찰서산류선생 신도비명 150


증숭정대부의정부우찬성행통훈대부사헌부감찰서산류선생

신도비명

贈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行通訓大夫司憲府監察西山柳先生

神道碑銘

 

  깊이 생각건대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동방(東方)의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으로 예절과 아악을 제작하시고, 유학과 도의를 숭앙하고 중히 여기시어 일시의 인재를 양성하시었다.   이에 충성과 신의가 뛰어난 인재와 도덕과 문학이 훌륭한 선비가 구름과 안개처럼 일어나 조야에 널리 포렬(布列)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도와 이루었다. 2대를 전하여 단종(端宗)의 손위(遜位)를 당하여 앞서 세종의 지우(知遇)에 감격한 신하들이 단종에게 충성을 다하여 섬기다가 손위에 이르러 천승의 위엄과 정확의 형벌에도 능히 항거하여 지체를 찢기고 친족이 몰살을 당함에도 깨끗이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혹은 벼슬을 버리고 산과 바다로 달아나 미친 듯이 노래 부르고 통곡하면서도 몸을 마치도록 후회하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일컫는 사륙신(死六臣)과 생륙신(生六臣)이 곧 이 분들이다.   아아! 대성인(大聖人) 세종께서 인재를 양성하신 공(功)이 30년이 지난 뒤에 효과를 거둠이 응당 북채로 북을 치듯 빨라, 이로써 천지가 태평해지고 일월이 명랑해지는 한편, 인물이 낳아 육성(育成)됨과, 사직이 길게 존속됨이 이에 힘입었으니 그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서산류선생(西山柳先生)과 같은 분은 더욱 특이함이 있는 바, 생륙신의 마음으로 재덕을 감추고, 행적을 숨기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으니, 선생의 처신은 자못 주역(周易)에 이른 바 「악을 싫어함이 결연하여 중도를 행하니 허물이 없다.」함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휘는 자미(自湄)로 문화인(文化人)이다.   시조(始祖) 휘 차달(車達)은 여조(麗朝)를 돕는데 공(功)이 있어 관직이 대승(大丞)이었고, 그 후로 문간공(文簡公) 휘 공권(公權), 문정공(文正公) 휘 경(璥), 정신공(貞愼公) 휘 승(陞), 장경공(章敬公) 휘 돈(墩)을 지나 본조에 이르러 휘 만수(曼殊)가 계시어 관직이 좌상이니 곧 선생의 증조(曾祖)이다. 조(祖)는 휘 원지(原之)이니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증리조판서(贈吏曹判書)이고, 고(考)는 휘 함(浛)이니 현감(縣監)으로 증판서(贈判書)이며, 비(妣)는 충주최씨(忠州崔氏)로 참찬(參贊) 염(濂)의 따님이다.   선생께서 경태(景泰) 1451 신미(辛未)에 문과에 오르니 곧 문종(文宗) 원년으로 지낸 관직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었다.   과거에 오른지 5년만인 서기1455 을해(乙亥)에 단종(端宗)이 손위함에 선생은 스스로 세신(世臣)으로서 구주(舊主)를 차마 져버릴 수 없다 하여 몸을 바쳐 순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여러 아들들이 울면서 만류하므로 마침내 해주(海州) 수양산(首陽山)의 신광사(神光寺)로 자취를 감추어 머리를 깎고 치의(緇衣)를 입고 이곳에 머물렀다.   이 때 둘째 아들 대교(待敎) 지(輊)가 따르고자 하니, 선생은 허락치 않고 이르기를 「나는 비록 스스로 세상을 버렸으나, 너는 어찌 나와 거취를 함께 하겠느냐?」 하였다. 그 후로 지(輊)가 매양 근친을 청할 때면 임금에게 문득 아뢰기를 「신의 부친이 심질을 얻어 산수 사이를 방랑하고 있나이다.」하였다.   당시 육신(六臣)이 참혹한 화를 당했는데 선생은 류공성원(柳公誠源)과는 바로 면복한 근친 형제간이었고, 또한 긍지가 남달랐던 때문에 지(輊)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 감히 바르게 말을 하지 못하고 병환이 계시다고 핑계하였다고 한다.   성선생삼문(成先生三問)의 온 집안이 화를 당하던 때에 성공의 아들 중에 일녀가 있어 강보에 싸여 있었다. 선생께서 몰래 안고 가서 수양산(首陽山) 아래에 두고 그 여비 중에 충직근실한 자를 가려 젖을 먹여 키우도록 하고, 직접 왕래하면서 보살피고 옷과 양식을 계속 대주며 어렵게 기르더니, 장성함에 이르러 그 일곱째 아들 집으로 하여금 장가들도록 하여 며느리를 삼았다.   선생께서 또 양주(楊州)의 서산(西山)으로 옮겨 살았으니 전후로 오로지 수양산(首陽山)과 서산으로 들어간 것은 그 의의가 우연치 않은 것이다.   선생께서 이미 늙어 여러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사찰에 자취를 숨긴 것은 그 도를 즐겨서가 아니니, 내가 죽거든 다비(茶毗)를 하지 말라, 그리고 내가 임금을 위하여 능히 죽지 못했으니 나를 선인 묘소 곁에 장사하지 말 것이며, 또 나의 본직만을 쓸 뿐 너희들로 인한 추은의 관직은 쓰지 말라.」하셨는데, 돌아가심에 이르러 여러 아들들이 감히 그 명을 어기지 않았다.   선생께서 영특한 자질과 탁월한 식견으로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삼사(三司)를 거쳤으니, 의견을 임금께 아뢸 즈음의 언론과 문장이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었을 것인데 병란을 겪은 나머지 하나도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그 쓸쓸한 시 수십수만이 자손의 건연(巾衍)에 간직되어 있다. 내가 일찍이 읽어 보니 막힘없이 툭 트여 후련하면서도 깊은 울분과 슬픈 뜻이 드러난 바, 백세 후에라도 오히려 그 사람됨을 족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선생의 묘소가 양주(楊州)의 한동(漢洞)에 있었으나 오랫동안 그 소재를 잃었더니 숙종(肅宗) 서기1681 신유(辛酉)에 후손 세정(世鼎)이 편석을 묘소 앞에서 발견했는데 감찰(監察) 류자미(柳自湄)라 새겨진 글씨를 완연히 읽을 수 있었다. 드디어 사방으로 서로 알림에 자손들이 앞뒤로 찾아와 봉축하였다.   영조(英祖) 1729 기유(己酉)에 세주(世冑)가 도암(陶菴) 이문정공(李文正公)(이(李) 재(縡))에게 갈문(碣文)을 청하여 비를 세웠다.   정조(正祖) 1784 갑진(甲辰)에 양주(楊州) 사림들이 수차 상소로서 동군(同郡) 청절사(淸節祠)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며, 후에 양산(梁山) 칠현사(七賢祠)에 제향(躋享)되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진주류씨(晋州柳氏)로 현감(縣監) 전(瑱)의 따님이다.   남은 7인이니, 맏이 윤(輪)은 현령(縣令)이요, 다음 지(輊)는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문양군(文陽君)에 봉(封)하고 숭정대부(崇政大夫) 우찬성(右贊成)으로 시호(諡號)는 평간(平簡)이요, 다음 진(軫)은 부사(府使)요, 다음 헌(軒)은 사과(司果)요, 다음 원(轅)은 현감(縣監)이요, 다음 보(輔)는 직장(直長)이요, 다음 집(輯)은 정랑(正郞)이며, 여는 2인이니 맏이는 도사(都事) 파평(坡平) 윤구령(尹龜齡)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도사 연안(延安) 김(金) 찬(巑)에게 출가하였다. 손과 증손이 크게 번성하여 능히 다 기록할 수 없다. 충효와 의렬, 문학과 재식이 뛰어난 선비가 대대로 그치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칭송하는 바를 분명히 증험하여 알 수 있겠다. 이는 선생께서 윤기를 세운 대절과 음덕을 쌓은 여경으로 마땅히 자손이 크게 번창함인바 하늘에서 내린 보답이 이처럼 두터움이 아니겠는가?   처음에 여러 아들들이 선생의 유계(遺戒)를 좇아 추은의 증직을 쓰지 않고, 묘도에 비석도 세우지 않았더니, 그 후로 자손이 미약하여 크게 떨치지 못함으로서 마침내 묘소마저 잃어버렸다. 후에 비록 비갈을 발견, 묘소를 찾아 개수하였으나 또 앞으로 수백년이 지날진대 후손들이 생각하기를 세상 일이 다단하여 묘도에 뚜렷이 새긴 큰 비가 없으면 또 예전과 같이 실전할까 두렵게 여기고, 이에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돌을 다듬어 비를 세우고자 나에게 와서 비명을 지어 달라 청하였다.   종규(宗圭)가 어리석고 또한 늦게 태어난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를 감당하겠는가? 더욱이 선생의 절의와 심사는 도암선생(陶菴先生)께서 이미 묘갈에 드러내 밝히셨고, 또 이름난 재상과 큰 선비들이 드러나게 기술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고 많으니 내 어찌 감히 그 사이에 한마디를 부치겠는가? 다만 글을 청함이 매우 간절하여 수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을 얻지 못하고, 은근히 이름 붙임을 영광으로 여겨 이에 감히 본말을 차례대로 적고, 또 이어 명을 지어 명에 이르노니,  
 천성으로 타고난 성품 인과 의일 따름이었으니, 
 
 인의의 행함은 임금과 어버이로부터 비롯하였도다. 
 
 신하로서 임금 섬김이 시종(始終) 한결 같았으니, 
 이욕(利慾)에 유혹되지 않고 위세에 두려워하지 않았도다.  
 의리가 있는 곳이면 용감히 곧바로 나아갔으니, 
 
 이를 누가 시켰겠는가? 천성이 그러했도다. 
 
 위대하신 선생이여! 외로운 충이요 뛰어난 절이거니, 
 
 단종(端宗)과 세조(世祖)가 갈릴 즈음, 국운이 위태했도다. 
 
 옛 임금을 차마 저버리겠는가? 그 뜻이 편치 못했거니,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피하여 평생동안 스스로 의를 지켰도다. 
 
 수양산(首陽山) 절간에서 치의로 몸을 가리웠고, 
 
 서산(西山) 산마루에서 고사리를 캐어 제사 지냈도다. 
 
 여러 아들에게 유계하되, 임금 위해 죽지 못했으니, 
 
 추은의 관직을 쓰지 말고, 선영(先塋) 곁에 부장(祔葬)하지 말라. 
 
 재능(才能)을 감추고 방랑하기 전후로 8년이었으니, 
 
 한결같은 마음 물과 같아 실로 천성을 온전히 하였도다.   
 
 자폐함이 권도에 합당하고 몸은 궁했으나 도는 형통했거니, 
 
 수백년을 지나서야 감춰진 사실이 다시 밝혀졌도다. 
 
 임금의 비답(批答)과 장릉(莊陵)의 능지(陵誌) 등 책에 빛나고, 
 
 청절사(淸節祠)에 배향을 청하는 등, 사림(士林)의 공론이
활발했도다.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충신 효자가 났으니, 
 
 선을 쌓은 남은 경사(慶事) 천리에 어긋지지 않도다. 
 
 옛말에 이르기를 밝은 천리는 천추(千秋)에 반드시 순환한다 했거니, 
 
 충성을 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힘쓸 바를 알지어다. 
 
 한동(漢洞)의 언덕에 그 묘소가 그윽히 자리했는바, 
 
 나의 명사(銘辭) 길이 없어지지 않으리니 후손들은 더욱 돈독할지어다.

단기사천삼백이십칠년갑술음십월 일립

월성정동휘추기

철성이석환근서

추기(追記)

  장릉(莊陵)의 절신(節臣)인 류서산(柳西山)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이조참판(吏曹參判) 김공종규(金公宗圭)가 지었는데, 그 묵태(墨胎)(백이(伯夷) 숙제(叔齊))에 못지 않은 굳센 절의와 청한자(淸寒子)(김시습(金時習))에 비길만한 굳은 지조에 대해서 하나하나 자상히 기술하고 지극히 칭예(稱譽)하였다.   오직 지곡송학도(芝谷松鶴圖)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소장된 것과 사림(士林)들의 향사(享祀)가 광산(光山) 덕림사(德林祠)와 공주(公州) 숙모전(肅慕殿)에서 행(行)해지는 것 등은 또한 가히 칭예(稱譽)하고 기술할 만한 자료인데, 이 자료는 모두 신도비문(神道碑文)이 이루어진 뒤에 얻은 것인 바, 칭예(稱譽)와 기술(記述)이 빠진 것은 사세(事勢)로 보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우찬성(右贊成)의 증직을 비문에 쓰지 않은데 이르러선 치명(治命)(유언(遺言))으로 볼진대, 참으로 잘한 일이라 말할 수 있지만 국제로 미루어 볼진대 그윽히 한 두 가지 말할 부분이 있다.   대개 대관대비(大官大碑)는 수백년 동안 전해온 국가의 율법 아닌 율법이다. 그런데 공이 지낸 관직은 사헌부(司憲府)의 감찰(監察)에 그쳤으니 만일 후일에 우찬성(右贊成)의 증직이 없었으면 공의 신도에 가히 대비를 세울 수 없는 것은 이치상 분명하므로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이제 대비에 다만 그 정륙품(正六品)의 감찰만 기록한 채 그 종일품의 찬성(贊成)을 기록하지 않고 그대로 비를 세운다면 그 선조를 위함에 있어서는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오직 국가의 율법에 있어서는 마침내 정륙품(正六品)의 소관이 대비가 있게 되는 결과로서 대관대비의 율법이 무너지는 것이다.   또 부종부직(婦從夫職)은 국가에서 정한 제도로서정경부인(貞敬夫人)의 칭호는 일품관의 처(妻)의 봉호(封號)이다. 이미 공에게 우찬성(右贊成)의 증직을 기록하지 않고, 그 처(妻)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의 봉호(封號)를 기록했으니, 이는 남편은 일품의 관직이 없으면서 부인은 일품의 봉호가 있는 것으로, 남편은 지위가 얕고 부인은 지위가 높은 셈이라, 마침 갓과 신발이 위치가 바뀌듯 그 순서가 어긋난 바 그 부종부직(婦從夫職)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점을 연구해 볼 때 공의 대비에 추은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비록 치명에서 나온 것이지만 대관대비의 율법에는 어떻게 할 것이며, 또 처(妻)의 봉호(封號)를 정경부인으로 기록한 것은 비록 추은에 인한 것이지만 그 부군에게는 증직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공의 후손들이 이제 대비를 세우고자 의논할 제 이 부분에 난처함이 있는지라, 나에게 와서 일언을 청하는 바, 내가 어찌 그점을 아는 위인이겠는가? 그러나 어쩔 수 없어 말을 한다면「서산공(西山公)에게 있어 대비는 있어도 그 명예가 더할 것이 없고, 없어도 그 영광이 덜할 것이 없는데 다만 그 묘소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꼭 세우고자 한다면 추은의 우찬성(右贊成)을 사세상 기록하지 않을 수 없고, 치명을 좇고 좇지 않음은 구태여 논할 것이 없다.」하니, 좌중(座中)에 있던 종현보(淙鉉甫)가 나를 향하여 말하기를 「당신의 말이 근거가 없지 않다.」하였다.   내가 감히 보(甫)의 말이 아호(阿好)하는 것이 아님을 믿고 돌아와 그 문답한 말을 기술하여 김참판(金參判)이 지은 글 뒤에 두도록 하노니, 이는 감히 예전 사람에게 이론을 세우고자 함이 아니라 다만 국제의 정례가 있음을 밝힐 따름이다.   옛적 한동(漢洞)은 지금 양주군(楊州郡) 은현면(隱縣面) 도하리(道下里)의 항동(項洞)으로, 18대주손(十八代冑孫) 학현(學鉉)이 거주하는 포천(抱川)의 자작리(自作里)와는 50리의 가까운 거리라고 한다.

 

贈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行通訓大夫司憲府監察西山柳先生

神道碑銘

 

洪惟我 世宗大王印方之堯舜制禮作樂崇儒重道以作成一時人材於是忠信瑰偉之材道德文學之士雲蒸霞蔚布列朝野以協成至治再傳而當 端廟遜位感激知遇盡忠所事有能抗千乘之威據鼎鑊之上裂肢體湛宗族灑然無人其心或掛冠毁冕登山逃海狂歌痛哭殁身而不悔世所稱死六臣生六臣者是也嗚呼大聖人作成人材之功收效於三十年之後者應若桴鼓之捷而天地以貞觀日月以貞明人物之所以生育社稷之所以長存賴以此耳不其盛歟乃若西山柳先生則尤可異焉以生者之心韜光歛跡人不得而知焉如先生之爲殆易所謂莧陸夬夬中行無咎者非歟先生諱自湄文化人始祖諱車達佐麗朝有功位大丞歷文簡公諱公權文正公諱璥貞愼公諱陞章敬公諱墩至 本朝有諱曼殊官左相寔先生曾祖祖諱原之商議中樞院事 贈吏判考諱浛縣監 贈判書妣忠州崔氏參贊濂女也先生以 景泰辛未登文科卽 文宗元年也歷官司憲府監察越五年乙亥 端宗遜位先生自以世臣不忍負舊主欲以身殉之諸子泣諫遂遯于海州首陽山之神光寺削髮衣緇而捿焉仲子待敎輊欲從之先生不可曰吾雖自棄於世汝何可同我輊每請覲輒曰臣父得心疾放浪山水間時六臣禍慘而先生與柳公誠源爲袒免兄弟又標高自異故輊懼禍及不敢直言托辞於病云成先生三問全家被禍之時成公之子有一女在襁褓先生潛自抱徃置之於首陽山下擇其女奴忠勤者使之乳哺徃來得養繼給衣糧辛苦鞠育及長使其第七子輯娶以爲婦先生又移住楊州之西山前後必入此山者意義不偶然也先生旣老謂諸子曰余之托跡空門非悅其道吾死不用茶毗但吾不能殉君毋葬我先人墓側題以本啣毋書爾曹推恩職也及卒諸子不敢違越先生以英質卓識晚得蜚英歷三司其論思獻替之際言論文章必有可觀而兵燹之餘一無所傳但其寥寥詩篇未滿數十首者藏於子孫巾衍而嘗試讀之則疎暢通達幽憤慷慨百世之下猶足以想像其爲人也先生墓在楊州之漢洞久而失其處 肅宗辛酉後孫世鼎得片石於墓前書曰監察柳自湄宛然可讀遂走相告子孫後先來謁而封築之 英祖己酉世冑請碣于陶菴李文正公而竪之 正祖甲辰楊州士林累疏請享于同郡清節祠後享梁山七賢祠配貞敬夫人晉州柳氏縣監瑱女有男七人長輪縣令次輊以佐理勳封文陽君崇政右贊成 諡平簡次軫府使次軒司果次轅縣監次輔直長次輯正郞女二人長適都事坡平尹龜齡次適都事延安金巑孫曾蕃衍不能盡記而忠孝義烈文學才識之士代不乏絶爲世所稱者班班可攷而知也此豈非先生扶植倫紀之大節潛德積蔭之餘慶宜有子孫之昌大故天之所以報之者若是其厚歟始諸子遵先生遺戒不書推恩之職不立隧道之碑其後子孫微弱不振遂失衣履之藏後雖得碣尋墓而改修又將數百年後孫又懼夫世故之多端而墓道無顯刻大書則又有如前之失乃合謀同力伐石治碑來告于余願有以銘之宗圭愚且晚岀何以及此且先生之節義心事陶菴先生旣於墓碣闡明之而名公碩儒又爲之表章而記述之者不一而足余何敢措一辭於其間耶但以請之之堅而屢辭不獲則窃以托名爲榮乃敢撰次本末且系之以銘銘曰 天賦恒性曰仁與義仁義之施自君親始臣之事君終始惟一不爲利誘不爲威怵義之所在勇徃直前是孰使之其性則然偉哉先生孤忠卓節 莊光之際國歩臲卼忍負舊主我志未逞棄官逃世没齒自靖首陽之寺緇衣蔽體西山之巔採薇以祭遺戒諸子我未殉君勿書推恩勿祔舊墳晦韜放跡前後八年一心如水實全其天廢而中權身否道亨歷數百年晦而復明 聖批陵誌簡册輝映清祠請享士論馳騁雲仍蕃衍忠孝翼翼積善餘慶天理不忒古云皓天千秋必返有欲爲忠尙宜知勉漢洞之原有窅其隧我銘不刋荑來裔

嘉義大夫前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原任 奎章閣檢校待敎知製敎安東金宗圭謹撰

追記

莊陵節臣柳西山神道碑文吏參金公宗圭之譔其於不下墨胎之抗節可侔清寒之牢志盖一一述之詳而稱之極唯芝谷松鶴圖之藏於澗松美術館士林爼豆之行於光山德林祠公州肅慕殿者亦可爲稱述之資而資皆得於文成之後漏於稱述勢固然也至其右贊成之贈而不書觀以治命固可謂良擧而照以國制窃有一二之可言者盖大官大碑是數百年來朝家匪律之律而公之行官止於烏臺之監察如於後日苟無右贊成之贈職公之神道之不可樹碑理之昭然不必多辨今於大碑只記其正六之監察不記其從一之贊成而因以立焉則其在爲先未知何如唯在邦律終歸於正六之官之有大碑而大官大碑之律壞矣且婦從夫職國之定制而貞敬之稱是一品官之妻之封號旣於公不書右贊成之贈職獨於其妻題以貞敬之號則是夫無一品之職婦有一品之封號而夫卑婦尊有如冠屨之倒置其婦從夫職之義顧安在哉以此究之公碑之不書推恩縱岀於治命而其於大官大碑何妻封之題以貞敬縱因於推恩而其於夫不書贈職何公之後孫方謀樹碑有難於此走余以丐一言余豈人哉而無已以獻言大碑於西山有之不足增其譽無之不足減其光但懼其失阡而必欲其樹也則推恩之右贊成勢不可不書而治命之從不從不必論也云座之淙鉉甫向余言子獻不爲無據余敢恃甫言之不阿好歸述其答問之語俾置于金文之下非敢立異於曩人祗明其國制之有定也舊之漢洞今爲楊州隱縣道下之項洞而於十八代冑孫學鉉所居抱川之自作里爲半百里之近云

檀紀四千三百二十七年甲戌陰十月 日立    

月城鄭東暉追記

鐵城李錫煥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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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159  광주공(경)약사 (廣州公(坰)略事) 167     편집인 2012/11/23  [878]  
158  영의정문희류공순묘표 (領議政文僖柳公洵墓表) 166     편집인 2012/11/23  [1038]  
157  문희공(류순)묘지명 (文僖公(柳洵)墓誌銘) 165     편집인 2012/11/23  [1135]  
156  우찬성평간공(지)약사 (右贊成平簡公(輊)略事) 164     편집인 2012/11/23  [1040]  
155  선산부사공(희철)묘갈명 (善山府使公(希轍)墓碣銘) 163     편집인 2012/11/23  [954]  
154  괴산공(계분)묘갈명 (槐山公(桂芬)墓碣銘) 162     편집인 2012/11/23  [1059]  
153  영암공(희정)묘갈명 (靈巖公(希汀)墓碣銘) 161     편집인 2012/11/23  [896]  
152  홍문관부제학류공희저신도비명 (弘文館副提學柳公希渚神道碑銘) 160     편집인 2012/11/23  [1177]  
151  사제부제학공(희저)사제문 (賜祭副提學公(希渚)賜祭文) 159     편집인 2012/11/23  [1008]  
150  금산군수성곡공(약)묘갈명 (錦山郡守醒谷公(約)墓碣銘) 158     편집인 2012/11/23  [1137]  
149  합천군수류공(륜)묘갈명 (陜川郡守柳公(綸)墓碣銘) 157     편집인 2012/11/23  [1080]  
148  반곡공(적)행장 (盤谷公(績)行狀) 156     편집인 2012/11/23  [916]  
147  문산군(하)약사 (文山君(河)略事) 155     편집인 2012/11/23  [1092]  
146  첨정공(인유)약사 (僉正公(仁濡)略事) 154     편집인 2012/11/23  [983]  
145  홍문교리죽계공(인홍)묘갈명 (弘文校理竹溪公(仁洪)墓碣銘) 153     편집인 2012/11/23  [1223]  
144  공조참의공(인호)약사 (工曹參議公(仁濠)略事) 152     편집인 2012/11/23  [906]  
143  안변공(인수)약사 (安邊公(仁洙)略事) 151     편집인 2012/11/23  [911]  
 증숭정대부의정부우찬성행통훈대부사헌부감찰서산류선생 신도비명 150     편집인 2012/11/23  [1163]  
141  서산공(자미)묘표 (西山公(自湄)墓表) 149     편집인 2012/11/23  [1147]  
140  광주목사공(곡)묘갈명 (光州牧使公(轂)墓碣銘) 148     편집인 2012/11/2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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